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마음을 다스려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9 06:31:27    조회 : 410회    댓글: 0

◈ [인천] 근본적인 치유가 먼저인 것입니다.

2016년 다해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렸다(야고 5,18).>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8,41-46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우애가 너무나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우애가 좋은지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말다툼 한 번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친구들로부터 옆집 형제가 재산문제로 서로 다퉜고 지금
전혀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동생은 깜짝 놀랐고 이
사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형제끼리 싸울 수 있는가
싶었지요. 그래서 자신이 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형에게 말했습니다.

“형님, 글쎄 옆집에 살던 형제가 재산분배 문제로 인해서 지금은 남처럼
산다고 합니다. 어떻게 형제끼리 그렇게 돈 문제로 싸울 수가 있는 거죠?”

형 역시 대답합니다.

“나도 그 얘기 들었다. 나도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정말로 돈
때문에 형제가 갈라질 수도 있다고 하더라.”

이 말을 들은 동생이 형에게 “형님, 우리도 한 번 싸워볼까요? 그래야
남들이 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집에 있는 빵 두 개로 한 번 싸워보자고 했지요. 동생이
말합니다.

“여기 빵이 두 개 있는데요. 이 빵은 모두 제 것입니다. 배고프다고 해도
형님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네가 가져야지. 네가 다 먹으렴.”

어떨까요? 싸움이 났을까요? 전혀 싸움이 날 수가 없습니다. 형이 “왜 네
빵이야? 나도 먹을거야!”라고 말했다면 말다툼이 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한쪽이 너무 쉽게 포기를 해버리니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바보나 멍청이라는 말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 같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의 말씀은 좀 너무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제에게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을 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앞서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옛 계명을 먼저 말씀하시지요. 이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죄의 뿌리부터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으면, 또 상대방에게 모욕이 될 말을 전혀
하지 않는데 어떻게 살인이라는 큰 죄악이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마치
앞선 이야기의 두 형제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예물을 봉헌하는 것보다도
화해가 먼저라고 하시지요. 근본적인 치유가 먼저인 것입니다.

죄의 뿌리를 과감하게 뽑아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익숙한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봐 주고
인도해 주는 것. 그리고 비록 보잘 것 없다 해도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다(앤서니 스토). 

*****

백설 공주 이야기에서...


백설 공주에서 계모는 거울을 향해서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런데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거울은 “백설 공주”라고 답을 합니다.
이때부터 계모는 백설 공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또 실행을 합니다.

비교하려는 마음이 백설 공주를 죽여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끔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비교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요? 비교할 수 있어야 성장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교하는 마음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 시기심을 만들었고, 시기심이 확대되어서
사람을 죽이려는 끔찍한 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비교하면서 좋아하면
‘사육’이 된다고 하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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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의무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 5,20-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Teaching about anger

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의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성불가침적 가르침인 율법을 전권의식을
가지고 비판하시면서 한층 더 심화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탈출 20,13) 지키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뜻을 다 한다고 볼 수 없으며, 분노,
증오, 멸시, 혐오(집회 28,11)와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5,20)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보다 더’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한계치는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하느님 앞에서 소극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고 심판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형제처럼 더욱 더 사랑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사랑의 방식은 자발적이고 조건 없이 내어주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나누는 ‘다함없고’ ‘그침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기에 ‘더욱 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인간적인 잣대로
계산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존중하고 '더욱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보다
더’의 사랑이기에 섬세한 사랑의 감각이 요청됩니다. 곧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사소한 언행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소한 미움의 감정과 불편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불꽃처럼 이는 분노라면 자신이 지고 가기에 버거워서도
빨리 내려놓지요. 그러나 작은 것들은 애써 외면하거나 덮고 지나가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영성생활에 있어서는 늘 그 작은 틈이 영혼을
망치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까지도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존중해주는 예민한 사랑의 감각을 키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습관을 멈춰야 합니다. 사랑도 선을
행하는 것도 하느님의 방식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품어 그분과 화해하고,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은 곧 인간을
참된 사랑으로 찾는 마음임을 상기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섬세한
사랑의 감각으로 ‘보다 더’의 사랑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죄를 짓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더 사랑할까를 고민하는 능동적 사랑의 전파자가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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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여러분은 성을 잘 내시는 편인가요?
거울을 한번 쳐다 보세요. 어떠세요?
온화하고 편안한 얼굴인가요?
아니면 찡그리고 무뚝뚝한 모습인가요?
거울을 쳐다보고 화장을 할 때는 그렇게 온화하고 아름다운 얼굴인데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밝고 온화한 모습은 사라지고 찌푸리고 화가나고 짜증스런
그런 얼굴이 되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형제에게 성내지 말고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네요.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그렇게 하면 지옥, 연옥을 겪게 될 거라네요.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이 설혹 내 맘에 안든다 해도
성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는 절대 하지맙시다.
알았죠?
 
천국과 지옥은 내 얼굴이 맑고 밝으냐
어둡고 분노로 차 있느냐로 드러납니다. 
오늘 천국의 기쁨을 형제들과 나누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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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이번 연휴에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웠고, 여행을 즐겼습니다. 저는 모처럼
명동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아침을 먹고 약간의 운동을 합니다. 책을 읽고, 점심을
먹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책을 읽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예매한 영화를 관람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여유를 가지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유가 있어서인지 빈자리를 대신 채워드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그림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위작이니 대작이니 말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림을 그림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노인께서 한국화를 감상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화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첫째, 원근이 잘 나타났는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구도가 잘 잡혀있는가? 산과 강, 나무와 배, 꽃과 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선이 뚜렷하게 보이는가? 강과 산의 경계, 하늘과 산의 경계 땅과
물의 경계가 뚜렷해야 한다고 합니다.

넷째, 명암이 잘 드러나는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잘 표현 되어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섯째, 여 - 백이 있는가? 여백이 아니라 여 - 백이라고 하시더군요.

이 다섯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 잘된 그림이지만 작품은 아니라고 합니다.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아, 묘, 신’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는 선비
아인데 그림에 품격이 있어야 하고, 묘는 그림에 평범함을 넘어서는 묘함이
있어야 하고, 신은 그림에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3가지가
그림에 있으면 비로소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이야기 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 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외모, 능력, 재산, 명예,
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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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마음을 다스려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마음을 다스려라.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성경 한 구절 더 읽겠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4,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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