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사랑과 투신을 통한 율법의 완성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8 06:11:12    조회 : 426회    댓글: 0

◈ [인천]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행하면서 기도하는 것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8,20-39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어떤 신부님과의 대화중에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께서는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벌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이 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제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만
생각하는데, 내게 이렇게 벌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울면서
기도하다가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미사참례도
종종 빠졌고, 기도도 잘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한 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게 벌을 주신 거예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자매님 스스로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벌은
암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이어서 치료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암 초기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벌을 거두어달라고 기도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으로 보았다는
사실은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하느님과 비교할 때 우리는 정말로 작은 개미처럼 미약한 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존재가 과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훤히 다
알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하느님께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했다고 일일이 혼을 내시는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뜻이 마치 하느님의 생각과 뜻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강조하셨던 것 역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무척이나
파격적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들추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보여주는데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세우시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내 뜻을 내세우면서 하느님을 잘못된
분으로 만들고 있나요?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의 모습은 기도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행하면서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인생은 이 세상에서 딱 한 번 살 수 있는 것.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과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이 있다면 지금 즉시 하리라. 다시는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위대한 도착’에서).

*****

거울에 비친 나

개 한 마리가 어떤 방에 들어갔다가 그만 갇히고 말았다. 그 방은 사방에
거울이 붙어 있는 방이었다. 개는 방 가운데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자기 주위를 둘러싼 개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있는 개들이 하나같이 사나운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댔다. 개는 두려움을 느끼고 움찔하여 바로 옆에
있는 개를 향해 짖었다. 그러자 그 개도 같이 짖었다. 그리고 다른 개들도
따라서 짖었다. 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른 개들은 가만히 있고 자기만
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사방에 사나운 개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한 개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달려도 다른 개들이 계속 따라오고, 빨리 달려도 다른
개들이 바짝 따라붙어서 도저히 따돌릴 수가 없었다.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는 쫓아오는 다른 개들을 따돌리려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끊임없이 제자리를 뛰어다니던 개는 결국 방 한가운데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 이외에 개를 쫓아온 것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 우화의 내용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우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이들을 통해 위험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쫓기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에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화에 나오는 개처럼 ‘거울의 방’에 갇혀 외부 세계와 인연을 끊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거울을 과감하게 깨뜨려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 [수도회] 사랑과 투신을 통한 율법의 완성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Teaching about the Law

사랑과 투신을 통한 율법의 완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하심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

예수님께서는 율법 그 자체의 구속력을 제거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하느님의 의를 위한 투신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뜻이 새롭게 밝혀지기 시작했고 그분과 더불어 충만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5,18-20).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잡다한
계율들을 원수 사랑(5,43-48), 황금률(7,12),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22,37-40)으로 환원시켜 단순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을 초월하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자유의지로 율법 아래에 낮추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곧
율법의 주요한 목표인 동시에 율법의 내용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질서가 필요한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이타적 사랑을 지향하는
우리이기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곧 언제나
사랑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론이요 인간이 만든 수많은 법규와
제도들은 공동의 선과 정의를 위한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이런 질서와 법과 제도가 담아내야 하는 혼은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와 선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서를 만드는 것도,
그것을 풀이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이기심과 탐욕이 끼어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한 법이고, 서로 잘 사랑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성경 말씀이며,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제도여야 하는데 그 가치 질서가
뒤집혀버리는 것이지요.

문제는 삶의 전반에서 드러나는 법실증주의, 엄격한 규범주의, 원칙주의,
형식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5,19) 율법의 효력은
하느님의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므로, 우리는 율법에 담긴 사랑과
정의와 선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상에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연대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며, 온갖 선이요 으뜸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성해나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나아가 인간을
억압하고 도구화하며, 특정한 집단들의 이기적인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체의
법과 제도, 법의 집행과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탄압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1열왕 18,39)
 
참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거짓 예언자는 은근히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요.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가짜 성인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급급합니다. 
참 예언자와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에
대중들이 자신을 환호하게 하지 않고 하느님을 연호하게 만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 제자로 불림받아
참 예언자요 성인의 길을 걷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과 행위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힘써 보지 않으시렵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을 연호하게 만들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 [서울]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 5,17-19

지인의 초대로 용산에 있는 미군부대엘 다녀왔습니다. 제가 처음 갔던 것은
군대를 제대한 1988년이었습니다.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미군이 초대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8년 전에는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방문을 하면서 예전처럼
놀라움과 충격은 없었습니다. 그동안 여행도 하였고, 우리사회가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시절, 미국은 따라가고 싶은 꿈이고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와 평등, 넘쳐나는 물건들, 국민의 손으로 대표를 뽑을 수
있는 민주주의,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는 자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새로운 발명, 아름다운 자연은 정말 따르고 싶은
꿈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메리카 드림은 또 다른 희생과 억압을 통해서 세워진
바벨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경제의 근간은 ‘군수산업’입니다.
이는 전쟁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많은 전쟁에 개입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총기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미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이윤이라는 날개를
가지고 날아갑니다. 경쟁에서 패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윤이 없는 곳에는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비단 아메리카
드림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꿈인 것 같습니다.   

지인은 1974년, 1988년, 2011년 이렇게 3번에 걸쳐서 한국에서 근무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은 10년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사회도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홍익인간, 삼강오륜, 인의예지’와 같은 아름다운 전통은 마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의 대화, 어른을
섬기는 마음, 약자에 대한 배려, 비움과 나눔의 철학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한국에서 지냈고, 한국을 사랑하는 이방인의
우정 어린 충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청주]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 5,17-19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청주교구는 사제피정중에 있습니다. 정진석추기경께서는 청주교구에서
당신이 서품을 주신 한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저서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습니다.' 을 선물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책에는 일일이
사제의 이름을 적고 싸인도 되어있었습니다. 각별한 애정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85세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주시는
모습에서 참된 사제는 성령의 도구임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어 사랑자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변하나 정리
못하면서 어떻게 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
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고
행하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