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8일 하느님께로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08 06:28:34    조회 : 49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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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7월8일 금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수도회]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호세 14,2-10 † 복음 마태 10,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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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듯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외국어도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유학이나 이민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마음일까요?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환경이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앞으로 그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 고난은 군대에서나 외국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고난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회당에서 채찍질당하고, 총독들 앞에서 증언해야 할 뿐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 그리고 형제간에도 서로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그런 장벽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부딪치신 장벽이고, 현재도 교회가 세상의 힘과 맞서고 있는 장벽입니다. 교회가 맡은 임무와 사명이 크면 클수록 이 장벽 또한 그만큼 높고 험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벽은 세상이 던져 주는 달콤하고도 손쉬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택하신 십자가의 길, 가난과 단순함과 겸손, 그리고 용기와 투명성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조롱과 모욕을 견뎌 내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말입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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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린다면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분의 나이는 이제 마흔 다섯. 취업하려고도 해도 나이 때문에 받아주는 곳도 없고,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 해도 너무나 나이가 많아서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이제 힘도 떨어져서 금방 지친다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마흔 다섯이라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너무 늦은 것일까요? 요즘 사람의 수명이 많이 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의 인생을 ‘아흔’으로 잡으면, 축구경기로 따졌을 때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난 것입니다. 축구경기를 하고 있는데 전반전까지 지고 있다고 아예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엄청난 점수 차이가 나고 있다 해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후반전이 있으니까요. 즉, 작전을 제대로 세워서 공격을 잘만 한다면 분명히 만회할 시간과 기회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포기하지 않을 때, 통쾌한 후반전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늦은 경우는 없습니다. 단지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발표했을 때의 나이가 60세라고 하지요. 스릴러 영화의 선구자인 히치콕 감독은 61세에 필생의 역작 ‘사이코’를 완성했습니다. 한국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로 뽑는 박완서 선생님은 40세에 등단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늦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시작을 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작품을 발표했느냐 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방향만 제대로 가고 있다면 걱정할 것 없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방향만 잡는다면 정말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라는 핑계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상에 파견되는 사도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었을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능력과 재주도 그리 대단하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아직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세상에 주님 없이 파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걱정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지금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잡는다면 분명히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을 떨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께서 알아서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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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분 전만큼 먼 시간은 없다(짐 비숍).
20160708_01.jpg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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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링겔만 효과(소천, ‘이리 찬란해도 되는 겁니까?’ 중에서) 링겔만은 줄다리기로 실험을 했다. 집단 전체가 줄을 당길 때의 힘과 개인이 혼자 줄을 당길 때의 힘을 비교해 보았다. 1:1에는 100%, 2:2에는 200%, 3:3에는 300%의 힘이 나왔을까? 그렇지 않았다. 1:1로 줄다리기를 하면 100%의 힘을 쏟지만 2:2에는 93%, 3:3에는 85%, 8:8에는 49%의 힘만 쏟았다.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개인의 힘은 떨어졌다. 이를 링겔만 효과라고 한다. 왜 그럴까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각은 ‘나 하나부터’입니다.
20160708_02.jpg 링겔만 효과.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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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Coming persecutions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 시련, 고통, 재판,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10,21).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올곧지 않아’(미카 7,6)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기쁠 때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암담한 미래의 벽 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 기본적인 생계유지마저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늘어만 가는 가계 부채 앞에 한숨 쉬는 수많은 서민들, 고독사를 택하는 노인층 등 고통과 시련은 그렇게 호흡처럼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 때문에 더한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된다니 참 힘든 삶입니다.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먼저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은 힘을 모아 저항하고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콜로 1,24)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통 앞에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한다거나 정화의 과정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히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에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지려는 의지와 마음이며,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수용하지 않은 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피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끝까지 참아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나눌 때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박해 상황을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순박함과 지혜로움, 신뢰와 인내, 곧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0,16). 고통은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고통의 수용은 예수님의 제자직의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갖은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고 고통 중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이 무거운 짐’을 그분께로 가지고 갑시다.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고귀한 예수를 따르는 삶에 힘과 용기를 모아 앞만 보며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우리를 영원 생명에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냅시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3-5) 우리 모두 삶이 고달프고 나를 속일지라도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만 차지할 수 있다면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를 위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겪어내는 고통의 씨앗에 숨겨져 있는 참 행복의 보화를 알아보는 기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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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녀나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낯선 땅에 가거나 고생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떠나보내는 마음은 안타까움과 걱정스러움이겠지요? 저는 어머니가 제가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며 우시던 모습을 37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한답니다. 자식이 가야하는 길이기에 붙잡을 수는 없지만 애써 손을 놓아야 하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버스 차창에 기대어 한참을 눈물지었더랬습니다. 오늘 제자들을 세상에 떠나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런 심정 같네요. 가면 밥 잘 챙겨 먹고 전화 자주하고 차 조심, 사람 조심. 조심 또 조심... 알았제? 힘든 일이 많을거다. 그때마다 쫄지 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실테니... 어머니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힘든 선교여정이지만 꿋꿋이 기쁘게 걸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냥 늘 내 품안에 두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겠지만 떠나 보내야만 성장하여 더 멋진 자식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아파하며 눈물을 감추며 이별하게 되겠지요. 오늘 멀리 떠나 살고 있는, 특히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중에서 살고 있을 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기억합시다.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어 환난중에 더욱 굳세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사랑의 입김을 호~ 하고 한번 불어 줍시다. 성령의 선물 받아라~~~~~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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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20) 아버지의 영이 우리의 관계안에 들어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야합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 주시는 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아버지의 영은 살아있는 말씀을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살게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의 현존을 믿기에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항구하게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령의 새로운 방식은 믿고 맡기는 믿음의 방식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방식으로 나누게하십니다. 소통의 본질이 되시는 성령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성령님을 통해 성령님과 함께 찾아가 나누는 만남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소통의 기쁨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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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아빠 창조주의 소리인 예수님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아빠 창조주의 소리인 예수님 워낙 말 많이 하며 살다보니 기도 명상에서도 말해야 되는 줄 압니다. 가끔 눈빛이나 눈짓이나 얼굴표정이나 손으로 하는 몸말을 생각해요. 뜻을 통틀어 한 숨결로 순간에 알리는 방식을 뭐라 표현? 모르겠네요. 사람이기에 말은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통하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진리와 믿음이라는 양심감지기를 설치해 주셨습니다. 아빠 창조주의 소리인 예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오 10,19~20)” 그 말씀 감지기가 고장 나도 수리가능해요. 순진한 어린이들은 알지요. 신앙인들은 아빠 하느님의 소리 예수님과 통하며 사는 사람들이랍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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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예수님이시라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 10,16-23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 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10_1.gif ♬ 가톨릭 성가 85번 즈카리야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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