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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15일 토요일
[(백)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수도회] 고통을 녹이는 인내와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1,15-23
† 복음 루카 1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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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생각, 판단과 행동은 단순한
정신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靈)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영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부어져 있으며, 신앙인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을 느끼고, 그 영의 인도에 따라 삽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간직한 희망과 우리가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교리 지식도 충분하지 않다고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혜의 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양심 안에 심어져 있는 하느님 영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고, 곳간에서 좋은 것을 꺼내듯, 내 안에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식별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시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십니다. 왜일까요?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무시하며, 내 멋대로 살아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바쳐지신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의 죄는 씻어집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하느님의 영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희망 없는 절망으로 몰아내는 이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죄는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남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을 방해하는 죄,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쁨과 희망을 잃게 하는 죄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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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2016년 다해 10월15일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몸인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5-23
복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어제 선배 신부님께서 본당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성지에 오셨습니다.
미사 후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신부님 앞에 앉으니 본당 신자들이
식사를 접시에 담아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소에 먹는 양의
1/3만 담아서 오신 것입니다. 처음에 담아 오신 양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 담다가 말았나 싶었지요. 하지만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선배 신부님의 식사 양이 워낙 적었던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방금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식사양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나와 상대방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기준에 상대방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기준이 보편적이라고 해도 밥을 많이 먹는 것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것을 틀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리지외의 아기의 예수 데레사 성녀와 구분하기 위해
대데레사라고 부르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녀께서는 중세시대의 인물로, 당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정도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성녀는 초창기의 엄격한 수도 생활의 규율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수도원 개혁을 일으키십니다. 수도자이기는 했지만 과연 여성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너무나 엄격한 규율의 준수라면서 과격파라는
비난을 받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 수도원 개혁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녀께서는 철저히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성령의 활동을 굳게 믿고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의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15개의
남자 수도원과 17개의 여자 수도원을 창립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세상에 증거하는데 분명히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도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활동하시는 성령이 움직임을 방해하고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을 향해서 ‘환자’라는 표현을 하면서,
“너무 종교에 미쳐서 사는 것 아니야?”라고 비판하십니다. 새로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신 자매님이신데, 대모님께서 교무금을 너무
많이 낸다면서 적게 봉헌하라고 했다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더군요. 이런 식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십니다.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또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한다면 어떨까요? 그때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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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뿌리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뿌리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뿌리면 운명을 거둔다(G. D. 보드맨).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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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가기.
운전을 할 때에 반드시 잘 봐야 할 것은 신호등과 표지판입니다.
신호등과 표지판을 보지 않고 멋대로 운전을 하게 된다면 도로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남미의 페루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루의 수도인
리마 시내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난폭 운전에 신호등이나
표지판을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차선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2차선 도로에 3대의 차가 나란히 갑니다. 이런 곳에서 과연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거의 무법지대 같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강력한 인상을 담고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하늘에는 표지판이나 신호등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데도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비행기가 비행하는 것일까요? 기장 마음대로 또 느낌대로
비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로가 있어서 그 길로
정확하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가야하는 항로로
정확하게 가야지만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이십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내 귀에 직접 대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고 또 들리지 않는다고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며 살아야지만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나라에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어제 성지를 찾아오신 인천교구의 중3동성당 신부님과 신자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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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고통을 녹이는 인내와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15일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
루카 12,8-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고통을 녹이는 인내와 사랑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12,8)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신께 대한 신앙고백과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이어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 가운데서도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12,12).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쳐 투신하는 신앙고백을
요구하십니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사랑에
찬 삶으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인격에 온전히 동화되고 변모되어가는
제자들의 삶은 때로는 반대를 받고 거부 당하기도 하며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제자로서 살아가려면 단단히 마음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의지나 능력, 재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신앙이 빛을 발하고 참 신앙인지 거짓 신앙인지 가려지는 순간은
고통과 박해를 겪을 때입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은 어려움이나 고통이
닥치면 중심을 잃고 하느님과 무관한 현세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현세적인
이익이나 편리함을 좇아 주님을 변두리로 내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어려움 앞에서도 우리의 처지를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으면서 ‘그분이 원하는 선택과 결단’을
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참 신앙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녀는
15-16세기 혼란의 시기를 보내던 교회에 쇄신을 불러일으켰고, 가르멜
수도회의 쇄신과 영성 정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성녀는
수도원을 개혁하고 고행과 관상을 통해 참된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에 부딛칩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온갖 고통을 인내롭게 받아들이며 이겨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인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무것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아무것에도 너 놀라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니.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시니 인내로써 모든 걸 얻으리라.
하느님을 차지하는 이 아무것도 아쉽지 않아 하느님만으로 족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아까워하지도 맙시다. 주님 사랑에 대한 어울리는
보답은 사랑으로 고통과 박해를 견뎌내고, 일상의 수고로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사랑은
되돌림이요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보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데레사 성녀와 함께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인내하며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기쁘게 제자의 길을 걸었으면 합니다. 인내와
사랑으로 고통을 녹일 때 모든 순간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은총의
순간으로 변모되지 않을까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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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15일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전해 듣고,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에페 1,15-16)
“어떤 것도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빌라의 데레사가 책갈피에 넣어
자주 바치던 기도입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을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이유도 에페소인들이 지닌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요.
여러분은 어떤 믿음의 생활을 하십니까?
뭘 믿으시나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나요?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느님만이 지나가지 않고 영원하시고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냥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은 얼마나 복될까요?
실제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잠시 지나가고 마는 것인데
그 일시적인 것을 얻고자 온 힘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지나가는 현세에 집착함이 없이 늘 하늘나라를 꿈꾸며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복된 믿음의 사람이요 사랑의 사람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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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16년 다해 10월15일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 12,8-12
어쩌다 옷을 뒤집어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몸이 불편하기도
하고, 어색하기 때문에 다시 갈아입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인지, 잘못된 길을 가도, 쉽게 되돌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기쁨이 사라지고, 거짓과
위선으로 양심을 속이고, 욕망과 쾌락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분명 내 영혼의 옷을 잘못 입었는데도 모른척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탑을 세우는 것은 어렵지만, 탑을 허무는 것은 쉽다고 했습니다.
삼성전자의 핸드폰은 지난 28년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세계적인
상품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갤럭시 노트 7은 삼성전자가 심혈을
기울여서 내놓은 신제품입니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서인지 제품에
결함이 발생하였고, 급기야 출시 2달 만에 단종 되었습니다. 이번 일로
삼성은 금전적인 손실은 물론, 그동안 쌓아온 기업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업 삼성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가톨릭은 긍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분사회를 넘어서 모든
이가 한 형제, 자매가 되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모진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불의에
맞서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왔습니다. 어두운
곳에 희망의 빛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싶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1980년대 많은 예비자들이
성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도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마치 학원에서
수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성장의 이면에
그늘도 생겼습니다. 교회의 대형화, 중산층화, 제도화라는 말이
등장하였습니다. 소공동체의 활성화, 교회의 재복음화를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되찾으려하지만 아직은 그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출산율의 저하와 고령화 사회라는 대한민국의 문제가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한용운 스님의 ‘복종’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면 그것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189번 지존하신 성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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