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일 온 몸으로 사랑하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2 06:11:49    조회 : 447회    댓글: 0

◈ [인천] 사랑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016년 다해 6월2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5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봉성체를 하는데 정말로 열심히
어머니를 봉양하는 며느리를 볼 수 있었지요. 오랜 시간 동안 전혀 움직이지
못하신 채 침대에 누워만 계셨는데 짜증 한 번 내지 않으시고 언제나
웃으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긴 병에 효자 없다.’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자매님께 여쭈었습니다.

“자매님, 어머니를 이렇게 오랫동안 보살피는 것이 참 힘드시죠?”

그러자 이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도 힘들지 않았어요. 제게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거든요.”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긴
제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도 기억나네요.

“나는 너희들 키울 때 힘든 것 하나도 몰랐다.”

저희 형제들이 정말로 모범적으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형제들 숫자가 적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사실 제
형제는 여섯 명이나 되거든요. 또한 제가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아서 사고도
많이 쳤는데, 그런데도 불구하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제 어머니 역시 자식들을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면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짐이며 굴레로 여기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으로 답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과연 이 사랑의
실천이 과연 쉬울까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반대로 내게 짐이며 굴레라고만 생각한다면 절대로 실천할 수 없는 계명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번제물이나 희생제물보다 더 낫다고 고백하는 율법학자의
말에 주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사랑의 실천이 그 어떤 제물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도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존재를 많이
만드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을 많이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

하느님과 이웃에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려면 굳이 굉장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들어 있는 뜨거운
사랑이다(마더 데레사).   

*****

혼자

‘혼자’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떠올려집니까? 외로움, 고독,
슬픔 등의 단어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자유로움, 여유, 만족
등의 단어가 떠올려지더군요. 사제로 ‘혼자’ 살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긴 이제는 동창신부들과 여행을 가서 함께 잠자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혼자에 익숙해진 것이지요.

혼자가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을 볼 때,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고, 혼자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으며, 나만의 취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요. 부정적인
것보다도 긍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혼자는 외로움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까요? 내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하게 되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 역시 소중하게 여깁니다.

혼자 있는 이 새벽에 문득 몇 글자 이렇게 적어 보았습니다. 혼자 있는 제가
부럽죠? 그런데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부러워 할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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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한 전력투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 12,28ㄱㄷ-34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31) 

The Greatest Commandment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한 전력투구

사두가이와 논쟁하시는 것을 듣고 있던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논쟁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248가지 적극적인 명령과 365가지 금령을 포함한 613가지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많은 계명들 사이에는 중요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과정에서 어떤 계명이 중요한가는 성경들에 따라서도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예컨대 시편 15편에서는 열한가지, 이사야서
33장 15절에서는 여섯 가지, 미카서 6장8절에서는 셋을 들었습니다.

미쉬나에서는 소송, 제의에 관한 일, 정결에 관한 규정이 율법의
중요사항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레위 19,18을 토라의 위대한
일반 원칙으로 봤습니다. 한편 랍비 힐렐은 모든 계명들 가운데 ‘황금률’을
첫째가는 계명이라 했고, 랍비 샴마이는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준수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으뜸 계명에 대한 율법 학자들의 물음에 신명 6,4-5의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인용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29-30). 예수님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계명은
하나뿐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이웃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나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곧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유일한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전적인 이타적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은 삶에서 진정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그 중요한 것을 의식과 마음의 중심에 두어야겠지요. 그것이 과연
하느님 아니라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아마도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 삶에서 그 중요한 것을 위해 늘 잊지 않고 의식하며 사는가, 그리고
그것을 전 인격을 다해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하루도 그렇게 나의 행복한 인생, 영원한 생명,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내가 되기 위해 영적으로 전력투구하는 우리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온갖 차별과 소외,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기꺼이 내놓는
전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힘쓰는 ‘아름다운 내어줌의 날’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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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2티모 2,8-9)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복음은 어떤 건가요?
어떤 소식이 정말로 가장 기쁘고 소중한 소식일까요?
그 소식은 너무도 소중하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누가 뭐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기쁜 소식은 어떤 걸까요?
 
그깃 때문에 설혹 목숨을 잃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만은 잃고 싶지 않은 그런 복음이 있나요?
 
사도 바오로는 그걸 찾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셨다는 것,
그래서 나도 죽더라도 되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네요.
 
사실 동서고금의 뭇 황제들이 꿈꾸던 불로초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을...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니
죽음을 끝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불로초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일 뿐.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못배길 천기누설이 아니던가 그런 말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도 신처럼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이랍니다.
 
이 귀한 복음에 초대받은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오늘 그 복음을 되새기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복된 날 되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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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9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6월2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8ㄱㄷ-34

길을 가면 이정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정표를 보면서 안심하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서울’이라는 이정표에는 서울은 없습니다. ‘부산’이라는
이정표에도 물론 부산은 없습니다. 달을 향해서 벌리는 손가락에도 달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참고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수련장, 전과, 수학의
정석, 성문기본영어’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참고서가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습니다.
참고서는 말 그대로 참고가 되는 책입니다.  

하늘의 별들, 바다의 모래들, 들의 꽃들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수십억 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강물은 질문을 하지 않아도 넓고 깊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정표가 아닙니다. 참고서가
아닙니다. ‘왜?’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진리를 대면하려는 나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의 내용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답변입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사랑은 집착입니다. 그러기에 채워지지 못하면 더욱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조건으로 주고받는 사랑은 거래입니다. 거래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깨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채우는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조건을 보고 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럼에도 하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사랑은 행동이며, 결심입니다.’ 사랑은 고정된 ‘틀’이 아닙니다.
사랑은 역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사랑은 거저 베푸는 것이며, 되받지
않아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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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온 몸으로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2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8ㄱㄷ-34

온 몸으로 사랑하라.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 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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