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위령의 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02 06:24:22    조회 : 48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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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11월2일 수요일 [(자)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수도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것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 19,1.23-27ㄴ ○ 제2독서 로마 5,5-11 † 복음 마태 5,1-12ㄴ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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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절대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자신의 생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지요. 세상에서의 모든 사람과, 그리고 자신이 남겨 놓은 모든 것과의 이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죽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는 사실이지만,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묵상하며 인생의 행복을 함께 묵상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앙이 주는 선물은 바로 이 인생의 최종 절벽을 넘어서게 하는 희망입니다. 희망은 오늘의 좌절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하느님을 보고야 말리라는 욥의 외침은 그 희망의 척도를 가늠케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행복도 이러한 초월적 신앙이 없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숲들이 잎을 떨구고, 모든 동물이 긴 겨울잠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자연스레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도 자연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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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2016년 11월2일 수요일 [(자)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갑곶성지에는 기도틀이라는 것이 있어서, 순례객들이 자신의 기도를 적어서 꽂아놓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이 기도들을 하나하나 뽑아서 저 역시 같은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제 기도의 힘이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 역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내용들을 보면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많습니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즉, 이 세상 안에서의 성공과 영광을 누리길 바라는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부분이 충족되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기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꼭 이런 세속적인 내용의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행복할까 라는 것이지요. 어떤 미래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식주가 해결되면 그만큼 더 많은 안전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이제 돈을 많이 벌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고급차를 굴린다고 해서 더 큰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마음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직종 중에서도 경제적 안정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들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그들의 암 발생률은 보통 사람들보다 3배나 높다고 하더군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는 모습에 벗어나는 길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통해서 내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뭐든지 이용하려고 하는 욕심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찾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들은 죽은 모든 이, 특별히 연옥 영혼들의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위령의 날’을 보냅니다. 세상에서 모든 만족을 누렸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삶은 짧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은 영원의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들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 역시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내 모습은 구원의 길에서 가까운지, 혹시 잠시 동안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상 안에서의 만족만을 위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이제는 주님 곁으로 가야할 때입니다. 더 이상 후회의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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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은 삶의 가장 큰 힘이고, 죽음을 물리치는 유일한 무기다 (유진 오닐).
20161102_01.jpg 우리보다 먼저 가신 고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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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의 주인공? 구경꾼? 종종 개그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강의 때 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텔레비전을 보면 재미가 없습니다. 보다가 잠이 들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재미있어 하는데 왜 저는 그 장면이 왜 이렇게 유치하고 재미없어 할까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방송을 제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스스로 재미있고 흥미가 있어서 선택해서 보는 방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은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도 발견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사는 것이 너무 재미없어.”, “지금의 삶이 너무 지겨워.”라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인생의 구경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재미와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면 어떨까요? 그러기위해서는 우선 구경꾼처럼 방관자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떳떳하게 설 수 있습니다.
20161102_02.jpg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 온 것 같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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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것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일 위령의 날 둘째 미사, 마태 11,25-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것을 교회는 위령의 날에 죽은 뒤 아직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모든 이를 위해 위로하며 기도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인과응보의 틀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11,28) 하시며 모두를 품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고(루카 6,36),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 때문입니다(로마 5,20). 위령의 날에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세례로 시작된 부활을 향한 파스카 여정의 완성이기에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죽음은 절망의 끝이나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죽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죽은 이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있음을 확인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날은 살아있는 이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묵상하며,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을 미리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면서 삶과 죽음의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있으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살이를 하다가 죽음을 맞으면 현세 세상과 죽음의 세계 사이에 극단적이고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슬퍼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현세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결코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조차도 생명과 희망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그렇게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 안에 있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입니다."(지혜 3,9) 우리는 죽음도 생명도 주님 손 안에 있음을 회상하고 죽은 이들과 함께 사랑 속에 살기를 희망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한편 위령의 날은 누구든 예외 없이 맞게 되는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금 여기서 잘 죽을 수 있기를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우리다운 응답은 ‘지금 여기서 죽으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잘 죽는다는 것은 기꺼이 자신을 내놓으며 더 자비로워지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되돌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행복을 맛보게 되겠지요.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살려면 이타적이고 순수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모든 선을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는 죽음을 통해 영원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 넘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려준 백임마누엘 형제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고인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슬픈 현실 앞에 우리 모두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는 오늘입니다. 죽음이 판을 치는 곳에 생명을 불어넣도록 재촉하는 오늘,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사랑 실천과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부족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문화가 사라지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정의와 기쁨이 넘치는 사랑방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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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위령의 날 2016년 11월2일 수요일 [(자)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지난 10월에 새남터에서 절두산 성지까지 4번 순례를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공동체, 성소 후원회 임원, 교구청 직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지인과 함께 순례를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순례를 할 때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지인과 함께 하면서 새남터 성당의 도록도 보았고, 전시된 성물도 보았고, 기념관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물도 보았습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말처럼 행사로 순례를 할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순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끔씩 혼자서 성지순례를 한다는 지인은 성지순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함께 사는 동창신부님은 무슨 일을 할 경우, 늘 기본을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실력이 늘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익지도 않은 과일을 먹으려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든지 서두르는 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기도, 운동, 만남은 모두 기본이 중요합니다. 조금 힘이 들어도 하나씩 배우면 이치를 알게 되고, 이치를 알게 되면 힘이 빠지고, 힘이 빠지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기본을 모르면 편법을 쓰게 되고, 힘으로 하기 때문에 본인도, 이웃도 힘들게 하기 마련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성직자의 수도 늘었습니다. 성당도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천주교회는 듬직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회복지 시설도 천주교에서 많이 운영하였습니다. 감사할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한국교회는 그늘도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를 하는 신자가 20%을 조금 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형화, 중산층화 되면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교회의 심장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주님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한분도 빠짐없이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을 상대평가하기 보다는 잘한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절대평가를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시고,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고, 상처를 입더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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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이리 심각하냐? (Why are you so serious) 2016년 다해 11월2일 수요일 위령의 날 <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독서: 욥기 19,1.23-27ㄴ 왜 이리 심각하냐? 오랜만에 같은 본당 출신 신부들과 저녁자리를 가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간 곳은 ‘스크린 야구장’이었습니다. 스크린 골프장은 들어봤어도 스크린 야구장은 처음 가 봅니다. 앞 화면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동작을 하면 작은 구멍에서 진짜 공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을 받아치면 스크린에 공이 표시되어 안타인지 아웃인지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한국시리즈 야구가 한창입니다. 그 곳에선 작은 실수 하나가 일 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스크린 야구장에서는 동료들에게 농담 섞인 꾸지람 한 번 들으면 끝입니다.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한 번 더 연장하며 두 시간 가량을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시리즈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과연 야구를 즐기고 있는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언젠가 축구선수 이동국이 자신은 축구를 즐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심각하면 즐길 수 없습니다. 그게 전부라 느끼면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은 예측하기 매우 쉽습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댓글은 모두 죽여야 한다느니,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사냐느니 하는 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선행을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천사라느니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는 칭찬 일색입니다. 여기에서 반대 의견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질타의 대상이 되어 덧글이 달리며 뭇매를 엄청 맞게 됩니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가 오십억이 넘는 액수를 기부했다는 글에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은 부동산도 많이 샀다는 글을 올렸다가 거의 매장되다시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젠 자신의 의견이 세상 일반 사람들의 의견과 조금만 다르더라도 입을 막아야하는 매우 심각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실제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말들은 눌러버려야 속 시원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들은 죽어야하고 잘한 사람들은 건들지 말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되게 돼 버렸습니다. 배트맨 영화에 보면 조커라는 악당이 나옵니다. 입 꼬리가 항상 위로 올라가있는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항상 심각했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넌 왜 이렇게 심각하기만 한 거냐? (Why are you so serious?)”라고 하며 그의 입을 그렇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정작 심각한 인물은 세상을 지켜야하는 배트맨입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조커에 비해 재미는 없는 인물입니다. 항상 심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해야만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현세에만 사람을 집착하게 만드는 역효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본 게임이 아니라 연습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가 아니라 거쳐 가야 할 통로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나 되는 것처럼 심각해합니다. 그냥 스크린 야구장에서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그렇다고 인생을 막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 게임을 앞에 두고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실패해도, 성공해도, 크게 절망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부는 나중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연습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날오 오늘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다 죽습니다. 위령의 날이라고 해서 그들을 위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가 이 세상에서 연습한 대로 심판을 받겠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심판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들이고 그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자녀들을 다 잃고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고 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욥은 이 세상에서 귀중하다고 하는 것을 다 빼앗겼어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습인 이 세상에서 물론 최선은 다할지라도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절망하거나 이세상이 끝인 것처럼 살아가지 맙시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땅에 묻혀 썩어버릴 인생입니다. 그분들이 계신 그 저 먼 곳에서 그분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계신지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에서 죄짓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연습하는 곳이고 자신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저 세상에 계신 분들을 바라보며 이 세상은 과정임을 되새겨봅시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Jussi Bjorling - Je Crois Entendre Enc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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