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7일 포기하지 말고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5-27 06:27:00    조회 : 450회    댓글: 0

◈ [인천] 포기하지 말고

2016년 다해 5월27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가 되십시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4,7-13

복음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25

캐나다 작가인 카밀리앵 루이(Camillien Roy)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낮에는 취업지도 상담사로 일하면서 매일 밤 부지런히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인
답변뿐이었지요. 거절당한 편지의 수가 자그마치 아흔아홉 통에 달하게 된
것입니다. 작가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편지도 있었지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펜을 놓으세요.”

“저는 완전히 질렸습니다! 이제 끝입니다. 싫증났어요. 32년 동안 재능 없는
작가들이 쓴 고약한 원고와 지루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말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며 32년을 보낸 뒤 제가 얻은 수확은 처참했습니다. 저는
똑같은 자리에서 32년 넘게 삐약삐약 울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운이
없었겠지요. 저는 너무 늦기 전에 직업을 바꾸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들을 받고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을까요? 정말로 펜을 놓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거절편지들을 모아서 ‘소설
거절술’이라는 책을 냅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세상 앞으로
나왔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 세상에 발표한 두 권의 소설이 호평을 얻어
유명해지게 됩니다.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용기, 그 결과 실제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세상의 시선에 너무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곤 합니다. 여기에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도록 만든 주님께 불평불만의 기도를 바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에 원망만 가득할 뿐입니다. 자신의 때를
주지 않는 주님과 세상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제철이 아닌 때에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상식에 벗어나는 말씀과 행동이십니다. 아직
자신의 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저주를 쏟아내셨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처음으로 몸을 가렸던 나무로 유명한 무화과나무는 율법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스스로는 자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필요해 하실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통해 율법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이 주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제한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저주로 인해 무화과나무는 뿌리째
말라버립니다.

우리 역시 열매를 맺지 못하여 저주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믿고 이 믿음으로
기도하며 청한다면 충분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갖지 않고 세상의 시선에만 주목하면서 자신을 이루어질 주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뿌리째 말라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가로막는 세상의 어떤 장벽에 굴복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
(헬렌 켈러).

*****

마음을 잡아야....

제가 키우는 개들과 함께 산책을 하다보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해서 반갑다고 달려듭니다. 문제는 제가 키우는 개는 몸무게가
30Kg이 넘을 정도로 큰 대형견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큰 개가 달려드니
어떤 사람이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얼른 개의
목줄을 잡고서 그 분에게 달려들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목줄을
놓친 것입니다. 급해서 다리를 잡았지만, 금세 뿌리치고서 사람을 향해서
뛰어갑니다.

목줄만 있으면 적은 힘으로도 충분히 제어를 할 수 있지만, 다른 곳은 온
힘을 쏟아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동물들이 제어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끼는 귀를 잡으면 되고, 닭은 날개를
잡으면 됩니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꼼짝을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으면 제어할 수 있을까요?

멱살을 잡으면 싸움이 나고, 손을 잡으면 뿌리칩니다. 그렇다고 발을
잡으면 구질구질해집니다. 바로 제어할 수 있는 곳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평생 떠나지 않게 된답니다.

이 마음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나누어야만 마음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아시죠?

</ul><center>
<img src="http://bbadaking.speedgabia.com/img/20160527_02.jpg" width="400" height="602">
자캐오가 올랐다는 돌무화과나무.</center><ul>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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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배고픔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월27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마르 11,11-25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

Cleansing of the Temple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배고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예언적인
것으로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기대에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기대했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고, 형제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배고픔’(11,12)은 육체적인 굶주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정의의 열매를
애타게 찾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화과철이 아니었습니다.’(11,13) 곧
이스라엘은 이미 회개의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신앙을 거부한 탓에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11,12)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악행을 감추려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
(11,17)로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한마디로 성전의 제사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만 하고 회개시키지 않음으로써 결국 성전을 세속적인 장터로
바꿔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품고 실천하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곧 기도할 때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 뜻을 행동으로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갈망하고 실천하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미움이
아닌 하느님의 용서에 의지해야 하고, 그 용서를 받기 위하여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정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때문에’란 언어습관 하나를 바꿔보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때문에 화났다, ~때문에 기분 나쁘다, ~때문에
상처받았다, ~때문에 실수했다, ~때문에 미치겠다, ~때문에 잘되는 일이
없다, ~때문에 신앙생활도 못하겠다, ~때문에 살고 싶지 않다 등등의 말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지입니다.

반대로 ‘때문에’란 표현을 긍정적으로 잘 사용한다면 정화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 때문에 생명을 받았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삶의 이유를 발견하고 희망을 갖게 되었으며, 영신의 형제자매들을 선물로
받게 되었으며, 고통과 시련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국사회를 성전으로 바꿔나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숨쉬도록 우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며, 갈등과 불의가 만연해 있는가를 직시하며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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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8주간 금요일

2016년 다해 5월27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 마르 11,11-25

정 진석 추기경님께서는 매일 저녁 ‘묵주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교구를
위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부모님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신학생들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언제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처럼, 늘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은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실신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울며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기도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동반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왔습니다.
따라서 교회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아드님의
유언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 자애로우신 성모님, 당신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맏아들로 낳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영적으로 낳으신 둘째 자녀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형제로 모시며, 성모님을 우리 어머니로 모시는
영적 인연을 맺는 새 세상에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 성모님, 예수님이 카나의 혼인 잔치 때처럼 저의 유약한 마음의 물을 굳센
마음의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시도록 청하여 주십시오.

- 성모님은 죄인들의 피난처이십니다. 십자가의 발치에 엎드려 청하는
저희를 예수님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쪽에서는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가두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를
나누어주고, 입교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약 장수가 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두선교를 하는 쪽보다는 약 장수가
약을 파는 쪽으로 많이 몰렸습니다. 오후가 되자 가두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약 장수에게 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고, 당신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을 파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는 이유가 멀까요?’ 그러자 약 장수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 약은 가짜입니다. 몸에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은
약도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가짜 약을 진짜처럼 최선을 다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습니까!’ 전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확신과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약하고, 부족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한 확신이 있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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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뒤집어 생각해보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5월27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 마르 11,11-25

무슨 숨은 뜻이 있지 않겠나?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의 삶을 볼
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영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그런 소리를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숨은 뜻을 찾아내면 오해와 속상함을 넘어 기쁨을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11,13)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중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꽃 피고
수많은 열매를 맺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는 것으로
(요엘2,22 ; 하깨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 맺지 못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레5,17. 8,13 ; 호세2,14 ; 아모4,9 ; 요엘1,7.12) 예언자들의 예언이
무화과의 열매를 통한 비유를 통하여 주어졌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이제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짐을 말해줍니다. 결국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저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전과
율법학자나 수석 사제,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하나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세상과 타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대는 멀쩡하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느님 경신례와 각종 행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의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현존을 보여주지
못하는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마르11,15). 미사봉헌은
항상 장엄합니다. 혼자 봉헌하든 많은 사람이 함께하든 주체는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고 힘이 있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하느님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였으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성전이라 해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합법적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강도’는 칼을 든 개인 강도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강도의 소굴을 다시
‘기도의 집’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우리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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