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 거꾸로 찾아가는 행복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6 06:29:47    조회 : 441회    댓글: 0

◈ [인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

2016년 6월6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6

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

지난달에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오후에 제가 키우는 개들과
산책을 한 뒤에 사제관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순례객이 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마주쳐서 저는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혹시 성지담당 신부님이세요?”

저는 “네. 맞습니다. 올해 이곳에 오게 된 조명연 마태오 신부입니다.”
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분께서는 “그래요? 제가 이곳 성지에 자주
오는데 이제까지 계셨던 성지신부님과 달리 아주 젊으신 신부님께서 성지에
오셨네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그리 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젊은 신부도 아닙니다. 또 이제까지 성지에 계셨던 저를
제외한 역대 5명의 신부들 중에서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딱 한 명밖에
없었지요(이 신부님이 계셨을 때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훨씬 젊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전임 신부들보다 젊다고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저는 “감사합니다. 저 정말로 젊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옆을 지나가는데 이분이 제 얼굴을 빤히 보시더니 이렇게 다시 말씀하세요.

“신부님, 가까이서 보니까 꽤 늙으셨네요.”

이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여전히 기분이 좋았을까요? 기분이 팍 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고, 안 좋아지는 상태로 변하는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짧은 몇 초의 시간으로도 충분했다는 것이지요.

행복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오랜 시간의 정성과 노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행복을 소유하는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종 강의를 나가서 “미래의 꿈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으면 몇몇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을 가지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요? 셀 수 없는 수많은
돈,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명예,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할 수 있는
권력 등의 세상의 행복만을 추구하다보니 갖기 힘든 것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아직은 가질 수 없는 미래의 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얻을 수 있는
것, 그래서 지금 기쁘다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행복에 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행복이란 자신에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싹트는
것이다(윌리엄 조지 조던).  

*****

다섯 가지 질문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자기관리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스승인
타고르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까?”
타고르는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자기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타고르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첫 번째, 오늘은 어떻게 지냈는가? 두 번째, 오늘은 어디에 갔었는가?
세 번째,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 네 번째, 오늘은 무엇을 하였는가?
다섯 번째, 오늘은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너희는 자신에게 매일 다섯 가지를 질문하여라. 이것이 자기를 이기게
하고 인생을 살리게 하는 질문이다.”

나를 관리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나를 돌아보면서 더 나은 나를 만들며 살아갈 때
더욱 더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런 나를 원하실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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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거꾸로 찾아가는 행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6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The Sermon on the Mount

거꾸로 찾아가는 행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세상살이
하는 우리네 가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정신적 만족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주기보다는 받고 싶어 하고, 슬픔과
고통보다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바람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마음부터가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분명합니다.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세상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이고, 물질 중심과
인간 중심적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이
세상이나 인간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또한 물질의 소유나 육신의 쾌락과 욕구 충족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채워지고 그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멀면 그 사람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물건이
되어가겠지요. 먹고 마시는 것에 중독이 되면 영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만족을 정신없이 추구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말과 반응에 촉각을
세우고 살아가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길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고 또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를 참 행복으로 이끌어주심을 믿는다면 오늘 당장 내
삶의 방향과 사고방식을 ‘거꾸로’ 뒤집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이들 곧, 자비를 베푸는 이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건 분명 세상적 관점에서는 엄청난 손해요 바보짓이지요.

그러나 참 행복을 원한다면 세상 논리나 사고방식과 처세를 거슬러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핍박을 견디어내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때문에 거꾸로의 인생을 살려면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주님만이 내 행복의 원천임을 믿는 가난한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찾아가는 가난한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근원인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영의 가난을 자비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려면
먼저 자비를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자비는 우리의 허물을
씻어주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여, 자비를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사랑으로 표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헛되고 헛된 현세의 가치와 물질에 휘둘리지 말고 '거꾸로'의 행복을
찾는 복된 날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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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참으로 상대적인 행복과 불행
 
2016년 6월6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 5,1-12
 
참으로 상대적인 행복과 불행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5천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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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2016년 6월6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 5,1-12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진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사제성화의 날에 총대리
주교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제는 버스기사와 같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주교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버스기사는 승객을 골라서 태우지 않습니다. 사제는 혼자서 타는
고급 스포츠카의 주인이 아닙니다. 사제는 특별한 사람을 태우는
운전기사도 아닙니다. 사제는 모든 사람을 태우는 버스기사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제는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만 만나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 버스기사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서 운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일,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또한 사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제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본당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제가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버스기사가
정류장에서 승객을 태우듯이, 사제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정성껏 대해야
합니다. 특별히 힘들고, 지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셋째, 버스기사는 안전운행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정류장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버스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야할
노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객들이 안심하고 버스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건강도 잘 지켜야 합니다. 사제는 본당의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예산을
편성해야 합니다.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본당의 여러
단체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탁월한 설교가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농부출신의
많이 배우지 못한 신부님을 임지로 보내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강론은
잘하는지, 사목은 잘 할 수 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교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은 정성껏 미사를 집전하셨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신부님께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신부님처럼 정성껏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신부님처럼 열심히 기도하는 사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축복해 주십시오. 시골의 사제는
주교님께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제는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는
사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진복팔단’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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