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 진정한 단식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02 06:25:00    조회 : 457회    댓글: 0

◈ [인천] 회개의 단식

2016년 다해 7월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나는 내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1-15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제가 초등학교 때에 구연동화 대회가 있었습니다. 동화를 입으로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대회였습니다. 저의 발표가 끝나고 친구들은 제가
말하는 구연동화가 제일 재미있다면서 분명히 입상할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저 역시 대회에 참석한 다른 참가자들보다 훨씬 더 잘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스러웠고, 입상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작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아듣기 힘들었던 참가자가 입상을 했고, 저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지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한 친구가 심사위원 중의 한 선생님을 가리키면서
진짜로 재미없게 말하는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렇게 말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냐면서 큰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까지 들으니 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해졌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불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심사위원이 꼭 말을 잘 해야만 할까? 말을 잘 듣고 평가하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니?”

내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엉터리 심사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지, 만약
제가 입선했다면 그러한 판단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떨어진
이유를 찾기보다, 외부에서 그 핑계거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외부에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았을 때 바꾸기가 훨씬 더 쉽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열심한 사람들의 기준은 단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열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를 예로 들면서, 율법 때문에 하는 단식과 스스로
원해서 하는 단식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이라는 외적인 이유들
때문에 하는 단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해서는 하는 회개의
단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적 이유들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적
모습을 바라보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할 대상을 바꿔라. 화내야 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의 자제력이다.(B.칼튼)

*****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모양의 통나무와 칼을
나누어 주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한
학생의 앞에는 멋진 배를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앞에는
나뭇조각만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뭇조각만 쌓여 있는 학생에게
무엇을 만들려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옆 친구처럼 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똑같은 것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는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지요. 그런데 비행기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들기 편할 것 같은 버스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바꾸다보니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깎은 나뭇조각만 쌓이고
말았습니다.”

한 학생은 배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다른 학생은 계속해서
목표가 바뀐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과 목표가 자주 변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목표가 아예 없거나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그 반대의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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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는 진정한 단식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2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Jesus Questioned About Fasting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는 진정한 단식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에 참
기쁨이 주어졌고 그분의 복음선포로 근원적인 새로움이 다가왔습니다.

구약시대에 단식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던 인간이 행하는 덕행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다리던 바로 그 구원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기쁨이며 유한한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이자 삶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두가 초대받은 기쁨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기쁨 안에 머물지 못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 참 기쁨이며
어디서 기쁨을 찾아야 하고, 어떻게 슬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가야
하는지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기쁨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참
기쁨을 주셨음에도 더 많은 물질의 소유와 육신의 안락, 세상이 주는 힘을
얻으려 하고 거기서 기쁨을 찾으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과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헛되고 덧없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도 유한합니다.

수없이 그런 체험을 하면서도 계속 물질과 세상과 육적인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변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들이 주는 기쁨은 스쳐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요,
변하지 않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바로 참 기쁨이며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임을 다시 상기해야겠습니다.

우리네 삶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수없이 엇갈립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십자가와 죽음으로 부활의 참 기쁨을 마련해주신 예수님과
더불어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합니다. 참 기쁨은 고통의 과정을
사랑으로 참아냄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교회의 신랑인 예수님의 친구들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결점이나 나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 안의 감정이나
편견, 선입견과 같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예수님의 새로운 부대로 모두를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나날의 삶이 힘겨울 때 그래도 기쁘게 살아가려면 예수님을 잊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있음이 참 기쁨이요
그분만이 영원한 기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구원의 새 시대에 우리도 잠시 지나갈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하고 그분을 잊어버림을 슬퍼하는 참 단식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내 영혼에 새로운 부대를 지니고 예수님만이 고통과 죽음마저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용서를 거저 베푸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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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마태 9,15)
 
오늘 첫 주말이네요.
주말에는 결혼식이 많지요?
가끔 우리나라 결혼풍속도를 저비용고효율 구조로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 토론하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품앗이 부조문화는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문화이지만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허례허식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아서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조는 십시일반 온라인으로 하고
결혼식은 가까운 가족친지들끼리 하여 도움도 되어주면서도
진정한 가족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점점 결혼풍속이
실제적으로 변화되어 나가길 희망해 봅니다. 
오늘 신랑이야기가 나오고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좀 오바했나 봅니다.
 
누군가가 기쁜 일을 맞았다면 마음껏 기뻐해 주고
누군가 슬픈 일을 당하였다면 함께 슬퍼해 주고
누군가 아파하면 마음껏 위로해 주라는 것이 예수님 생각인 듯 싶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에 맞는 반응으로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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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 17)

오늘부터 달라져야 할 새 포도주의 시간입니다.
새 포도주가 있는 곳에 새 부대도 있기 마련입니다.
새 부대는 새 포도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삶은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우리가 있는지를 묻게됩니다.
나눔이 있는 곳에 우리자신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알고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앎은 그야말로
죽은 앎이 될 것입니다.
죽은 앎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실천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야 새로워질 수 있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돌보는 것이 참된 복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가 빠져있다면 중심을 잃게 될 것입니다.
새 부대가 빠져있다면 결코 내면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단식은 조화와 균형입니다.
참된 잔치는 소통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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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미래 지향적인 삶|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 9,14-17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습니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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