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나로 변화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갑자기 불 병거가 나타나더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1.6-14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신학생 때 제가 다니던 본당에는 아주 괴팍한 형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활동은 아주 열심히 하셨지만, 별 것도 아닌 것에도 화를
얼마나 내시던지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 앞을 피하곤 했었지요. 한 번은
본당 바자회 때에 한 청년이 서빙을 하다가 이 형제님과 부딪혀서 음식을
쏟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공손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님께서는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혼을
내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이 형제님을 여기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워낙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오셨었기 때문에
성지 안이 상당히 복잡했었지요. 이렇게 복잡하다보니 커피를 나르다가
어떤 형제님과 부딪혔는데 바로 문제의 형제님이신 것입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화를 내셨을까요? 안 내셨을까요? 자그마한 부딪힘에도 화를
내시던 형제님이신데, 커피 물을 쏟은 제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곧바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깊은 사과를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신부인 저인 것을 확인하시고는 화내기보다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신부님. 커피 묻은 옷은 빨면 되니까 아무런
문제없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화를 내시지 않았을까요? 그
동안 성격이 바뀐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자신에게 불편함을 준 사람이
‘신부’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에게는 차마 평소의 모습을
보이면서 화를 내기 힘들었던 것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된 것을 떠올린다면, 각자의 모습 안에는
하느님의 속성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바로 또 다른 하느님께 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감히 미워할 수도, 판단할 수도, 또 단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도 아닌, 내 구원의 결정적 열쇠를 맡고 계시는 주님께 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선을 행하는 것은 분명히 옳습니다. 그런데
자선을 할 때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하시지요. 즉, 인간의 찬사를
추구하면 사람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보상만을 받을 뿐인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자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에서 우리는
감추어져야 하고, 대신 하느님께서 드러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실 수 있도록 생활한다면 나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모습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나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의
구원은 더욱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
내 꿈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마법은
작은 걸음 속에 숨어 있다(김택진).
*****
주님과 친해지기
지금 인천교구 사제들은 강화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연수중입니다. 사목활동에 도움이 되는 강의를 들으면서 동시에 오랜만에
반가운 신부님들을 만나면서 좋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체험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윗옷을 바지 속에 넣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좀
나오다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은 몸매(?)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윗옷을 바지 밖으로 빼놓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윗옷이 기능성
옷이라 몸에 달라붙어서 몸매를 더욱 더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글쎄 이 상황을 가지고서 10분 이상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상황,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서로 친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저와 친한 동창 신부와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는데 참 길게 통화하는데, 아무리
못해도 30분 이상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바로 친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도
화제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맞습니다.
아직 하느님과 친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쉽게 주님께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 [수도회] 하느님만을 드러내는 겸손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8)
Teaching about prayer, fasting, almsgiving
하느님만을 드러내는 겸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6,1)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6,2)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6,16) 한마디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유다교의 전통적인 종교관에 따른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하는 정의입니다(6,1).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마음을 다해 조용히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숨은 일’도 알아보십니다. ‘숨은 일’이란 행위 자체를
숨기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지향과
의도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이들에게 주시는
상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5,48). 그분을 향유하는 것보다 더 큰
상이 없겠지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자신은 주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을 착각하게 되면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신앙생활도 대인관계도 꼬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행동의 근원에서부터 방향착오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순수한 지향입니다. 곧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행할 때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도와 지향만 지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영예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랑을 행하거나 정의를 위해 투신할 때 나의 옳음을 드러내거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계기로 삼으려는 것도 순수한 동기일 수 없습니다.
정의를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을 의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행하는 정의는 오만일 뿐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겠지요.
자선, 단식, 기도, 정의를 위한 투신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
해도 그 중심에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둔다면 헛되고 헛된 일일 뿐입니다.
또한 그런 일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것을 챙기려든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역겨운 처사일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자기에게 보여 주시는 좋은 것들을
‘하늘에 쌓아두며, 그것을 보상받을 의도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신 종의 업적들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는 종은 복됩니다.”(영적 권고 28)
우리 모두 하느님의 주도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어떤 일을 하든 오직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순수한 지향을 지니고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 [수도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 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4)
인간적인 성숙과 신앙의 성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회심은 언제나 성숙의 기초가 되어줍니다.
회심을 통해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정화없이는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바로 자선과 기도 단식입니다.
절제는 겸손을 깨닫게하는 근본이며
겸손은 자비를 깨닫게하는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보상은 자유와 기쁨입니다.
자선과 기도 단식은 우리 삶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어놓는 가장 확실한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태 6,1)
우리는 보통 내가 잘 한 일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길 바라고
내가 잘못한 일은 다른 사람이 모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잘한 일은 떠벌리게 되고 잘못한 일은 감추려 들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해보라시는 것 같군요.
잘한 일은 감추려 노력하고 잘못한 일은 겸손되이 고백하라고...
잘한 일에 대해 칭찬을 다 받아버리는
하느님으로부터는 받을 상이 사라지고 잘못한 일을 감추게 되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속임으로써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잘한 일은 감춤으로써 사람에게서보다 하느님에게서
상을 받기를 원해야 하고 잘못한 일는 겸손되이 고백함으로써
용서와 자비를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좋은 일 많이 하십시오.
다른 사람 몰래. 하느님만 아시도록... 그리고 잘못한 일은
감추거나 변명하려 하지말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고 고백합시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 [서울]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 6,1-6.16-18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프로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져서 자연을 찾는 사람, 사업에 실패를 해서
자연을 찾는 사람, 가족들과 헤어져서 자연을 찾는 사람,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 자연을 찾는 사람, 새로운 진리를 찾기 위해서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단순함입니다. 먼가를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단식, 자선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허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보다 적게 먹지만,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 건강한 것을 봅니다. 건강은 단순함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만드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물건을 만드는 것도 스스로 합니다. 스스로 하기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속이 있습니다. 스스로 하기 때문에 노동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셋째는 겸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물은 대지를 적시고, 넓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나무는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면서 우뚝 서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의 생활에서, 경쟁의
사회에서 겸손함은 미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연은 많은 것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숲에는 뿌리지 않았어도 먹을 것들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도시에서 사먹는 물보다 훨씬 맛있고, 건강에도 좋습니다. 인생은 단
하루만 살아도 흑자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들이 감사할 일들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못 되도’라는 생활성가를 들었습니다. 가사와 멜로디가 참
좋았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둔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내 주위의 사람에게 빛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한 평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나의 사랑으로 빛을 줄 수 있다면, 때론
나의 힘만으로 벅찰지 몰라, 그럼 기도할 거야. 나의 벗이며 나의 사랑
주님께 하늘에 태양은 못 되도, 밤하늘 달은 못 되도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은 등불되리라. 때론 나의 힘만으로 벅찰지 몰라, 그럼 기도할
거야. 나의 벗이며 나의 사랑 주님께 하늘에 태양은 못 되도, 밤하늘 달은 못
되도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은 등불되리라. 하늘에 태양은 못 되도,
밤하늘 달은 못 되도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은 등불 되리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식, 허영,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교만함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 기도를 할 때, 단식을 할 때’에도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 하고,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성공을 위한 경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이 알아주는 명예와 업적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십니다.
고수들은 형식과 규칙들을 넘어서곤 합니다. 고수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굳이 의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저 자신은 아직은 고수가 아니기
때문에 제도라는 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강물이 깨끗하면 갓을 씻고,
강물이 더러우면 신발을 씻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청주] 자선은 의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 6,1-6.16-18
자선은 의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라.”(마태6,1)고 하셨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 기도할 때,
단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6,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면 그 순수성을 잃게 되고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됩니다.
아니 공든 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상을 받기 위해서
하지 않고 그저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며 최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어찌하시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니
기왕이면 올바른 지향을 지녀야 합니다. 요즘 세상은 가진 사람이 더
인색하게 구는 경우가 많으니 칭찬받기 위해서라도 좋은 일을 하는 게
어디냐?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듣고
주님의 명을 그대로 행하게 되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칭찬을 구하는 허영은 사라지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필리4,7)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아시며
상을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상을 마련해
두십니다. 단식이나 기도, 그리고 자선, 논리와 설득, 그 어떤 것에 있어서도
인간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말고 천상의 것을 추구하길 기도합니다.
무엇을 하든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