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기적, 표징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18 07:20:33    조회 : 550회    댓글: 0
5_3_3.jpg - -
  • ☆ 2016년 7월18일 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수도회] 거품을 뺀 진실한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미카 6,1-4.6-8 † 복음 마태 12,38-42
142.gif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합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기적이 진리를 보증해 주는 것처럼 요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신앙 안에서 기적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현대인들은 기적을 보면서 당혹감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적은 본질적으로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려고 행하시는 자기 과시나 보증 수표가 아니고, 자녀 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청하는 이들의 간절한 마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기적은 우리 자신을 깊은 회개에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미리 잘 준비되어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고,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를 오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 매일 미사 -
crown_of_thorns_2.jpg
  • ◈ [인천] 기적, 표징의 원칙은 영혼의 구원에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람아,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4.6-8 복음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2 우리의 삶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특별히 어떤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까?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하느님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할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과연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길 원할까요? 아마 대부분이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기적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요즘이어서 그럴까요? 특히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돈이면 최고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대부분 경제적인 부분에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38개의 비유 중에서 자그마치 16개가 돈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만큼 경제적인 부분은 시대에 상관없이 계속된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심사가 채워져도 사람들은 그 안에 주님의 자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로또 복권 같은 거액 복권에 당첨되는 것, 갑자기 일이 잘 풀려서 큰 부자가 되는 것 등등 경제적인 부분에서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내게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내게 다가온 뒤에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권에 맞은 것은 나에게 엄청난 운이 있기 때문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즉, 주님의 자리가 없어집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들까요? 사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은 돈을 세상에 쌓아놓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의 큰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나의 행동에서 주님의 기적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축복을 얻게 되면 이를 통해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누어야 하는데,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다보니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 기적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적을 보여 달라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9)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고래 뱃속에 들어가 사흘 밤을 지새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도저히 회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방인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 한 마디에 모두 회개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바로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적국이지만 주님의 명령에 의해 회개하라는 말씀을 요나가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적, 표징의 원칙은 바로 영혼의 구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는 곳만이 주님의 자리가 생겨서 참 기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line02.jpg
  • 각자의 영혼은 작은 조각에 불과하기에 다른 이들의 영혼과 합쳐져 하나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존 스타인백).
20160718_01.jpg 이스라엘 텔라비브의 고래.
line02.jpg
  • 기적의 발견 대단한 곳, 거창한 곳에서만 기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일상에서 많은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힘쓰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활동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면 기적은 매 순간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일상 안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네가 있다는 것, 내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 각자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구원의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이렇게 내가 지금 만나는 모든 이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네가 있어서 정말 좋다.”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20160718_02.jpg 새벽님이 보내주신 멋진 하늘 사진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line02.jpg
  • ◈ [수도회] 거품을 뺀 진실한 신앙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16주 월 마태 12,38-42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The demand for a sign 거품을 뺀 진실한 신앙 세상에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얻지 못하면 불평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신데도 광야에서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위험을 겪을 때마다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엇인가 더 많은 것,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랐습니다. 따라서 그들 눈에 예수님의 말씀과 처사는 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만족시켜 줄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12,38). 예수님께서는 거품으로 참 신앙을 가려버린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12,39)라 하시며 질책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보다는 눈길을 사로잡는 신기한 현상,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초월적인 힘으로 채워주는 초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았다거나,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성체를 보았다느니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그런 것을 통해서도 당신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보다 더 크신”(12,42) 구원의 결정적 메시지요 표징이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표징이나 초월적인 현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한 방편일 뿐이고, 그만큼 더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라는 채찍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한다면 거품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면 신앙생활에서도 거품을 빼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거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뜻에 하느님을 맞추려 하고, 자신이 만든 틀 안에 하느님의 권능을 가둬 넣으려는 태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의 가치를 절대시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눈에 보이는 대가를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실천 없이 화려한 말만을 앞세우며 세상적인 새로움에 집착하며 변덕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 실천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과 초월적인 현상을 찾는 태도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생활의 거품을 거둬내고 주님께 내 자신을 의탁하고, 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함께 나누면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신 그분의 수용 자세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세의 삶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완전하시고 우리의 삶을 당신의 뜻대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때문에, 삶에 불평불만을 터뜨리기보다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기적적인 현상을 찾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행위를 받아들이고 사회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행하는 거품을 뺀 속이 꽉찬 신앙인이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살아있는 표징 자체요 표징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실행하는 삶을 통해 기쁘게 회개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line02.jpg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고소하시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 (미카 6,2) 여러분은 누구와 재판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고소하여 애 먹은 적이 있나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고소하여 소송을 걸어 오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문제인지 시비를 가려보자네요.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해 주었는뎨 너는 대체 나를 위해 무얼 했다고 그렇게 뻔뻔하니? 이웃에겐 못되먹게 말하고 무시하고... 도저히 못참겠다. 어디 한 번 시비를 가려보자! 단단히 화가 나셨네요. 사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고 우리가 잘못하여 그 좋은 것을 다 잃어버려도 또다시 채워주시곤 하셨죠. 어디 그뿐입니까? 아무리 배신을 때려도 또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지요. 그런데도 배은망덕하게 당신이 나에게 해주신 게 뭐냐고 윽박지르고 꺼떡하면 냉담하고 개망나니처럼 구니 더이상 못 참겠구나 하시네요. 사실 그분이 내가 해 준 것 다 갚아라고 하시는 건 아니지요. 그저 감사할 줄 좀 알아라는 것이죠. 은공도 모르니 남에게 베풀 줄도 모르는 게 아니냐고 나무라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발 고소를 취하해 주십시오 말씀드립시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베풀며 살겠습니다. 주님과의 재판에서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line02.jpg
  • ◈ [수도회]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마태 12, 4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 40) 땅속 깊이 어둠의 시간을 견디어내신 예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둠의 시간을 견디어 내셨기에 새롭게 빛날 수 있으셨습니다. 어둠과 고통때문에 끝나버렸다 여겨지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게됩니다. 어둠과 고통도 봉헌의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방식은 우리의 회개와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회개는 십자가처럼 우리의 자아를 허무는 것입니다. 허물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진정한 부활의 표징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둠과 고통또한 부활의 일부임을 깨닫게됩니다. 부활의 노래는 회개처럼 어둠과 고통이라는 생명의 시간까지도 부활의 발걸음이 되게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표징은 다름아닌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람의 아들처럼 어둠과 고통이라는 사람의 조건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line02.jpg
  • ◈ [수도회] 고통과 실패는 너무나 당연한 것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 12,38-42 고통과 실패는 너무나 당연한 것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다 비슷한 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토록 많은 표징과 기적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강도 높은 표징, 더 대단한 기적을 끝도 없이 요구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 12장 38절)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한 표징만을 찾는 이러한 현상은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도, 내 안에도 뭔가 특별한 것, 뭔가 대단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종합건강진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수시로 거짓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곤 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성적 판단이 전제된 절도 있는 신앙, 진지한 자기성찰이 수반된 교리, 부조리하고 참혹한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한 직면보다는 다양한 감언이설로 백성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현세에서의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부르짖었고 너무나도 쉽게 천국을 보장했습니다. 그 거짓예언자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 앞에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지만 부자들의 비유를 맞추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요즘도 그릇된 종교지도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대체로 기본 상식이나 통상적인 사고를 벗어나 황당무계합니다. 때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터무니없는 고액의 봉헌을 요구하는가 하면 물건을 강매합니다. 그들이 주로 애용하는 성경구절은 무시무시한 종말과 관련된 구절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니 조심하여야 합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지 누가 삯꾼인지 구분하는 식별력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관심사는 하느님 뜻의 추구였습니다. 그들은 늘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참된 목자들은 백성들에게 한없이 크신 아버지의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의 아픈 상처를 오래도록 어루만져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때로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회초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죄와 타락을 강하게 경고했습니다. 백성들의 위선과 이중적인 생활, 고통 받는 이웃 앞의 무감각과 무관심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이 시대 착한 목자들이 가르치는 정통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결핍투성이의 인간이기에 이 세상에서의 갖은 고통과 실패,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십자가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십자가 기꺼이 지고 한걸음씩 성덕의 길로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가 더욱 크시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 많은 사람들 역시 뭔가 특별한 표징, 뭔가 대단한 기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끝도 없이 반복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히 웃고 지내는 내 삶이 곧 표징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십시오. 부족한 죄인들의 집합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희망하는 우리 공동체야말로 기적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line02.jpg
  • ◈ [서울]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 12,38-42 조선시대 허균은 백성을 3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부류는 항민(恒民)입니다. 세상의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불의와 억압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미사는 참례하지만 본당의 행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부류는 원민(怨民)입니다.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만 더 이상의 변화를 추구하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싹은 트지만 가시덤불에 막혀서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비판은 하지만 대안이 없는 사람입니다. 셋째부류는 호민(豪民)입니다. 불의와 억압에 대해서 소리를 내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양 냄새가 나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비록 상처를 입고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을 보듬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터키에서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서, 쿠데타를 막았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시민들이 지켜낸 것입니다. 불의와 억압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게 거리로 나서서, 자신들의 주권을 지켜냈습니다. 터키의 시민들은 호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불의와 억압의 상황을 외면하였습니다. 항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있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원망은 하였지만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원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호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는 호민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을 갔던 요나는 항민이었습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이야기 했던 요나는 원민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 요나는 이제 호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다. 바로 호민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바로 호민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여러분을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사실 여러분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line02.jpg
  • ◈ [서울] 영생과 영벌 중 하나만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영생과 영벌 중 하나만 성경의 기록은 요나의 설교와 솔로몬의 지혜보다 내용이 더 많습니다. ‘죽음-소생-영생’의 소생보다 더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병-소생-죽음’의 소생은 죽음 전의 의료기술을 감탄해할 것뿐입니다. 영생누릴 자격 얻을 수 있는 조건인 세상 난관들은 매력이기도 합니다. 영벌 받을 준비는 세상의 매력에만 빠져 살다 죽는 멍청이들 맞습니다. 어떻든 죽음은 확실한 건데 영생과 영벌 중 하나만 주어지는 거거든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오 12,41)” 성경알고 관심 두고 믿었던 신앙인들은 영생 종말심판에 동참한다 하고요. 성경거부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영벌 종말심판 때 신앙인들은 증인 선대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line02.jpg
  • ◈ [청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 12,38-42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 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가슴에 담고 이제는 초연해 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 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 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표징을 아무리 많이 보여줘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준비 없이 심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10_1.gif ♬ 가톨릭 성가 84번 얼마나 좋은고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