10월10일 참된 회개란?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0-10 07:15:38    조회 : 56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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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0월10일 월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수도회]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상의 기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갈라 4,22-24.26-27.31─5,1 † 복음 루카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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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란 무엇일까요? 악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의 선포일까요? 아니면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비와 사랑의 부르심일까요? 그것은 요나의 모습 속에 잠시 들어가 보면 압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평하신 하느님답지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주님의 명을 거스르고 도망치지만, 풍랑을 만나고, 바다 속에 던져져서 고래 배 속에 사흘간 잠들어 있다가 결국 주님의 뜻대로 니네베로 보내집니다. 요나 안에 내가 있습니다. 내 판단과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당함과 그분의 자비가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여전히 잘살고,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무시당하는 불공평한 세상을 그냥 놓아두시는 하느님이 못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자란 나를 통해서도 당신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하고, 내 욕심대로 살아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곧바로 벌하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불편한 윤리 규범이나 신자로서의 의무들이 못마땅할 때에는,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성당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속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우리의 아집을 곧바로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려는 것이었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도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한없이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넓은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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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많은 기적과 표징을 원하는 우리입니다. 2016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22-24.26-27.31─5,1 복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시각과 청각 중복 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헬렌 켈러 (Helen Keller, 1880~1868)는 자신의 책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첫날은 나를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는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 빛나는 노을을 볼 것이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 평생 세상을 볼 수 없었던 그녀였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세상을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을 딱 3일 동안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위와 같은 3일 동안의 계획을 말했던 것이지요. 아마 실제로 3일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큰 기적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앞을 잘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게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상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는 정말로 살고 싶은 기적 같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는 기적을 매일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텐데 실제 우리는 감사의 삶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드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더 좋은 것을 보고 더 좋은 말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할 텐데, 정작 나쁜 것을 보고 나쁜 말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이나 기적들을 청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해야 할 일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기적과 같은 삶인데 이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더 많은 욕심과 이기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삶에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고래 뱃속에서 삼 일 동안 지냈던 사건이 아닙니다. 요나 예언자의 말 한 마디로 니느웨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로 마음으로 돌렸던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표징은 마음의 변화, 진정한 회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 어떤 기적이나 표징이 와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많은 기적과 표징을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기적과 표징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기적과 표징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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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들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린다(정호승).
20161010_01.jpg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헬렌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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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과 창문 스승과 제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묻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젊은 부인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스승은 이제 제자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보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거울과 창문은 똑같은 유리로 만들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거울에는 은을 칠했고 창문에는 아무것도 바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칠한 은을 벗겨버려야 한다.” 내 마음에 칠해 있는 은은 어떤 것일까요? 욕심과 이기심의 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은, 미움과 다툼의 은 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내 마음에 어떠한 것도 칠해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0161010_02.jpg 이스라엘 요빠에 있는 고래 동상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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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상의 기적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 루카 11,29-32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상의 기적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병자를 치유하시고, 소경을 보게 해주시며,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변화되기는커녕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결정적 표징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향해 탄식하시며 나무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1,29) 군중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여주신 넘치는 자비와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비를 입고도 아무 생각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기적 야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조건 없이 믿어야 하는데 그들은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지요. 그들은 표징 자체인 예수님을 호기심과 자기성취의 대상으로 삼아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한없는 자비를 보여주신 까닭은 우리 또한 자비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영 안에서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하여 살아가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선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기쁘게 살아가라는 부르심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룩한 초대를 거부한 그들을 “악한 세대”라 하시며, “요나의 표징 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11,29)고 하십니다. 요나는 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으나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빠져 사흘 동안을 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납니다. 결국 주님의 뜻을 따른 그의 설교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리킵니다. 요나에게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불순명과 불신 속에 살아가는 나를 참아주시고 당신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요나를 통해 자비를 드러내시고, 그 자비를 받아들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가 바로 놀라운 표징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이야말로 결정적 자비임을 절절히 느끼고 있나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믿겠다는 가짜 믿음은 버려야겠지요. 예수님이 바로 표징이니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회개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산다면 나의 일상이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표징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바로 경이로운 기적이라면 얼마나 고귀하고 멋진 삶입니까! 나아가 하느님을 추방해버린 이 사회를 보며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고 행동을 바꾸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불의와 차별, 빈곤과 폭력, 생명경시,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수많은 폭력, 인간다운 삶의 실종 등 시대의 표징을 예수님의 눈으로 읽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곳마다 복음의 기쁨으로 채워 예수님이 드러나는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세상과 물질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우리 삶의 한복판의 주인으로 모실 것인지 선택할 것을 촉구 받고 있습니다. 그저 안일하게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하느님께 청하고, 신앙생활을 마치 다양한 문화행위 중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산다면 우리 또한 “악한 세대”라는 예수님의 질책을 듣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주님 앞에서 이기심과 호기심, 조건부 믿음, 현세에 기대어 자만자족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오늘도 새로움과 좋음의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일상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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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7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니느베 사람들을 위해서 요나를 보내시고 유대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오늘날에도 회개의 표징이 될 누군가를 보내주셔야만 할 듯합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느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조차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런 악인들은 싸그리 죽어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또 자신이 가서 아무리 외쳐보았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는 요나의 생각을 뛰어 넘습니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이 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다가왔고 마음를 고쳐 먹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도 악이 넘쳐나는 그런 세대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또다른 요나가 되고 또다른 예수가 되어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구원의 하느님 나라 잔치에 모두가 초대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시댸일수록 슬픈 소식, 절망스러운 나쁜 소식을 전하지 말고 희망과 자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고 악인의 패망을 바라지 않으며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고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를 언제나 바라시니까요. 오늘 그 어떤 죄인도 그 어떤 악인도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게 될 거라는 기쁜 소식을 우리의 생각과 말로 전할 수 있는 복된 날 만드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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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참된 회개란? 2016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1,29-32 참된 회개란? 그렇게도 가슴을 치고 골백번도 더 ‘날 한번 믿어 달라, 이제는 정말이지 새 출발을 하겠다.’던 한 친구가 또 다시 ‘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인 편지 한통을 보내왔습니다. 보내준 사진을 보니 이제는 청소년기를 지나 완연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편지 내용만 봐서는 정말이지 거의 ‘진정한 회심자’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 못지않습니다. 그 친구의 편지를 읽으면서 한 가지 든 생각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참으로 어렵구나!’ 마음으로는, 생각으로는, 그리고 결심으로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실제 생활과 연결되지 못하는 머리로서 만의 회개는 온전치 않은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참된 회개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입니다. 글이나 외침으로서의 회개가 아니라 삶을 통한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 불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며 성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회개라는 특별한 작업을 실시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왜 필요합니까? 진정한 회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은총은 무엇입니까? 회개 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송구스러움에 크게 가슴을 치는 일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고통을 안긴 이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보다 중요한 것, 참된 회개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행동 하나 하나를 기억하셨다가 철퇴를 내리시는 징벌의 하느님의 아니라 돌아갈 때 마다 활짝 팔을 벌리시며 또 다시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 삶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사실은 선물이요 축복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 갖은 결핍과 죄 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란 존재 흙부스러기처럼 나약하고 머리칼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안심하고 기쁘게 지상생활을 엮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저 사람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그를 귀히 여기고 그란 존재 안에 깃들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가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작업 한 가지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가 이루어진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진정한 회개 이후에야 우리는 참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또한 나란 존재에 대한 참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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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1,29-32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選民思想’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였고,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다른 민족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민족우월주의를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도 타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교도라는 이름으로 배척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서 사람의 인격을 차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Veritas liberbit vos!)’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고, 이제 우리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세계 인권선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인간은 성별, 피부, 민족, 재능, 능력’에 따라서 차별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 질병, 굶주림은 사람들의 인격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살고 있고, 재물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은 전쟁과 폭력을 가져오고 있으며, 수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Veritas liberbit vos!)’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방전된 핸드폰은 충전을 해 주어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연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연을 날리는 사람과 연줄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 우리를 영적으로 충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나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영혼의 암세포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은 우리의 마음에 암세포처럼 자라납니다. 그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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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속 마음이 소중하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10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1,29-32 속마음이 소중하다. 저는 빨래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뜻한 바가 있어서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고 짤순이를 이용 했습니다. 빨래하고 다림질 하고 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말 한 짝도 빨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탁하던 시간만큼 시간이 남아야 할 텐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더러움을 씻겨내면서 내 마음의 더러움도 깨끗이 정화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다림질을 하면서 내 마음이 반듯해지기를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우미께서 다해주니까 그런 생각을 할 기회도 많이 놓쳤습니다. 분명한 것은 남이 나를 정화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겉은 깨끗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속을 거룩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보다도 내 마음이 더 빨리 더러워지는데도 세탁하는 것에는 민감하면서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에는 소홀합니다.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하면서도 내 마음을 빛나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간직합니다. 외적인 매무새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가꾸는 일에 다시금 정성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천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40번 주님의 발자국 아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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