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온유와 겸손이 사랑보다 앞서는 이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29 06:23:48    조회 : 53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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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7월29일 금요일 [(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수도회] 앎과 믿음이 어우러지는 사랑 실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4,7-16 † 복음 요한 11,19-27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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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이며 마리아의 자매입니다. 베타니아에 있던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와서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마르타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편안히 모시려고 지극정성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마르타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선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드셨을 때, 마르타는 매우 분주히 주님을 대접하려고 뛰어다니며, 상대적으로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에 주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신앙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이 표현으로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마르타를 보면서 사랑과 믿음은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비록 때로는 서툴 때도 있지만, 서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 사랑과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게 됩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외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후에 사랑의 표현이 서툴러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표현하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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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께 기도라는 양식을 통해 소리를 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2016년 7월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복음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인터넷 안에서 고통순위라는 것을 매겨서 올려놓은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1위는 작열통으로 몸이 불에 탈 때의 고통이랍니다. 2위는 절단으로 신체 일부가 절단되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3위는 무엇일까요? 3위는 출산의 고통이라고 하네요. 저야 뭐 남자이고 또 결혼도 하지 않으니 출산의 고통을 알 턱이 없지만, 방송에서 보게 되는 출산의 모습을 통해 정말로 힘들고 고통이 크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산모들은 아기를 낳을 때 소리를 지릅니다. 실제로 창피하다고 소리 내지 않고 이를 악 물고 참으면 이빨이 다 나갈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과 시련의 문제 역시 주님께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치 아이를 낳을 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주님께 소리를 지르면서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떠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의 이 문제들이 해결되면 그때 다시 신앙생활을 하겠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더 주님께 매달리면서 의지할 때 문제 해결도 수월하게 그리고 편하게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동생 마르타의 생각이 나옵니다. 먼저 그녀는 서운한 감정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대답해주었지만, 마르타는 먼 훗날 마지막 날 부활 때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마르타는 주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직 신앙도 부족하고 주님께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말하면서 주님의 뜻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오빠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마르타가 서운한 감정만 간직한 채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주님께 대한 원망만 가득 가지고서 가까이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표현하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혼자서 끙끙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도라는 양식을 통해 소리를 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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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쩌면 우리는 삶의 종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바로 여기의 하루가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다(한효정).
20160729_01.jpg 베타니아의 라자로 성당의 성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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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지을 가능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교회의 쇄신을 주도했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하루를 죄수들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하셨습니다. 한 독방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순간 교황님께서는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교도소장은 “이곳은 사형수 감방입니다. 저 사람은 자기 아내를 살해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교황님께서 창살 너머에 있는 죄수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황님께서는 교도소장에게 요청을 해서 사형수 감방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는 벽을 바라보고는 돌아서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지요. 교황님께서 교도소장에 묻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까?” 교도소장은 재차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살해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조용히 말을 건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난 결혼한 적이 없네만, 자네 그거 알고 있나? 만약 내가 결혼했었다면 나 역시 아내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네.” 이 말에 죄수는 돌아서서 교황님을 껴안으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절대 죄를 짓지 않을 것처럼, 남을 너무나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0160729_02.jpg 베타니아의 라자로 무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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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앎과 믿음이 어우러지는 사랑 실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 요한 11,19-27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앎과 믿음이 어우러지는 사랑 실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예루살렘을 향한 수난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곧 믿음을 정화시켜주심으로써 십자가 인생길을 걸어가기 위한 준비를 시켜주시는 것이지요.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자 많은 유다인이 일주일 동안 조문하는 당시 관습에 따라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위안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인간적인 위로 이상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앎’을 ‘믿음’으로 바꿔주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11,21) 이 말은 주님, 어디 계셨습니까? 왜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탄식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말합니다. 마르타의 탄식은 바로 그리스도교인들 곧, 나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과 외로움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순간 나의 이런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나의 어려움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켜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버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11,24)라고 대답합니다. 마르타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속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성으로 헤아리려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긴 했으나, ‘지금 여기서’ 죽음을 이기시는 분임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앎’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마르타를 진정한 신앙으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5-26) 참 신앙은 아는 것만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믿고 사랑하기 위한 지식, 아는 것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성경과 교리 지식으로 예수님이 구세주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고 해도 믿지 않고, 믿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르타는 예수님의 이끄심으로 다시 낙관적인 신앙으로 돌아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앎과 믿음, 비통함과 소망 사이를 오가는 나 자신이 바로 또 다른 마르타가 아닐까요? 오가는 나날의 길목이 바로 신앙고백에로 초대입니다. 우리 모두 패배감과 실망, 좌절의 순간에도 마르타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영원 생명이요 희망이신 주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16) 오늘도 일상의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의 깊은 내적 일치를 이루고, 마르타처럼 앎과 믿음이 어우러지는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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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우리는 라자로의 누이요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타를 오늘 특별히 기억합니다. 우리의 뇌리 속에는 마르타는 일밖에 모르는 아주 활동적인 여자였고 그래서 관상덕인 동생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택했다는 칭찬을 받았기에 그렇게 존경할 만하지 않는 여인으로 각인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리아와 달리 특별히 기념할 정도로 교회가 그를 공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었고 그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여인이었답니다. 장례미사를 마칠 때마다 저희 성심원에서는 이 고백을 구슬프고도 장중하게 고백하며 죽은 영혼을 하느님 품에 맡겨드린답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죽게 될 우리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시작임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자매인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게 됩니다. 얼마 전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아르헨티나의 한 수녀 체칠리아의 임종 미소가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오늘 특히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마르타처럼 부활신앙 안에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시도록 작은 기도 바쳐드리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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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29일 금.성녀 마르타 기념일.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는 뜨뜨미지근한 우리 신앙을 반성하게 됩니다. 마르타처럼 신앙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적극적으로 보려했던 성녀 마르타를 신앙안에서 다시 만나게됩니다. 신앙의 여정은 겪을 것을 다 겪으며 주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과 주위를 돌볼 줄 아는 믿음의 삶입니다. 성녀 마르타는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고백했기에 신앙의 여정안에서 믿음을 내면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내면화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간과 애정을 먼저 예수님께 쏟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선한 의지는 예수님을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체험케 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은 믿음의 선물입니다. 성녀 마르타의 삶을 본받아 우리또한 우리의 믿음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우리의 적극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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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정답 말한 똑똑한 마르타 2016년 다해 7월29일 (금)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정답 말한 똑똑한 마르타 우리보다 2000여 년 전에 ‘예, 믿습니다.’라고 정답 말한 여인 마르타! 2000년 전에 이렇게 정답 말할 정도로 똑똑 했으니 성경에 이름 남죠. 2000년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정답이니 그 어떤 인생운운 귀 막읍시다. 2000년간 변한 지금 세상에서도 늘 사랑받는 성경의 진실들 믿읍시다. 성경이 2000년간 전달되며 보존되었다는 건 정답이었기 때문이거든요. 100세도 안된 인간들이 2000세 넘은 하늘정답 무시해요? 흙이 웃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5,25~26)” 2000년 된 성경, 간단한 책 아닙니다. 심각히 놀랄 진실들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구세주로 확실하게 믿을 일 제1번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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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전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온유와 겸손이 사랑보다 앞서는 이유 2016년 다해 7월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독서: 요한 1서 4,7-16 한 여자 청년이 몸에 혹이 자라나고 있어서 대학도 잠시 접고 어머니와 함께 상담을 하겠다고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해 본 결과, 어머니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여 딸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딸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느끼며 모든 일에서 자기의 뜻은 버리고 어머니의 뜻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니 자기로 살지 못한 분노가 몸 밖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계기가 딸이 남자를 사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딸을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그렇게 갈등이 더 커졌던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보니 전에 우리나라에서 천재라 불리던 어느 명문대학 교수 아버지가 학교에서 들어와서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깨워놓고 세미나를 시키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신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니 자녀들도 그 명성에 합당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켰겠지만, 그리고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겠지만 그 모든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괴롭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믿으며 사람을 만나지만 자기를 들어내던가, 높이던가 아니면 상대를 이용해 자기 외로움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속고 있지만 실상은 상대를 이용하는 이기주의의 산물입니다. 사랑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그 포장 속에 이기주의만 가득한 것을 우리는 참 많이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은 신부들입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순종하고 신랑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셔서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에 앉혀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그 모습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오늘 독서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파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분 덕택으로 받는 구원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밖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밖에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마지막 순간이 오면 누구는 노아의 방주 안에 있고 누구는 노아의 방주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노아의 방주 안에 머무는지 아닌지는 바로 ‘두려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방주 밖에 머무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 머뭅니다. 주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십니다. 모세가 주님의 뜻을 어기고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친 실수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이 주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사랑을 실천해야만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잘 알기는 하지만 사랑하려 해도 잘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하고 하루를 살다가도 어느 순간 누군가를 험담하고 있고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고 누군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왜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지도 않고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은 차에 기름도 채우지 않고 운전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인으로 오시려고 하는데 이미 주인이 떡 버티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싶으셔도 머무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자아는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다면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은 돌아가시게 됩니다. 자아는 그래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사랑이 내 안에 머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 즉 성령을 받고 당신의 사랑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온유하고 겸손해지려는 우리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합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있는 한, 그래서 교만하고 고집만 가득한 사람으로 머무는 한 사랑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나오지도 못하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질 수 있는 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의지입니다. 하루 종일 이 덕을 시험하고 갈고 닦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바로 계명이기 때문에 온유와 겸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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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사랑고백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요한11,19-27)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사랑고백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 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10_1.gif ♬ Placido Domingo - Tosca-Recondita Armonia (Act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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