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0-21 06:49:09    조회 : 490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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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0월21일 금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수도회] 하느님 안에서의 공생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4,1-6 † 복음 루카 12,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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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이 요청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동하며 바친 첫 응답을 잃어 가는 우리를 채근하는 말씀입니다. 감동은 언제나 생의 밑바닥에서 일어납니다. 내 속된 마음이 진실함과 만나 정화될 때, 내 가볍고 천박한 생각이 혜안을 열어 주는 깊은 가르침을 만날 때, 감추고 싶던 내 상처와 죄로부터 치유와 용서를 받을 때, 나의 내적 갈증을 채워 주는 우물 같은 사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첫 감동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식상해지기 마련입니다. 내적 감각이나 예민했던 감수성도 사라지고, 상대를 향했던 존경심과 신뢰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라고 표현합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자유를 잃은 것이지만, 주님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어 세상의 어떤 구속과 억압에도 자유롭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처음 체험하고, 교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세례를 받고,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부르심에 응답했던 첫 순간들은, 첫 마음의 순수함이었고, 주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란 희망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요?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는 예수님의 훈계는, 부르심을 받을 때 가졌던 내 영의 맑음을 잃어 가면서 세상일에는 더 밝아지지만, 내 영혼을 옭아매고 어둡게 하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 내지 못하는 우리의 우둔함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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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죄를 멀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6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54-59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관계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분명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관계가 정답일 텐데, 사랑보다는 미움의 관계 그리고 일치보다는 분열의 관계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 사랑의 관계, 일치의 관계를 만들지 못할까요? 첫 번째 원인은 ‘죄’에 있다고 봅니다.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죄’로 인해서 관계가 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듯 합니다. 이 두 개의 원인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고, 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에 대한 판단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강약의 차이 없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히 좋은 관계인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원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딸이 아버지에게 학창시절에 받은 상처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아빠는 제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때 아빠는 늘 성적 얘기만 했었죠. 따뜻한 사랑에 목말랐는데 공부에만 허덕이게 하셨단 말이에요.” 이 아버지는 이 말에 무척이나 서운했고,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즉, 나름대로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었다고, 또 어떤 아빠도 완벽할 수 없는데 왜 너는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냐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순간 이런 말은 오히려 큰 실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딸이 틀렸다는 말이 되어서 더 큰 상처만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서 이렇게 말한 뒤에, 이 부녀는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 때문에 네가 아파했었다니 정말로 슬프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단다.” 상대방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조건 맞다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사랑의 관계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마음 때문에 그렇겠지만, 또 하나는 나만 맞다는 생각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재판관 앞에 갈 때 고소한 자와 어떻게든 합의를 보도록 힘쓰라고 하지요.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합의가 가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상대방이 맞다고 이야기해주고 이해하려고 할 때 합의도 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나의 기준에 맞춰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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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삶이 정각에 출발하는 건 아니야. 모든 삶이 정각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지(칼 필레머).
20161021_01.jpg 우리는 왜 올바른 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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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있는 모습 그대로(에리히 프리트) “바보 같은 짓이야.” / 이성이 하는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이 하는 말입니다. “불안한 일이야.” / 계산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네.” / 두려움에서 나온 말입니다 “절망적인 일이군.” / 통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소로운 일이야.” /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솔한 일이야.” / 신중함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야.” /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건 본래 그래.” /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디서 나온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61021_02.jpg 밝은 낮보다 어둔 밤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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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하느님 안에서의 공생의 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하느님 안에서의 공생의 길 오늘의 말씀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는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사랑이신 주님께로 가는 길이지요. 바오로 사도는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먼저 사랑을 위해 겸손과 온유를 다하라고 합니다. 낮추고 작아지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엄격함과 냉정함과 완고함을 버리고 남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라 합니다. 사랑은 인내입니다. 남의 볼썽사나운 모습과 옳지 못한 행동, 오만하고 모욕적인 언사, 이기적인 처신과 악행을 참아 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물론 감상적 사랑으로 그러한 것들을 묵인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참 사랑은 또한 정의로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끝으로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약함과 사랑의 결핍, 자기중심적 경향 등으로 분열되고 갈등 속에 빠지곤 하지요. 사랑이 부족하면 일치도 깨지기 십상입니다. 일치가 깨질 때 성령의 작용도 멈춰버리고 행복은 뒷걸음질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좀 더 넓은 사회적 차원에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자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57)고 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질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인들마저도 하느님 나라의 진리나 사랑, 영적인 가치는 깨닫지 못하면서 세상 지식에 몰두하여 살아갑니다. 또 얼핏 보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내면의 평화와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며, 남에게 잘 보이려고 선행과 기부를 하고, 심리적 정서적 만족을 위해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라 하십니다. 자신을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지요. 행려인들, 실직자들, 갑을관계의 부당하고 불평등하며 비인간적인 구조 속에서 절규하는 이들,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별 속에 절망하는 이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조리들, 정치권력의 부패, 인간성을 짓밟는 자본의 횡포, 생태계 파괴 등이 던져주는 표징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남남이 결코 아닙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자녀들이지요. 그렇다면 다른 이들의 아픔과 신음소리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삶을 향한 절규 앞에,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저미는 분노와 슬픔에 마음의 문을 닫아서도 안 됩니다. 다들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나 혼자만 행복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서로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시대의 표징을 읽으며 이 땅의 아파하고 슬퍼하며 억울하고 비참함의 늪을 헤매는 이웃과 함께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길을 걸어가도록 온 마음과 힘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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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4,1)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은 어떤 부르심을 받았나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맘에 새기셨나요? 아마도 조금씩 다르긴 해도 사랑하며 살아라, 베풀며 살아라, 겸손하게 살아라, 참아주라. 이런 소명을 받았을 겁니다. 사도 바오로 이렇게 말하네요.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오늘은 내가 받은 부르심을 되새겨 봅시다. 하느님께서 내 맘 깊숙한 곳에 심어 놓으신 그 소명을 다시 꺼내어 보며 그 소명에 충실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합시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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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우리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우리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 계속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를 깊은 성찰과 고민에로 초대합니다. 최근 각 지역 교회에 파견되어 있는 교황 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시의적절한 그러나 쉽게 꺼내기 힘든 말씀을 토해내셨습니다. 주교임명 제청권을 지니고 있는 교황 대사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제게 있어 가장 큰 걱정꺼리이자 중요한 과제는 미래 주교들을 임명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주교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이어야 합니다. 경력이 화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대신 기도하는 주교, 세속적인 삶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가치 있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주교, 하느님 현존 안에 인내로이 관상할 수 있는 주교, 복음을 배반하지 않은 주교, 군주나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참 목자로서의 주교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내고 들판으로 나가십시오. 저를 대신해서 그런 주교들을 찾아주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년 전 말씀하신 아주 강도 높은 발언, “교황대사로서 수행해야할 첫 번째 임무는 적절한 주교 후보자들을 천거하는 일입니다. 부디 야심이 있는 사람들, 주교직을 노리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주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경고를 되풀이하신 것입니다. 며칠 전 교황님께서는 바티칸 광장에서 개최되는 삼종기도 시간에 13명의 새로운 추기경 명단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중에 한분의 이름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대체로 대주교나 주교였는데, 이분만 사제였습니다. 그것도 은퇴사제. 알바니아 출신 에르네스트 시모네 신부님이십니다. 그분은 공산 정권 하에서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18년 동안에 걸쳐 강제수용소에서 중노동에 시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공산 정부로부터의 갖은 협박과 탄압 속에서도 사목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수용소 생활 중에도 사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간수들의 눈을 피해 미사와 고백성사를 집전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수감자들을 살뜰히 챙겼습니다. 자기 한 몸 돌보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끊임없이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14년 알바니아를 사목 방문하실 때 시모네 신부님을 만나셨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신앙고백 앞에 교황님께서는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그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잔혹하고 비열한 공산정권의 압제 앞에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꿋꿋이 신앙을 증거한 알바니아 교회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고령의 시모네 신부님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 앞에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 우리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살아있는 성인(聖人) 교황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으니 얼마나 축복된 사람들인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불쑥불쑥 건네시는 말씀들이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장 소중한 인생의 진리, 신앙의 핵심을 건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교황님의 등장은 우리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 분명합니다. 그분의 출현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변방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 각별히 챙기고 그들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시대가 열리고 나서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분께서는 온 몸으로 외치고 계십니다. “이제 권위와 군림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겸손과 섬김의 새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이제 어젯밤의 따뜻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입니다. 더 성장하고, 더 쇄신되고, 더 봉사하고, 더 사랑해야 할 새 시대를 열어갈 순간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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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를 묵상하면서 떠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강론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신학교 2학년 때인 1983년 ‘강론 대회’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강론의 주제는 오늘의 제1독서 내용이었습니다. 33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철학적, 신학적인 논리로 강론을 하였습니다. 친구는 시장에서 그릇을 파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그릇을 팔다보니 목소리가 커졌다는 이야기, 모든 그릇들은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신뢰,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담으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강론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친구의 강론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강론대회의 결과는 삶 속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의 우승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강론을 할 때면 생활 속에서 주제를 찾곤 했습니다. 가볍고, 친근한 소재를 가지고 강론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강론에 대한 강의를 할 때도 4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시대의 징표, 기도, 말씀의 실천’입니다. 시대의 징표는 눈으로 보아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하고,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드러나는 일들의 원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이야기 하십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인터넷 검색어에 등장하는 내용을 생각합니다. ‘백남기, 세월호, 사드, 미르, K 스포츠, 회고록,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흙수저, 갑질’의 주된 내용은 무엇일까요? 편을 가르고, 분쟁과 갈등을 증폭시키며, 분노와 원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제는 ‘식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은 돈을 목적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돈과 이윤을 추구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잊혀지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 외롭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예수님’ 이어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보하면서,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느냐!’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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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나는 아니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나는 아니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 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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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훔멜//La bella capricciosa op. 55 - 플로리안 우흘리그(pf) Johann Nepomuk Hummel (1778 ~ 1837) La bella capricciosa op. 55 (1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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