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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9월25일 주일 [(녹) 연중 제26주일]
[수도회] 관계의 패스트푸드와 스로우푸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모 6,1ㄱㄴ.4-7
○ 제2독서 1티모 6,11ㄱㄷ-16
† 복음 루카 16,19-31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흥청거리며 살아가는 삶의 끝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와 용서로 사람들의 악행을
참아 주고 계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처럼 위로와 고초가
뒤바뀌는 하늘 나라를 생각하며, 가난한 우리 이웃을 잊지 맙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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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옥 벌의 영원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가혹한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부자는 지옥 불의 맹렬함에 후회를 하지만 심연으로 갈라진
천당에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만족에
빠져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자신의 다른 가족은 지옥에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강을 건너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주님께 바쳐질 때 반드시 천상의
보상을 받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고 권세를 누려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억눌린 사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보살피는 분이십니다. 오늘 비유는 이 점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두려운 것입니다. 천당에서는 이 세상에서 첫째가
꼴찌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무한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권세 있는
사람을 낮추시고 가난한 사람을 들어 높이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후에
지옥에서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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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무관심이 아닌 사랑 가득한 관심으로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이제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ㄱㄴ.4-7
제2독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11ㄱㄷ-16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제가 키우고 있는 개들에게 밥을 먹이고 산책을 시킬 때 입는 옷이
있습니다. 제가 좋다고 너무 달려 들다보니 막 입는 허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습니다. 글쎄 윗옷을
입는데 어느 한 부분이 찢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개들이
달려들어서 옷이 찢겨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옷이 언제
찢겨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개 발톱에 의해서 찢겨졌을
텐데,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겠지요. 만약에 옷이 없었다면 맨 살에 그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옷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를 해주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옷이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저를 보호해주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 안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누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전혀 모르고
사는 모습 말이지요. 왜 모를까요? 바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나한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되지요.
사실 누군가가 다가오면 먼저 벽을 치고 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게 혹시라도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나를 어렵게 하지는 않을까
등등의 생각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고 합니다. 또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로 책임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좋아하시길까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주님께서는
강조하셨는데, 우리들은 마지못해서 실천하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무관심과 책임 전가를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너무나도 가난했던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부자라서? 사실 자기처럼 죽어서 고생하지 않도록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승에서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가난한 라자로에 대한 모습에서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돌봐야 할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게 놔둘 정도로
그냥 방치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그 많은 것들을 단순히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기 위한 도구로만
쓰게 된다면 먼 훗날 주님 곁으로 가서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무관심이 아닌 사랑 가득한 관심으로 내 주변을 돌아볼 때입니다.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아닌, 남에 대한 배려를 간직하는
사랑이 나의 구원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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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마음으로 부둥켜안고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의 약은
마음입니다(정도언).
부자와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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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행복이 사는 주소를 알려드리고 싶어서 한참 조사해서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시는 곳이 바로 행복이 사는
주소더라고요. (김창완, ‘안녕, 나의 모든 하루’ 중에서)
어떻습니까? 이 글을 보는 순간, 무릎을 딱 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내가 느껴야지만 나의
행복인 것이지, 남이 느끼는 것은 나의 행복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 내가 사는 곳이 바로 행복이 사는 주소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보세요. 바로 코앞에 두고도 너무 먼 곳만을 바라보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행복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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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관계의 패스트푸드와 스로우푸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제 26주일,
아모 6,1ㄱㄴ.4-7; 1티모 6,11ㄱㄷ-16; 루카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루카 16,25)
The parable of the rich man and Lazarus
관계의 패스트푸드와 스로우푸드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이들”(6,1), 호화호식하며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6,4-6)은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가는 신세가
되어 그런 생활은 끝장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6,7).
오늘 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종기투성이인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라자로가
그의 집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냈습니다(16,20-21).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처지는 두 사람의 극단적인 삶의 여건과
질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는 죽어 아브라함 곁으로 가고,
부자는 죽어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유대식으로 말하면
가난한 이는 행복하게 된 반면 부자는 불행에 떨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복음서의 서술을 보면 부자가 왜 불행에 떨어졌는지
의아합니다. 그는 사기를 쳐서 재물을 모은 것도 아니고,
부자랍시고 거만하게 처신하거나 특별히 악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지 라자로가 그에게 애긍을 청하지도
않았으니 그것을 거절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는 불행한 처지가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문제는 그의 구체적인 악행이 아니라 남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아가는 방식과
무관심한 태도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관계의 패스트푸드’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관계의 패스트푸드’란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이
관계를 통해 발견되고 성장해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관계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자는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온 우주만물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엄한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밖의 사람들과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변을 보지
못합니다. 건강하고 가진 것이 충분하고 힘이 있을 때는 더군다나
아쉬울 것이 없으니 이웃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지요. 만남도
이해타산을 따져 만나게 되니 깊은 인격적 만남과는 무관한 스쳐
지나쳐버리는 만남이 되고 맙니다. 자기집 대문 앞에 누워있던
비참한 처지의 가난한 라자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부자처럼 말입니다.
우리 또한 관계의 패스트푸드를 먹고 사는 사람처럼 재물이나
현재의 풍요롭고 안정된 삶에 눈이 어두워져 가까이 있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가족들의 아픔마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관계의 스로우 푸드’를 먹고 좀 더 찬찬히 서로를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헤아리고 쌓인 고뇌와 바램과 아픔의 소리를 듣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냉정한 무관심 대신에 애정 깊은 눈길로 서로의 마음과 처지를
헤아릴 수 있도록 내 눈을 어둡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합니다. 삶을 위해 투쟁하는 길거리의 외침에 귀막고, 불의와 차별을
보고도 못 본 채 하는 비겁한 회피와 안하무인, 현세의 일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몰두로 인한 무관심, 고통 앞에서 무조건적인 인내를
강요하는 태도를 과감히 벗어버려야겠습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며”(1티모 6,11), 사랑의 나눔과 애정 깊은 경청, 서로의 짐을
져주는 동행,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에 대함 돌봄을 통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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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것을 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온갖 좋은 것은 나에게 주시고
나쁜 것일랑 모두 가져 가소서~"가 우리의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나쁜 것이 올 것 같으면
그것을 떼어 버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가 나쁜 것을 물리치지 말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는 거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것만 달라고 하였는데
"나쁜 것도 주십시오" 청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나쁜 것들도 항상 끼여있는가 봅니다.
우리는 그걸 싫어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것도 꼭 끼워서 함께 주시니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병이나 고통, 박해와 시련, 몰이해와 상처 등이
그냥 나쁜 것만은 아니고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의 내세 삶을 위해 약이 되고 피가 되는 감추어진 보물이었네요.
그러니 오늘은 내가 받은 갖가지 좋은 것에도 감사드리지만
내가 받은 힘들고 힘든 나쁜 것들에도 감사드려 봅시다.
욥이 말하듯,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예수님이 왜 수난과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는지,
순교자들이 왜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시련을 겪어야만 했는지,
왜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과 구원의 은인들인지,
왜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스승인지를 묵상해 보는 주일 되십시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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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오늘도 많은 이웃들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완고한 우리 마음은 평생 살 것이라 착각합니다.
영원한 것이란 결코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우리네 삶입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나누어지는 새로움임을 묵상하게됩니다.
신앙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믿음을 통해 잃어버린 삶을 되찾게 해줍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게됩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를 통해 부자를 통해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더 많은 것을 탐해야 할 우리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 방향을 향해야 할 우리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지워져가는
이들을 위해 기억하고 기도하는 주일되시길 바랍니다.
믿음과 사랑안에서 우리를 빚어만드신 하느님을 기억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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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6주일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가을입니다. 한 구루의 나무에서 많은 열매가 열리는 것을 봅니다.
‘은행나무, 감나무, 밤나무’를 봅니다. 그 많은 열매를 기꺼이 나누어
줍니다. 동물에게도 나누어 주고,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그래도 나무들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누어
주어도 내년 가을이면 또 넉넉하게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아무리 마셔도 공기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강물을 아무리 사용해도 바다가 마르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넉넉하게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들만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다 살지 못합니다.
굶주려서 생을 마감하고, 병들어서 세상을 떠나고, 외로워서
스스로 마감합니다. 더 갖기 위해서 이웃을 무참하게 죽이려
합니다. 인간이 가진 탐욕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동전의
양면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가지지 못한 위대한 면을 인간은 분명
지니고 있습니다. ‘철학, 역사, 문학, 예술, 종교, 경제, 사회’는 분명
인류가 가진 뛰어난 재능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들의 꽃보다,
하늘을 나는 작은 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보험에 가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도움을 주는 것이 보험입니다. 몸이 아프면 도움을 주는 것이
보험입니다. 노후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보험입니다. 저도
몇 가지 보험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의료보험, 자동차 보험’에
가입을 했습니다. 의료보험에 가입을 했기 때문에 몸이 아팠을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동차 보험에 가입을 했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상조에도 가입해서 아버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셨을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보험을 하시는
분들의 권유로 연금 보험을 들었습니다. 원로사목자가 되면 약간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보험의 종류도 무척 많을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받아주는 보험’이 있다는
광고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짧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보험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보험입니다. 절차가 까다롭지도 않습니다. 보험료가
비싼 것도 아닙니다. 단순하고, 간단한 보험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온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고,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 보험입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 미화원에게 따뜻한
국수를 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꽃동네는 40년 동안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당에서 기도하시던
자매님이 중국인이 휘두른 흉기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인을 위한 장례미사에서 강우일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프랑스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테러에 의해
돌아가신 신부님을 순교자라고 하셨듯이,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돌아가신 자매님도 순교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변에서
자매님을 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어려운 이웃을 도왔고,
사회현실에 관심이 많았고, 본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셨고, 가정에
충실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자매님의 죽음은 가족들과
이웃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지만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의로움과
신심,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로’ 그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지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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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자가 지옥 가는 이유
2016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가 지옥 가는 이유
평북 정주에 있던 명문 오산학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그 동네에는 아주 똑똑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아놓곤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이 머슴의 자세를 보고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됐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입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이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요강을 닦는 행위는 다른 이를 높여주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누군가를 높여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
상대를 낮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높이기
위해 하느님을 낮췄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며 그분의 말씀엔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을
높이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런 사실로 우리는 오늘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자가 죄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부자가 잘못을 많이 한 사람일까요? 그는
지옥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었고, 거지가
밥상머리까지 오는 것을 허락한 자상한 사람이었으며, 아직 죽지
않은 형제들을 위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위해 중재를 청할 줄도
아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라자로는 무슨 좋은 일을
하였습니까? 사회에 이익이 되는 아무런 선행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가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이는 분명
다른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말씀하신 비유인 것입니다.
구원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위한 조건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의 이웃이냐는 질문이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는 질문 등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조건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관계는 계약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피를 주셔야 하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지켜야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리스도와의 계약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가난한 라자로가 옆에 있었는데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쓴다고 당당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에 대한 의무가 있었듯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반면 라자로는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지켰습니다. 개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직무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입니다. 자신이 짐승처럼 못나 보이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이름 없는 짐승들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그래서 이름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버려진 그릇은 이름이
없지만 고려청자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은 누군가가 그것에게
가치를 먹여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길에 쓰러진 이름 없는 사람에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임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아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만식
선생이 제자들에게 요강을 닦는 사람들이 되라고 한 것은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맺는 사람들이 되라고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탈리아 아퀼라 지진으로 300명가량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6명의 과학자들을 재판하여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들이 지진의 전조를 알고도 무시해버리고 모른 척 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그에 합당한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내어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을 모른 채 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살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신경 써
주면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사람에게
이름지어줄 수는 없습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일
수가 없습니다. 자꾸 나누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요강을 닦게 만드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사람이고
구원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남들의 요강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이는 부자로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사막의 교부가 된 안토니오도 결국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정 우리 종교는 우리를 이 세상에 집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돈을 섬길 것인지 주님을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택할 것입니까, 아니면 영생을 택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위해서,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절대로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계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지옥 간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진실성 있게 고려해 본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을 내어주지 않는 사해가 죽음을 상징하듯이,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도 죽은 목숨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슈만 / 케르너 시에 의한 12개의 가곡 Op. 35, 제10곡:
소리없이 흐르는 눈 (메일로 받은 음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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