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황금률
2016년 6월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과 다윗 때문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9,9ㄴ-11.14-21.31-35ㄱ.36
복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옛날 군대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군대에 입대해서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이제 자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신병으로 잔뜩
군기가 잡혀서 앉아있는 저를 포함한 신병들에게 많은 고참들이 몰려와서
묻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많은 질문은 “여자 친구 있냐?”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축구 잘 하느냐?”라는 것이었지요. 우선 신학생인 제게 여자
친구가 있을 리가 없지요. 또 한 가지는 축구를 잘 한다고 했다가 실제로
못한다고 평가되면 얼마나 혼날까 싶어서 “잘 못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입대했던 동기 신병은 “축구는 못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못 한다는 말과, 축구는 못 한다는 말의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축구는
못한다는 것이지만, 다른 것은 잘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동기는 어떤 일이든 열정을 가지고 정말로 열심히 군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아저씨가 “넌.. 기타 칠 줄 아니?”라고 한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아직 한 번도 안쳐봐서요.”
기타를 못 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안 쳐봤기 때문에 ‘칠 줄 안다,
모른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안 해봤기 때문에 모르는
것뿐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소위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는 것이 가능은 할까요?
아마 대부분이 불가능하다고 외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도
힘든데,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손해 보면서 왜 해 주느냐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황금률을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나고
괜히 욕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바라는 대로 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짜증내면 행복할까? 화를 내면
기분이 좋아질까? 욕을 퍼 부으면 기쁠까? 불평불만을 가지면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짜증, 화, 욕, 불평불만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에 결국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황금률이 남만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목적은, 달성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표준점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다(A. 주벨)
*****
농구 선수가 아닙니다(샘 혼, ‘사람들은 왜 그 한마디에 꽂히는가’ 중에서)
몇 년 전 나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주 키 큰 남자를 보았다. 그런데
내 앞의 몇 사람이 그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와 가까워지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티셔츠 앞에 “전 농구선수가 아닙니다.”라고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등에는 “키가 작아 고민이라고요?”라고 적혔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이렇게 멋진 티셔츠를 구했어요?”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 옷장엔 이런 티셔츠가 가득하답니다. 제일 좋아하는 건 ‘제 키는 2미터
10센티이고 위쪽도 날씨가 좋습니다.’라고 쓰인 셔츠지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요?”
“어머니의 제안이었죠. 전 열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 무렵까지 한 시간마다
키가 달라질 정도로 빨리 컸어요. 놀림당하기 싫어 언제나 집에 있었고요.
어머니는 ‘놀리는 사람들과 싸울 것 없이 거들어 주자꾸나.’라며 재미있는
티셔츠를 입게 했어요. 전 이제 큰 키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즐거워한답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감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기쁘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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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영적 식별과 모두를 내어주는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기념, 마태 7,6. 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You Must Seek the Narrow Gate
영적 식별과 모두를 내어주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거룩한 것을 식별하여 존경하도록
가르치십니다(7,6). 거룩한 것을 무례한 자들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구원에서 소외시키지 말아야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각자가 갈 길과 밟아야할 과정을 잘 식별하여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식별이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고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일상의 삶에 사랑을 행할 때나 정의를 실천하고 교회를 위해 일할 때에도
식별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한다거나
불쌍해 보인다는 이유로 분별없이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수단을 이용하고 또 한 사람의
인간성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길을 식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은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황금률로 표현됩니다(7,12). 형제애를 나누는 데 있어서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희생, 봉사를 통한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나 자기완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띠게 마련입니다. 그 누구에게보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 하는 것보다 더한 애정을 지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을 향한 이런 사랑의 방식은 무조건적이고 배타적이며 한계가 없는
사랑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남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한마디로 중심 이동을 하라는 것이지요.
이기적인 사랑에서 이타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랑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기시켜주십니다. 그렇지만 생명에 이르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십니다(7,13-14). 생명의 길은 예수님의 요구를 지키는 것이며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늘 놓여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은 겸손한 사람, 하느님을 품은 사람,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
문은 예수님을 떼어놓고 통과할 수 없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가야만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고 그리스도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신앙의 역설을 사는
사람만이 지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내 앞에 놓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운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정직한 성찰이 필요하겠지요. 오늘의 시대는 이런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발달과 자본의 힘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신앙에 대한 도전이 점점 강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 모두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기도 안에서 잘
식별하고, 힘들지만 생명의 좁은 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도록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거기에 참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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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13)
보통 사람들은 안전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갈수록 모험을 싫어하고 변화를 싫어하게 되지요.
젊은 시절에는 아주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엄청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이 되는 경우가 그래서 허다하지요.
많은 사람들은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따라 가고
남들이 입는 옷을 따라 입고 유행이라는 것을 좇아 갑니다.
그러나 참으로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놀랍게도 백이면 백,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갑니다.
네 안전빵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저냥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걷고 있나요?
그 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임이 검증된 길이라면 잘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과 반대되는 길이라면 망하는 겁니다.
대부분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이 걷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잘 닦여진 고속도로가 아니라
비포장 산길이고 둘레길, 올레길과 비슷할 겁니다.
오늘 내가 걷는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잠시 멈추어서 한 번 돌아보면 어떨까요?
하느님 나라 가는 이정표를 잘 보고 한걸음 한걸음
잘 걸어가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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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거룩함을 향한 갈망
2016년 6월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 7,6.12-14
거룩함을 향한 갈망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과 같이 살 때였습니다. 한번은 몇 명의
아이들이 경미한 비행 끝에 가정법원으로부터 판결을 받고 저희 시설로
입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입소 날이 성삼일이 시작되는 성 목요일
오후였습니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모두 신부님 수사님들과
함께 하는 성목요일 만찬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물론 그날 입소한
아이들도 영문도 모른 채 길고 긴 거룩한 대 예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은 성 목요일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예식, 그리고 토요일에는 부활성야 대미사, 주일에는
부활대축일 아침미사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부활절 아침 저를
만나자마자 아이들이 대뜸 언성을 높여서 엄청 따졌습니다. “신부님,
살레시오 여기, 생활하기 좋다고 해서 판결 받고나서 엄청 좋아했는데,
저녁 때 마다 지루하고 짜증나는 집회가 있어서 살기 너무 힘들어요. 다른
시설로 보내주시면 안돼요?” ^^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는 참으로 값지고 아름다운 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체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 성체강복, 성경, 묵주기도...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이 아름다운 보물들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이 다시 또 없습니다. 언젠가 성체성사의 맛에 흠뻑 빠져 거의
황홀경에 도달한 한 신자를 봤습니다. 당시 저는 그분의 모습에서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보물들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체성사나
성체강복의 시간은 그야말로 고역이요 너무나 지루한 시간입니다. 미사에
참여한 어떤 신자들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정말이지
거룩해야할 성찬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 전체에 짜증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혼잣말로 궁시렁궁시렁 거립니다.
몸은 성당에 와있지만 마음은 이미 성당 밖을 벗어나 전국산천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거룩함이 세상에
훼손되거나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오 복음 7장 6절)
사실 개들에게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다이아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돼지들에게 영롱한 진주 목걸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것들은 개 껌 하나, 양배추 하나보다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거룩함 앞에서 선 한 인간 존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로지 육적인
생활에만 흠뻑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신비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되는대로 세상의 논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전례는
형벌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거룩함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천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거룩함의 예식에 맛을 들이는 일입니다. 거룩한
예식, 동작, 문구 하나 하나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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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016년 6월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 7,6.12-14
컴퓨터 게임을 잘 못하지만 예전에 재미있게 했던 것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자’입니다. 그것도 등급이 있는데 끝까지 가본 적이 없습니다.
3번째 등급까지는 쉽게 통과하는데 그 다음 단계에서는 늘 실패하곤
했습니다. 본당 청년들은 최고등급까지 가서 공주를 구해오곤 했습니다.
최근에는 ‘애니팡’이라는 게임도 해보았습니다. 이것도 낮은 등급에서
놀다가 포기했습니다. 저는 손놀림을 잘 못하고, 게임을 하려는 열정과
자질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 두려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 출세, 권력,
재물에 온통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첫 번째 관문도 통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첫 번째 관문은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관문은
나눔이고, 세 번째 관문은 희생입니다. 이 정도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더 높은 등급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것입니다.
한 자매님께서 35년 동안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그동안 그리신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된 그림은 모두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봉헌하기로
하셨습니다. 자매님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셨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몸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자매님은 이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당신이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도태라는 진화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다른 모습의 채식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약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가기보다는 가시밭길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이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면의 깊은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듯이, 샘이 깊은 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듯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물에 글을 쓸 수 없듯이, 우리의 선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울에 먼지가 있거나,
흠결이 있으면 나의 웃는 얼굴이 제대로 비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나의 얼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십시오.’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사람은 굳이 문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문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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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은혜를 기억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6월21일 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 7,6.12-14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오래 전입니다. 교우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를
옆자리에 태운 것이 긴장되었는지 후진을 하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얼른 내려서 잘못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 운전사는 차량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차량상태를 확인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마 확인을 했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은혜를 입었으니 같은 처지가 되면
그런 넉넉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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