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내 삶의 가치 안에 주님을 초대하십시오.
201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제1독서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8-17
복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9
저는 강의 때에 ‘꿈’에 대해 물어봅니다. 즉,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지요. 그런데 대부분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입니다.”, “100세까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잘 되는 것이 꿈입니다.”, 심지어 “커서는 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 스스로 규정하지 않았으면서 막연하게 행복한 것이
꿈이라고 말합니다. 물건이 오래되면 점점 이상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몸도
나이가 들면서 이상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100세까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가족이 잘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렇게 가족만을 바라보다가는 만약 가족이 내 뜻대로 해주지
않을 때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꿈은 나의 진짜 꿈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꿈, 내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꿈을 꿔야합니다. 이런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한
꿈, 욕심이 가득한 꿈,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 채울 수 있는 꿈으로는
희망도 기쁨도 얻기가 힘듭니다.
구체적인 자신만의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주님의 자비를 바란다면서 ‘주님,
주님!’이라고 이름만 외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자기 집을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끄떡없습니다.
내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었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문득 어떤 형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회사를 위해
가정도 뒤로 하면서 아주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정기검진 때에
암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검사를 하고
검사결과가 일주일 뒤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죽음’이 떠올려지더랍니다. ‘지금 죽는다면 어떻게 하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등의 생각이 떠올려지면서 지금까지 회사를 위해
일했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 보이더랍니다. 삶의 가치가 바뀐 것이지요.
내 삶의 가치 안에 주님을 초대하십시오. 진정한 내 꿈을 이룰 수가 있으며,
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힘든 것이 자신이다. 하지만 일단 자신과 합의가
이루어지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아네스 안).
*****
마음의 분리수거(이현수, ‘좋은생각’ 중에서)
좋은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다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마음은 수시로 안 좋은 생각이 침범해 늘 어지럽다.
마음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이 없을까?
마음의 분리수거를 해 보자. 먼저 분리수거 통 세 개가 필요하다. 하루를
보내며 긍정적인 생각은 한 통에, 부정적인 생각은 다른 한 통에, 잘 모르는
것은 마지막 통에 집어넣는다.
처음엔 부정의 통이 가장 크고 긍정의 통이 제일 작을 것이다. 이 크기를
바꿔 주는 게 좋다. 정 안 되면 ‘모르겠다’ 통을 부정의 통보다 크게 하는
목표라도 잡자.
기분이 찝찝해도 화가 치밀거나 눈물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모르겠다’ 통에 넣는다. 이 통에 넣은 일은 자연스레 잊힌다. 시간이 지나도
괴롭다면 부정의 통으로 옮긴다. 긍정의 통에 둔 일에 대해선 감사하며
행복을 누리자.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고 필요하면 상도 주자.
부정의 통에 담긴 건 며칠 지나면 악취가 나므로 가능한 빨리 처리한다. 세
단어로 질문을 던져 보자. ‘용서해?’ ‘무시해?’ ‘투쟁해?’ 용서나 무시가 되면
쓰레기차로 보내 더 이상 마음 쓰지 말고, 투쟁해야 한다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자. 이런 식으로 조금씩 마음 정리를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용서, 무시, 투쟁보다 강력한 게 있다. 바로 ‘감사’다.
‘취업 준비하느라 힘들지만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진
않으니 감사하다.’ ‘아르바이트하느라 힘들지만 일거리가 없는 것에 비해선
감사하다.’ ‘지금 일거리가 없지만 몸은 건강하니 감사하다.’ 이렇듯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감사거리를 찾으면 마음이 정리되고 평화로워진다.
마음의 분리수거가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을 땐 기분 좋은 일을 하자. 일단
‘즐거운 일 목록’을 50개쯤 만든다. 즐거운 정도에 따라 순위를 매긴 후
스트레스 받으면 50위에 있는 일을 한다. 기분이 안 풀리면 49위 것을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걸 바로 해도 된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효과는 강력하다. 오늘 즐거운 일 목록을 작성해 보는 건 어떨까?
잡지책을 보다가 마음에 와 닿는 말이라 그대로 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제 사제관의 쓰레기통이 난리거든요.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한군데에 모아놓으니 복잡하고 지저분합니다. 오늘은 내 마음 뿐 아니라,
사제관의 쓰레기도 분리수거해야 겠네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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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행동으로 열매맺는 신앙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마태 7,21-29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21)
The true disciple
행동으로 열매맺는 신앙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마귀가 몸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병을 고치려면 마귀를 쫓아내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유대 마술사들이나 의술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 하느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어 병을 고치는 사람들도 등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을 빙자하여 눈에 보이는
치유나 기적을 행하는 것을 하느님과 가까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해박한
지식이나 관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7,21.26) 참된 종교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다.
말과 화려한 이벤트가 무성한 오늘입니다. 과연 신앙인의 자리는 어디이며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지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곧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그 존재이유임에도
그런 모습이 너무도 미흡하다고 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7,23)이라고 호되게 꾸짖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을 범한
잘못이 아니라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을 지키지 않은 잘못을 두고 불법을
일삼는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짖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고 말로만 쏟아내고 생각 속에 가두어두는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단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되
온전히 실행해야 하며, 그 실행으로 하느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저
세속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행동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 말뿐인 신앙,
불법을 저지르는 처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새로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다름을 행동으로 드러내려면 먼저 말씀을 들어
가슴 깊이 새겨 의식화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방식대로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그것을 살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참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각성하여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 존재를
통해 보여주는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도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집중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거듭
났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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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마태 7,23)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저 모르세요?
글쎄요. 누구시더라~ 저 누구예요. 어쩌고저쩌고...
어떮때는 기억이 나서 아~ 하면 다행이고
많은 때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도
모른다고 하면 섭섭해 할까 봐 아는 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 저 모르시겠어요?" 하면 그분은 과연 나를 알아보실까요?
"누구지?..."
"저 바오로입니다. 작은형제회... 선청 성심원에서 일했구요..."
"그래? 잘 모르겠는데..."
"예수님이 알아 보시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 글쎄 모르겠다니깐..."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쩌죠?
나는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서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모르시겠다니요.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요?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겸신되이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된답니다.
보통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때 뿐이고 실천을 잘 하지 않습니다.
내 좋아하는 일들을 해놓고 또 내가 영광받고 칭찬받을 일을 해놓고
예수님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일은 예수님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예수님께 우리를 각인시키는 일이
못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하며 곧바로 실천에 옮겨 봅시다.
오늘 예수님은 입으로 일하지 말고 손과 발로 일하라 하시네요.
그맇게 실천해 보세요. 그럼 예수님께서 기억해 주실 겁니다.
"아, 그때 그 너였구나!"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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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01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 7,21-29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집도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형이 둘, 누님, 여동생 이렇게 일곱이었습니다. 큰 고모는 딸이
다섯, 아들이 둘 이렇게 아홉이었습니다. 작은 고모는 아들이 넷, 딸이 둘
이렇게 여덟이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이렇게 모두들 다복한 가족이었습니다.
정부는 가족계획을 시행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30년
가족계획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이제는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은 큰 힘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를 이어가는 소중한 일이라는
인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풀어야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남과 북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와 전통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법은
개인의 창조적인 능력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위주로 배우기 때문에 기초학문의 뼈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관언유착은 우리사회를 부실과 부패로 물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성찰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경제성장은 모래위의
성처럼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도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교우들이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의 선조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물질과 자본의 논리입니다. 성장과 발전의
논리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지출하는 항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구는 성직자들의 적체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구는
성직자들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도
필요합니다. 신자들의 재교육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성찰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그 책임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최악의 사제’와 ‘최고의 사제’를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최악의 사제는 ‘독선적인 사제, 편애하는 사제,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사제, 과도한 음주를 하는 사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사제, 결정을 늦게 내리는 사제, 말을 함부로 하는 사제, 지나친 스킨십을
하는 사제’였습니다. 최고의 사제는 ‘사목에 대한 비전이 있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제, 모든 이에게 사랑을 주는 사제,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제,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사제,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는 사제,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제, 사제의 복장을 즐겨 입는
사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려진다고 하셨습니다. 빛은
됫박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기억하며 지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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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반석위에 지은 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 7,21-29
반석위에 지은 집
청주교구에 있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은 189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30년에 대성당을 지어 매괴성모님께 봉헌하였는데 7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터를 닦고 3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1934년에는 석조 건물로 사제관을
지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관리를 잘하여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제관은 그야말로 반석위에 지어져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 줍니다. 더군다나 대성당을 시작하기에
앞서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일 따름입니다.’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하시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셨으니 지금도 여전히 그 믿음이 살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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