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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16일 주일 [(녹) 연중 제29주일]
[수도회] 절망과 패배감을 이기는 절박한 기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탈출 17,8-13
○ 제2독서 2티모 3,14─4,2
† 복음 루카 18,1-8
우리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기도하기를 잊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줄곧 조르는
과부의 비유를 드시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는 성경을
읽읍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선포하기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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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특별한 기도의
비법이나,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비한 기술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실망하지 말고 쉼 없이 기도하라는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가장 깊이 이해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지닌 위대함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능력이지만, 이 희망을 잃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성을 먼저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희망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인내와 희망의 기도를 온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내 몸을 가꾸는 일부터, 내 생활 습관을
바꾸고, 내 의식을 바꾸는 데 평생을 걸려도 이루지 못하는 게
다반사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라는 바오로 사도의 격려는 복음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인내와
끈기가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차 참고 견디는 것을 바보스러운 우둔함이라고
여기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쉽게
분노하며, 우울증과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올바른 판결을 받아 낸 한 과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느끼고 희망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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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할 때
2016년 다해 10월16일 연중 제29주일
제1독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였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7,8-13
제2독서
<하느님의 사람은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3,14─4,2
복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어제 저녁 일정을 마치고서 성지 주변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바닥에 깔려 있는 고압블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10년 전, 제가 이곳 성지를 조성하기 시작했을 때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어느 곳에서 보드블록 공사하고 버린 것들을 모아서 바닥에 깔았던
고압블록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처음 성지에 왔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고 휑함만을 느낄 수 있었던 성지였습니다. 지금처럼
성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잘 정돈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할
것이 많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일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당도 두 개나 가지고 있고, 피정의
집이 있어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성지 주변을 산책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가능한 일이 되어서 현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품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불가능하다, 할 수 없다, 포기해야 한다.’ 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을 때에는 정말로 불가능하고 할 수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듦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을 때에는 어느 순간에 가능한 일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잘 하는 것이 있을까요? 걷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기어
다니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말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저 우는 것만 잘 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잘 하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처음에는 못했던 것들을 많은 노력을 통해서 잘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한계를 지어서 포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것을 우리들에게 명하십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끝까지
매달리는 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해주시지요. 그 재판관이 불의한
사람이지만 귀찮도록 매달리는 과부에게 시달리다가 결국은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 역시 이러한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 노력과 함께 매달리는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어서 포기하면 그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 넘는 노력과 함께 주님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할 때 나를
뛰어넘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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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거나 햇볕이 쨍쨍한 날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날씨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택할 수는 있다. 그러니 좌절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콘스탄틴 마이클 먼티스).
성지의 은행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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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찻잔
인터넷에서 본 내용입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주는 내용인 것 같아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봅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피곤이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실로 오랜만에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군은 자신이 즐겨 마셨던 차가 생각나서, 귀하게
여기면서 보관하고 있었던 찻잔을 꺼내서 차를 우려냈지요. 그리고 한
모금을 향기와 함께 마시려는 순간에 그만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져서
놓칠 뻔 한 것입니다. 다행히 다른 손으로 얼른 잡어서 잔을 깨뜨리지는
않았지만, 워낙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찻잔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지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장군은 자신의 이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아끼는 부하들이 눈앞에 쓰러져 갈 때에도, 또
적군에 포위되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도 이렇게 찻잔이 깨질까봐
가슴이 철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병사의 생명보다 찻잔
하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이 장군은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찻잔을 과감하게 깨버렸습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들은 정작 소홀히 여기면서 다른 부차적인 것들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에게 늘 힘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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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절망과 패배감을 이기는 절박한 기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16일 연중 제29주일, 루카 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루카 18,7)
절망과 패배감을 이기는 절박한 기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18,7-8).
불의한 재판관도 배경도 없고 뇌물로 바칠 돈도 없는 과부가 끈질기게
청하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거든, 주님께서야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도는 삶의 호흡이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끈입니다. 기도란 절망과 패배주의와 비관주의의 병을 이기는
힘이요 약입니다. 이렇듯 기도란 신앙인들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세상의 힘에 기대려 합니다. 삶이 바쁘다
보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무엇을 하든 “기도와 헌신의 정신 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믿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경쟁과 성공, 효율과 업적을 좇는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영(靈)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을 선포하고,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며”(2티모 4,2)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힘을 믿고 그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1독서 탈출기는 기도의 힘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중에는 목마름과 굶주림, 우상숭배와 이방인들의 위협 등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나이 산 가까이에 있는 르피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족속들이 몰려와서 그들의 길을 막자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전투가 벌어집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아말렉을
맞아 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형 아론과 후르를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습니다.”(탈출 17,11) 모세의 기력이 빠지자 아론과 후르가
그의 팔을 계속 떠받쳐 결국 아말렉을 물리칩니다(17,12). 이스라엘은
힘이 없었으나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의무적으로 기도할 것이 아니라
희망이요 의미이신 주님께 마음과 혼을 다해 ‘끈기 있게’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돈이나 지식이나 지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겠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게 되고 주님의 영 안에
머물며,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매순간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가난한 마음과 주님만이 나의 희망임을 굳게
믿는 확고한 신앙 안에서,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불의가 나를 덮치고 내 앞이 캄캄하고 절망감이 밀려올 때도 주님만이
나의 산성, 나의 구원자이시니, 낙심하지도 체념하지도 말며
패배주의나 비관주의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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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16일 연중 제29주일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2티모 4,2)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 18,1)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한마디로 '끈기'라고 해야겠네요.
여러분은 끈기있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뭘 좀 해보다가 안 되면 관두는 형인가요?
한다면 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해도 끈기있게 해야하고 말씀을 선포해도 끈기있게 하라시네요.
기도를 99일 하고 이제는 더는 못하겠다고 포기하면
100일째 이루어질 일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100번을 이야기해도 못알아듣는다고 포기하면
101번에 알아들을 일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7번을 용서하고 더이상 못참고 분노를 한다면
8번을 용서하면 그 사람이 찾아와 잘못을 뉘우치며
사과하려 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만 두었으면 하는 그때 한번만 더 해 봅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냥 지속하지 않겠어요?
기도와 말씀묵상은 결국 우리가 매일 숨쉬는 것처럼
또 매일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니 9일기도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고
묵주기도 100단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숨쉬고 밥 먹고 잠을 자야 하듯이
나의 기도와 말씀묵상은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만드는
보약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맛있다고 과식하는 것이 좋지 않고
피곤하다고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 또한 건강에 좋지 않듯이
기도도 한꺼번에 많이 하려는 욕심보다
매일 적절히 꾸준히 하려는 훈련이 필요해 보입니다.
성경을 한꺼번에 통독하여 몇 번 읽었다 자랑하기보다는
매일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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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오늘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
2016년 다해 10월16일 연중 제29주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 루카 18,1-8
오늘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
예수님께서는 밤낮없이 졸라대는 집요한 과부의 예를 드시면서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가 지니고 있는 힘을 잘 알고
계셨기에, 더 간절히, 더 정성껏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봅니다. 청원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질, 기도의 방향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고 이기적이며
옹졸한 청원기도가 아니라 크고 이타적이며 관대한 청원기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고, 고통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높은 자리, 물 좋은 자리,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남들이 가기
가장 꺼려하는 낮은 자리를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가
크게 바뀌고 회개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고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죽어도 용서 못하는 마음을 버리고 보다
큰마음으로 용서하고 더 적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영적이며 더욱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막의 성자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의 ‘의탁의 기도’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소서.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있습니다. 만사가 잘 풀릴
때는 다들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큰 절벽 앞에 설 때,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가 다가올 때 기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불만,
좌절과 실의만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적이며 쌍방적인 것인데 많은 경우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는 관심이 없고 무조건 하느님을 밀어붙입니다.
기도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자판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마다 우리는 청하는 바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 작업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 기도의 질, 기도의 순수성이 진정
그분 마음에 드시는 것들인지 아닌지 성찰하고 식별해가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이 순간 나와 우리 공동체를 위해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무엇인가 고민하고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왕 바치는 기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대견해하실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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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9주일
2016년 다해 10월16일 연중 제29주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 루카 18,1-8
주로 강의를 하는 편이지만, 기회가 되면 강의를 듣곤 합니다. 오늘은
신학생들과 함께 들었던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강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화’는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예수님께서 전한 표징과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신학생들도 나름 복음화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결국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구세주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까?
첫째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죄를 용서받았으며, 구원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40일 동안
단식하신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이겨내신 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그
끝은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악은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머’라는 생각으로 지금 나의 잘못을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으로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멈추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으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세 번째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오면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내가 행하는
잘못들을 뉘우치게 해 줍니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면 분쟁과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이고, 실천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베토벤 / 교향곡 제6번 '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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