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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22일 금요일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수도회]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사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가 3,1-4ㄴ
† 복음 요한 20,1-2.11-18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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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마리아 막달레나는 늘 예수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리고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서는 곧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그분의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인 마리아는 주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목격한 은총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며, 예수님의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생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늘 예수님과 함께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부활의 순간에 그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함께 머물러야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상대방의
내면적인 모습, 신앙에서의 초월적인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남김없이 쏟아 부은
것은 그녀의 전 존재가 담긴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그녀의 이런
사랑으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생애 최고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돌려서 회개하고, 그분과 함께 머물며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그분께 최선을 다하는 것,
마리아 막달레나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신앙의 최고 모범들입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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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먼저 내가 사랑해야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한 때 유행했던 CCM 성가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라고 시작하는
노래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종교적인 노래이지만 일반 사람들도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만큼 스스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에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은 바로
우리에 대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상처를 받고, 그 상처의
아픔으로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을 준 경험이
없으니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이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나의 이웃들을 향한 사랑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사랑을 통해 받는 사랑을 더 크게 얻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제자들을 찾아가 알렸고,
제자들과 함께 무덤에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무덤
안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계속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다시
한 번 무덤 안을 돌아보게 한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아직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직접 보고서도
이분이 예수님인 줄을 모르고는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지요. 정원지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고 친절하게 당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조금씩 드러내시지요. 사랑으로 다가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의 큰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사랑으로 다가섰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을 힘들어해서
미사가 시작한 뒤에 성당에 들어가고,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 밖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에 대한 사랑만을 드러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각종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내밀어서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도
또한 삶 안에서 느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기쁘게 사랑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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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나 뒤에서 가나 관계 없다. 내 인생에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라(기시미 이치로).
골고타의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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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의 반지(최천호)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가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반지 세공사를
불러 그에게 말했다.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승리를 거두고 너무
기쁠 때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에 빠지고 시련에 처했을 때엔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넣어라.”
“네 알겠습니다. 폐하.”
세공사는 그 명령을 받들고 멋진 반지를 만들었다. 반지를 만든 후 어떤
글귀를 넣을지 계속 생각했지만 좀처럼 다윗이 말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고 고민해도 적절한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서 다윗의 아들 지혜의 왕 솔로몬을 찾아갔다.
“왕자시여 다윗 왕께서 기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반지에 새기라고 하시는데~~ 어떤 글귀를
적으면 좋겠나이까?”
솔로몬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This will pass away, too.)
지혜서 '미드라쉬' 에 나오는 유태인들이 항상 즐겨 읽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유태인들은 나치 학살의 그 어려운 시기에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지요.
지금 너무 힘들고 괴로워도 여러분들이 꿈꾼 행복한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간은 분명히 지나갈 테니까요.
다윗 왕.-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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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사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요한 20, 1-2.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사도
지난 6월 3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뜻에 따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하여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이 성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역사상 다른 견해들이 있었습니다.
10세기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이날에 “향유를 들고 다니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기념해 왔습니다.
반면에 서방 전통은 대 그레고리오(540?-604) 성인의 해석을 따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죄 많은 여인
(루카 7,37)과, 마르타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잘못 이해하여 회개의 본보기로 공경해왔습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에 다른 모든 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의 지적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 많은 여인’(루카 7,37)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셨습니다(마르 16,9). 그녀는 지독한
마귀에 걸렸거나 중병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마귀들은
그녀가 비도덕적인 생활을 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W. J. Herington).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도시와 촌락을 두루 다니신
예수님과 사도들을 동행한 제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루카 8,2-3). 그녀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에 성모님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서 있었고(요한 19,25), 주님의
“무덤 맞은쪽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7,61).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께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고 그리스도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성 라바노 마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당신을 그녀의 스승으로 알려
주심으로써(요한 20,11-16) 그녀의 눈물을 파스카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 대한 항구하고 지극한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하느님 자비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을 본 첫 번째 사람이고 주님 부활에 대한 진리를
들은 첫 번째 사람이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이었기에 그녀는 사도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첫 번째 사람도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전달자가 되며 사도들의 사도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녀는
사랑으로 충만한 진정한 참 복음화 일꾼, 곧 부활의 핵심적인 기쁜
메시지를 알리는 복음 선포자의 모범입니다(본기도와 새 감사송 참조).
우리 또한 주님께 대한 항구한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선포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사랑을 품고
사랑을 실행하는 이에게서 부활이 시작되고 부활의 기쁨이 선포됨을
가슴에 새기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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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여러분은 눈물이 많으신 편인가요? 잘 우시나요?
언제 그렇게 많이 울어보셨나요? 왜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기뻐서도 울고 슬퍼서도 울고 감격해서도 울고 아파서도 울고...
때론 이유도 없이 바람만 불어도 비만 와도
누군가 따뜻한 말 한마디만 건네도 그저 하염없이
주책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때도 있습니다.
여인들은 특히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요.
눈물 흘리는 여인은 슬프다 못해 아름답기도 합니다.
특히 사랑 때문에 흘리는 여인의 눈물은
보석보다도 더 영롱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축일로 승격되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름다운 눈물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의 날들을 보낸 여인이었기에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여인이요 가장 신뢰하는 여성제자였습니다.
오늘 내가 우는 울음을 되새겨 봅시다.
나는 왜 우는가? 누구 때문에 우는가?
사랑 때문에 울고 주님 때문에 운다면
내 눈물은 보석이 되고 진주가 됩니다.
여러분 눈에서 반짝이는 보석같은 눈물을 축복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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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공허한 삶 한가운데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진정한 사랑을 뵙게됩니다.
사랑의 방향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사랑을 통해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시 태어납니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다시 되찾게됩니다.
무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부활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사랑의 관계보다 더 큰 선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부활체험은 모든 존재를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또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는 우리들의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이란 이와같이 예수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임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배우게됩니다.
사랑이 사라진 그곳에서 다시 예수님 사랑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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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일곱 마귀 대신 일곱 빛깔 무지개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일곱 마귀 대신 일곱 빛깔 무지개
늦은 시간, 한 기차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간이
좀 남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역사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역 안에는
피곤한 얼굴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반, 노숙인 반이었습니다.
한곳에 긴 줄이 늘어서 있기에 뭔가 싶어 가 봤더니,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잠시나마 속을 따뜻이 하라고 작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그
광경이 너무나 흐뭇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순식간에 준비해 온 컵라면이 바닥나더군요. 그러면서 잠시나마
노숙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제 마음도 훈훈해졌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또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한 분이 자신의 컵라면을 제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드실래요?”
괜찮다며 계속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로 컵라면을 제게 안겨 주고
저 건너편 친구들 있는 곳으로 걸어가시더군요. 그분 눈에 제가
무척이나 불쌍해보였던가 봅니다. 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분의
그윽하고 측은한 눈길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신의 몫, 작은 것이지만
소중했을 텐데,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양보한 그분의 마음이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습니다.
복음서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려 갈 데까지 간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여인, ‘나 같은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어?’하며 자포자기했던 여인,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다다랐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직전의 순간에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마치 영화처럼,
소설처럼 뜻밖의 행운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 앞에 예수님께서
‘짠’하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어둡기가 무덤 속
같았던 그녀 인생의 창에 한줄기 환한 햇살이 드리웠습니다. 세상에
나같이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며 매일
대성통곡하며 울부짖던 그녀였는데, 뜻밖의 선물 예수님이란 존재의
출현으로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가 모두 빠져나가고 일곱 빛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암울했던 삶은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제 더 이상 밤마다 무덤가를 헤매며
괴성을 지를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피해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의 지난 생애는 참으로
비참했고, 억울했으며, 참혹했지만 끝까지 기다림으로써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신 예수님의
다정다감한 눈길,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눈길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예수님의 사랑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오랜 상처와
고통, 슬픔과 절망을 한순간에 녹여 버렸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어두운 과거는 여기서 모두
끝이 났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심장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잠차 잦아들던 그녀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의 내면, 그녀의 영혼, 그녀의 삶 안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을 살리신 예수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 일편단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제자 중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축복의 달인,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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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교회는 올해부터 ‘기념일’로 지내던 막달레나 성녀를 ‘축일’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막달레나 성녀가 보여주었던 뜨거운 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축일로 지내게 된 오늘의 감사송은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사도들의 반열에 여성인 막달레나 성녀도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막달레나 성녀를 사도들의 사도로서 공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약자였던 여성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고, 그 여인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이방인이면서 예수님께 병에
걸린 자신의 딸을 치유시켜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명한 탁자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주었습니다.
열 두해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부정한
행위를 했던 여인이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끌려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단죄하지 않았고, 먼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였습니다. 우리들 역시 사회적인 약자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일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랜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 일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이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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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예수님 때문에 환장할 지경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예수님 때문에 환장할 지경
사셨고 돌아가셨고 살아나셨고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가신단 말입니다.
이렇게 글은 썼지만, 이게 사실 누구에게든 해당되는 말 아니잖습니까.
가만 생각하다 너무 황당하고 놀랄 일이라는 생각에 한참 멍 했습니다.
만약 원수져 싫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계속 날 더 괴롭히면?
전 미치고 환장할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니 실감나고 이해 가는군요.
당시 유태인과 지금의 마귀들. 예수님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겠다는 것.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당시 유태인과 지금의 마귀들이 매우 환장해서 사람들을 엄청
꼬셔댑니다. 세상 온갖 걸로 특히 재물로. 예수님도 신앙인들을 조금은
확보하셨습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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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절망은 없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
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214번 주께 드리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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