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사랑의 길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13 07:17:26    조회 : 482회    댓글: 0

◈ [인천] 사랑의 길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ㄴ-16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미국의 한 비누공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공장에서는 야심차게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서 새로운 포장기계를 도입했지요. 그런데 이 기계에 결함이
있는지 비누가 담기지 않은 채 빈 봉투로 포장되는 제품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포장기계를 수리해야만 했지만,
수리되는 동안은 비누가 담겨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비누
없는 빈 봉투로 상품이 나가면 신뢰에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도입한 것이
바로 X레이 투시기 입니다. 그 가격이 자그마치 60만 달러였고 추가로
상당량의 유지비도 필요했지만, 앞서 말한 신용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X레이 투시기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공장에서는 제품불량률이 계속해서 제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장기계가 제대로 작동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새로
들어 온 직원이 집에서 선풍기를 가져와서 비누포장라인에서 강풍으로
틀어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선풍이 바람에 의해
비누가 들어있지 않은 빈 봉투는 가벼워서 날아간 것입니다.

선풍기 값은 고작 50달러, 그러나 그 효과는 60만 달러의 X레이 투시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지요. 아주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드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해결은 돈이 거의 들지 않는 아주 쉽고 간단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렇게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어쩌면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풀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멀어진 관계, 소원해진 관계를 더 이상 다시 회복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런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며,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착하다고 말할 수
하지만, 동시에 세상물정도 모르고 바보같이 사는 철저히 손해 보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며 놀릴 것입니다. 솔직히 자신이 당한 만큼 상대도 당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세상인 것 같은데, 왜 손해만 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보복하고 피해를 주었을
때의 마음이 좀 편안해 지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악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세상의 눈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숨은 것도 찾아보시는 주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길. 단순히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면 절대로
실천하기 힘든 길이 바로 이 사랑의 길입니다.

*****

행복한 마음이 꽉 찬 지갑보다 낫다(이탈리아 격언). 

*****

기쁨을 만드는 여섯 가지.

어떤 책을 보다가 정리한 내용인데, 솔직히 어떤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책 제목과 저자를 꼭 적어놓는데 없어서 쓸까 말까 하다가...
이 새벽에 나누기 좋은 글인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그냥
올립니다. 힘들다는 월요병도 등장하는 월요일 이 새벽에 이 방법으로
기쁨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1. 아름다운 시간 적어 보기.
일주일 동안 마음을 굳게 먹고 긍정적인 일을 전부 찾아서 빠짐없이
적다보면 쓸거리가 정말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2. 하루 동안 좋았던 일 돌아보기
밤에 잠들기 전에 긍정적인 일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전에 텔레비전을 봅니다.

3.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날, 그래서 어떤 일도 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실마리를 풀어 나갑니다.

4. 태연해지기
불행을 두려워하면 불행이 찾아오고, ‘올 테면 와라.’하는 식으로 태연하게
대처하면 불행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5. 감사하기
지금의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감사한 일을 찾으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6. 자신감 찾기
부질없는 자기 연민과 자책감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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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악을 선으로 바꿔나가는 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기념 마태 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Teaching about Retaliation

악을 선으로 바꿔나가는 길

오늘 독서에서 이제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남편인 아합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성읍의 원로와 귀족들에게 거짓 모함을 획책하게 하여,
죄 없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아래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이제벨 같은 이들은
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알려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24)라는 동태복수법을
폐지하십니다. 나아가 보복을 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 항의도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의 악을 기워 갚고도 남을 정도의 선으로 악에 맞서라고
가르치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더 큰 선을 행하는 것밖에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관점에서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며,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5,39-41)고
하십니다.

자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거의 모든 일의 해결사로 여겨지는 오늘날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침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 자신도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똑 같이 맞받아치거나 비난을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지, 한계와 조건을 정해놓고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며 나를 오해하고 좋지 않은 눈길을 보낼 때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태도 또한 돌아봐야겠지요. 오늘 복음은 무의식 중에
그런 삶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식 전환을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이기는 것은 보복, 증오, 폭력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물리치려는 사람은 자신을 폭력의 악순환 속으로 내몰고 말
것입니다. 악을 이기고 악을 선으로 돌이키는 힘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뿐입니다. 그러나 악의 힘은 너무나 끈질기고 강해서 악을
무력화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선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을 녹이고도 남을 만큼의 선과 뜨거운 사랑을 품도록
힘써야 하고, 아예 악이 싹트지 못하게 할 정도의 선의 확산을 위해
투신해야 할 것입니다. 온갖 선, 으뜸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되돌리고
베풀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벨처럼 갖은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이득을 취하려고 악을
저지르는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도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믿는 사람들다운 관대함과 하느님의 선으로 악을
선으로 바꿔나가는 하느님 선의 증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강론에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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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8)

예기치 못한 악으로 많이 고통스러울 때도
결코 악에 맞서거나 반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시간이 되십시오.
악인에게 맞서다가 악인을 닮게됩니다.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 가는 것입니다.
악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아야 악인에게 맞서지 않게 됩니다.
악에 맞서지 않으면 악은 더이상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선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힘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믿을 때 자연히 악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악또한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것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깊어진 사랑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방향전환을 가르쳐줍니다.
현실의 어두운 면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악은 예수님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알려고 애쓰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악과 적으로 만들어 놓는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시키는 예수님 마음에서 나아갈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위한 신앙의 여정인지를 묻게 됩니다.
선을 위한 선인을 위한 참된 신앙이기를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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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 5,39)
 
예부터 사회법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원칙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소위 동태복수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가 삶의 근간이 되다보니
이 원칙은 더 심화되어 '손해배상법'으로 발전하여
내가 손해본 것만큼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로 돌려받겠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삭막해지는 인간관계가 되고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길 가에 이것저것 따 먹을 것이 많은데
저걸 따 먹어도 되나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시골인심도 옛날같지 않아
잘못 따 먹었다간 밭 전체를 물어주어야 한다고도 하지요.
그저께는 뽕나무에 오디가 탐스럽게 달려서 망설이다가 좀 따 먹었습니다.
주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오디 좀 따 먹었다고
배상하라고 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오늘 예수님은 동태복수법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무작정퍼주기법'(?)을 역설하시네요.
자본주의가 손해배상법으로 갔다면 반대로 '퍼주고 또 퍼주라' 하시네요.
 
자본주의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런 퍼주기 문화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는 문화는 결국 지옥으로 가는 길이고
퍼주고 나누고 서로 손해보려는 문화는 천국으로 가는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지옥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실래요?
아니면 어렵더라도 천국으로 한발자욱 더 걸어가실래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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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예수님의 말씀 중에 설명이 어려운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본성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가열하면 수증기가 되고
물의 본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물은 위로 올라가는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가열하지 않는 물은 하늘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물이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지 않으면 대지는
메마르고, 생명은 죽어갈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찾아 가려는 우리들의 본성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무술영화를 보면 비슷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무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물을 길러오라고 합니다.
 매일 물을 길러오면서 마음 수양을 하고, 무술을 배울 수 있는 기본 체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어린 나무를 심고, 매일 나무를 뛰어넘으라고 시킵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더 높은 곳을 뛰어넘게 됩니다. 스승님은 그런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무술을 가르쳐 줍니다. 기본적인 체력과 무술을 배우려는
인격을 갖추어야 비로소 무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격이 급한
제자들은 그런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곤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내는 제자는 진정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아합 왕과 이자벨 왕비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재물을 얻기 위해서 영혼을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가습기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섬마을에서 근무하는 여 교사에게 폭행을 저지른 이들은 욕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탐욕 때문에 아름다운 지구별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생명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 매일 선행을 베푸는 것,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닙니다. 조금씩 실천을 하면,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시도해 보면 어느덧 신앙인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양심을 팔아넘기고, 폭력을 행사하고, 사기를 치는
것은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양심을 속이면,
세상의 것들에 물이 들면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원래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게 살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하게 살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법과 하느님의 법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물질,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경쟁과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만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1등은 기억하지만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은 멀리 떨어져있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아픈
사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나라가 우선입니다. 세상의 법은 많은 능력과 자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행복은 성적순, 능력순, 명예순, 권력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법에는
낙오자가 생기고,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양보, 겸손, 희생,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행복은 물질, 명예,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서로 나누기만
한다면 우리가 모두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듯이, 우리의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사람들
모두는 하느님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룬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을 내 몸처럼 돌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물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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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소위 물먹이는 거죠.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비록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인간이지만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참 신앙인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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