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주님께 인정받는 모습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0-12 06:20:13    조회 : 492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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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0월12일 수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수도회] 의무 충족 그 이상의 사랑과 정의의 실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갈라 5,18-25 † 복음 루카 11,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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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작정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이른바 독설을 뿜어내십니다.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시고, 그 이유를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오죽하면 속이 불편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는 항변을 했을까요? 치부를 들추어내고, 상대방을 면전에서 모욕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분노를 자아냅니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당혹감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분노와 앙심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상대방의 ‘리듬’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잘못을 비난하고 훈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의 리듬에 따라 먼저 장단을 맞춰 주고 공감해 주면,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자아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가끔 돌직구를 날리는 충격 요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양과 지도자로서의 표양을 보여야 하는 이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분노[義憤], 또는 공공의 분노[公憤]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상식과 기본이 무너진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인이 보여 줄 것은,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익을 해치는 악에 함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덕은 하느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지, 불의에 순종하고 이기적 자기애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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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16년 다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8-25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벌건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서 무엇을 찾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너무나 궁금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특정한 누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떤 사람들을 찾습니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으려고 등불을 켜들고 헤맸지만 한 사람도 없네요.”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다운 사람은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내가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시련을 외면하는 것 역시도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만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주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보고 만족하실까요? 결국 자기만의 만족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정말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주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시작하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심 행위에만 마음을 쓸 뿐 사람들에게 참된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나 하느님의 사랑은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까지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절대로 만족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비로소 우리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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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그때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가족이 되면 되는 거란다 (모리 에토).
20161012_01.jpg 디오게네스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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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조선 시대 초기에 청렴함의 대명사이었던 맹사성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있으면서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선비가 와서는 맹사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보시오, 노인. 지금 건넛마을에 급한 일이 있는데 보다시피 내가 새 버선에다 새 도포를 입어서 개천을 건너기가 곤란하니 나를 좀 업어서 건너가게 해주시오. 그러면 오늘 낚시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은 주겠소.” 맹사성은 “제가 노인이라 기운이 많이 모자라지만, 어디 이리와 업히시오.”라고 말하면서 젊은 선비를 업어서 강을 건너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물었지요. 이 젊은 선비는 “여기 맹사성 정승 대감이 내 부친 친구이신데, 벼슬 자리 하나 부탁하러 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맹사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양반 헛수고하러 가지 마시고 그냥 지금 돌아가시오.” 선비가 왜 그러냐고 하자, 그때서야 맹사성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선비는 너무나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가고 말았지요. 이렇게 겉모습만 보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 능력과 재주, 외모 등의 겉만 보고 쉽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스스로도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겉모습 대신 속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까요?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앞선 젊은 선비처럼 놀라고 부끄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20161012_02.jpg 경기도 광주의 맹사성 선생님의 묘.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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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의무 충족 그 이상의 사랑과 정의의 실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루카 11,42-46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의무 충족 그 이상의 사랑과 정의의 실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11,42),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며(11,43),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11,46) 바리사이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불행선언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재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은 의무 충족 그 이상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자기포기와 남을 위해 자신을 거저 내어주는 희생 없이 사랑할 수 없고, 의로움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 마음에 드는 끊임없는 행동 없이 정의를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란 엄청난 도전이지요.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진 의무를 실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열정 없이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의 고유한 특징은 ‘더’에 있습니다. 의무를 다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사랑을 실천하고, 지금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십일조를 충실히 내고,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관념적 일치를 이루며,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소극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불행하다!’는 말씀을 듣겠지요. 늘 '지금보다 더' 열정과 사랑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와 의로움이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생각과 규범과 관습, 이론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물론 주일미사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이단에 빠지지 않으며, 성경을 묵상하고 매일 정해진 성무일도나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성경과 교리 지식에 해박하고 탁월한 언변을 지니는 것도 좋습니다. 선행과 자선을 베풀고 교회와 사회에서 봉사하며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것도 우리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충분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늘 자만자족과 안일함을 경계하며 겸손해야겠지요! 주님께 다가가는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한 유한한 인간의 천상을 향한 순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의 평가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앞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더 잘 응답하지 못함에 가슴 아파할 줄 알아야겠지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길은 주님과 동료 인간을 섬기기 위한 길이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저 낮은 곳으로 향하는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섬김을 받고 인정받으려는 유치한 몸부림을 버리고, 겸손하게 모든 이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11,46). 오늘도 참 제자의 길은 의무 충족이나 규범 준수에 있지 않으며, 그것만으로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닫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만족과 안일함의 잠에서 깨어나,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고 받아들이는 행복한 순례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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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갈라 5,25) 우리 안에는 영도 있고 육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기에 사람은 육으로 기울 수도 이고 영으로 기울 수가 있습니다. 온전히 영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때론 육적인 상태에 놓이기도 합니다. 육은 본능적인 것들이라 영이 약하다 싶으면 강력하게 우리를 죄와 악으로 몰아 갑니다. 그러니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온전히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영은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을 향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악랄한 사람도 그 안에 영이 있는 한 하느님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육의 본성에 따라 살면 영이신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영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가려 노력하는 사람은 점점 영적인 사람이 되어 영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도 한쪽에서는 육이 내 팔을 잡아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영이 내 팔을 잡아 당길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육이 이끄는 쪽은 우선 달콤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하느님께로 멀어지게 만드니 영이 이끄는 순진하고 소박하며 진실하고 아름다운 그 길로 애써 따라가는 날 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지닌 영적인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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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 11,42-46 지난 월요일에는 용인 천주교 묘지엘 다녀왔습니다.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신부님의 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묘지엘 가면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직 잎은 푸른데, 날씨는 꽤 쌀쌀해졌습니다. 쌀쌀해진 날씨를 보면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가을이 오기 전에 더 많이 웃고, 더 열심히 살고, 더 감사하며, 더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이었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는 쓴 경우가 많습니다. 듣기 싫은 말이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손에 굳은살이 생기지 않고서 기타를 잘 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성격이 급해서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한잔 술을 좋아해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녁에 씻고 자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잘 때도 많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조언과 충고를 들으면 알았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서 가톨릭이 운영하는 ‘희망원’에 대한 보도를 하였습니다. 희망원에 대한 국정감사도 있을 거라고 합니다. 인권유린은 없었는지, 재정은 투명하게 관리되었는지, 직원들의 근무는 성실했는지, 성직자들은 관리를 잘 했는지 조사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진행자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묵묵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이 어려운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보도를 달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도록 하고, 사과할 일이 있으면 겸허하게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의 욕망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욕망이란 ‘시기, 질투,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과 같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 율법학자’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신앙 또한 성령의 열매로 알찬 결실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절망과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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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꾸중을 감당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 11,42-46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천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53번 주는 나의 목자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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