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죄를 용서 받았다.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0-17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갑곶성지에 있을 때, 자전거를 타다가 달리는 차에
부딪혀서 논두렁에 쳐 박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고로 양쪽 손목에
골절을 당했지요. 당시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부가 저 혼자였고, 또한
식복사가 없어서 혼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이런 상태에서 양쪽 손목 골절을 당했으니, 저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그 당시가 5월이었기에 순례객들이 참 많을 때였습니다. 순례객들이
많이 오면 좋기도 했지만 이때는 정말로 싫을 수밖에 없었지요. 왜냐하면
성체분배 하기가 너무나 힘들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순례객이 한 천 명 정도
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천 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고나면
목이 너무나 아픕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만으로도 목이 쉬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당시에 더 힘든 것은 손목을 움직이지 않고
성체분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목을 이용하면 너무나 아프니까요.
이밖에도 청소하는 것, 식사하는 것, 성지 바깥일을 하는 것 등등 힘든 일이
너무나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더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손목
골절을 알고는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계시는
신부님들이 와주셔서 성체분배를 도와주셨고, 제가 아는 지인들이 오셔서
사제관 청소와 함께 식사까지 준비해주시고 가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지요.
당시에 제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니 엄청난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전에는 모든 것을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했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를 떠올려보십시오. 중풍이라는 병은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전신이나 반신 또는 사지 등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이지요. 이렇게 마비가 되면 어떨까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평상에 중풍병자를 뉘어서 데리고 옵니다. 중풍병자를 바람을
채워주기 위해서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ㅇ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 죄의 용서가 나의 믿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죄의
용서가 나를 도와준 그 누군가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내 이웃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박용재).
*****
우울증의 극복.
‘하루에 한번 마음 돌아보기’의 저자인 일본의 심리학자 에토 노부유키
교수는 우울증을 연구하다가 이런 호기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려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먼저 우울증에 걸려봐야 한다.”
직접 우울증을 체험하기 위해, 3개월 동안 한숨만 쉬면서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극도의 우울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가르치는 학교도
가지 않게 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인생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런 그를 살려내기 위해서 먼저 습관적으로
하는 한숨을 멈추게 하고 늘 어깨를 펴고 살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웃게 했지요.
우울증 체험을 위해 스스로 우울증에 걸렸던 이 교수는 결국 제자들의
치료방법으로 인해서 간신히 치료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우울증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치료를 거부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소중한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안에서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의 선물을 주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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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영혼의 어둠 중에 다시 일어나 드리는 감사와 찬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마태 9,1-8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The healing of a paralytic
영혼의 어둠 중에 다시 일어나 드리는 감사와 찬미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의 결과인 동시에 죄의 처벌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의 사고에 따라 질병을 고치려면 질병의
원인인 죄를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먼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2)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치유는 현세적인 것이지만 죄의 사함은
영원한 것이기에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던 율법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곧, 사랑으로 그의 영혼을
감싸주시고 치유해주심으로써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분이시지만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순례길을 가도록 병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삶의 몫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늘 사랑으로 내 영혼을 치유해주고자 하시는 주님을
잊고 내 자신이 중풍병자임을 바라보려 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속에 죽는 아픔은 외면하면서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거저 받으려 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영혼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지 성찰해보아야겠지요.
한편 육신의 병과 영혼의 치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곧, 중풍병자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평상에 뉘여 예수님께 오게
되었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자의 치유를 위해 거드는 것은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재현되어야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정의와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연대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가눌 수도 없는 신병의 괴로움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던 중풍병자가 ‘일어나듯이’ 온갖
불평등과 차별과 비인간적 처사로 절뚝거리는 우리 사회도 진정 사람
냄세가 나는 신명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서로 힘을 모아 도움을 주고받음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고 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을 거부하고 죄악을 선택하며 어둠의 길을 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의 책무요, 자신을 온전히 건네주신 그분을 따르는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병중에 있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 실망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특히 자신의 죄 때문에 늘 어두운 얼굴을 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순간에도 늘 자비로 용서해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죄와 허물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가오시어 함께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마음과 태도로 생명의 하느님께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진정 큰 죄는 죄 자체보다도 영혼의 병중에 주님을 믿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치유와 생명을 거저 받으려는 태도임을 기억하는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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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2)
어느 새 1년의 반이 지나가네요.
참 세월 빠르지요?
지난 반년 동안 사랑도 많이 하셨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을 겁니다.
이런저런 유혹과 악에 굴복하여 저질은 크고작은 죄와 허물들이
죄책감이 되어 우울해지고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지요?
괜찮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격려하시네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께서 내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하시니
아무 걱정말고 그저 고맙습니다 하며
전반기를 잘 마무리하고 후반기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화이팅!
오늘 만나는 누구에게나 힘내라고 전합시다.
죄가 용서받았으니 쫄지 말고 어깨를 펴라구요.
전반기 동안 별로 한 일이 없다고
아쉬워하기 보단 "다시 시작합시다~~"
전반기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하반기는 더 멋진 나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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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 것이 다 네 것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 9,1-8
내 것이 다 네 것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참으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지속적인 ‘깨달음’ ‘깨우침’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기 자신의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참으로 다양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시구요.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굳이 집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에게는 발길 닿는 곳이 다 내 집이요 또한 너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깨우친 사람에게는 너와 나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진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또한 네 것이 다 내 것이라는 것이지요. 너의 깊은
슬픔이 또한 내 슬픔이요, 너의 극심한 고통이 또한 나의 고통입니다.
중증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가족들의 공동체성이
유난히 눈길을 끌며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지척에 살아가는 이웃 사람이
짙은 고독에 몸부림치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외롭게 세상을
하직해도 이렇다 할 죄의식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내 한 몸,
내 가족, 내 공동체 챙기는 것만 해도 숨이 가빠 바로 옆 사람의 깊은 상처와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 시대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찢어질 듯 가난했지만 이웃의 더 큰 고통에 나 몰라라하지
않았던 정겨웠던 공동체성, 공유의식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
사회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진정한 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제대로 움켜쥐었다고 자신하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손에 쥔
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이 세상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의 운명이 곧 내
운명, 내 것이 곧 공동체의 것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더 많이 발휘되어야
마땅합니다.
운 좋게도 지상에서 부유함을 허락받은 사람들과 극단적 가난, 극심한
고통과 질병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서로의 구원과 행복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부자와 빈자가 서로 적대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중풍병자의 가족들은 자신들 가정의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족의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가정의 가장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가족들의 정성, 가족애,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우리 직장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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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 9,1-8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하였습니다. 영국의 총리가 찬성과 반대에
대한 투표를 제안하였고, 탈퇴가 결정되면 총리직을 사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투표결과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되었고, 총리는 사퇴하였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유럽연합에 참여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시적인 면에서 보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큰 틀을
포기하고,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서 탈퇴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영국의
선택은 세계 경제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영국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5년 전 ‘무상급식 논란’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서울시장은 전면적인 무상급식을 반대하였습니다. 국민의 여론이
비등하자, 시장은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 대한 투표를
제안하였습니다.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찬성이 결정되면 시장직에서
사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투표는 실시되었고, 개표가 무의미할 정도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서울 시장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시장직에서 사퇴를 하였습니다.
저는 영국의 총리와 서울 시장에게 ‘솔로몬의 지혜’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둘 있었습니다.
서로가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둘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반씩 나누어서 가지십시오.’ 아이의 친엄마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포기합니다. 아이의 가짜엄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솔로몬은 아이를 포기한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결정합니다.
친엄마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이를 희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을 타면서 스크린 도어에 있는 ‘글’을 읽곤 합니다. 어떤 글들은 제
마음을 맑게 만들고, 어떤 글들은 제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래야 하늘의 구름도 보고
꽃향기도 맡고
바람의 싱그러움도 느낀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로 간다.”
분주하게 살면, 나만 생각하며 살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과 함께 살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글을 쓰셨나 봅니다.
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악한 기운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방법을 찾기 보다는 지금 잘못된 것들을 찾고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분들의 수고와 땀은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에 드러나는 작은 허물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착한 이웃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7월 9일까지 여행을 갑니다. 묵상 글은 다녀와서 올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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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하느님의 걸작품|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 9,1-8
하느님의 걸작품
성지 순례를 통해 로마, 베니스, 피렌체, 피사, 나폴리, 바티칸의 여러
성당과 광장, 종탑, 문, 세례당 등등을 보면서 신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
졌기에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걸작품입니다. 걸작품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당은 그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와 그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는
이들에 의해 거룩함이 더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예술작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목적하는 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옛 것을 보수하는데 급급해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혼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작품들이 오늘도 많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옛것이 고귀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도 역사의 변화를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숨어있습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손길이 더 바쁘게 움직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
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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