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6일 선과 사랑을 키워가는 하느님 나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26 06:28:15    조회 : 45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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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7월26일 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수도회] 선과 사랑을 키워가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14,17ㄴ-22 † 복음 마태 13,36-43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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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때로는 비록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늘 필요한 곳에는 필요한 도구를, 필요한 사업에는 이에 맞는 사람들을 보내 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지혜를 공경하던 교회의 신심이 바로 예수님의 외조부모이며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공경으로 이어집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는 2세기경에 쓰인 신약의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나타나는데, 동방 교회에서부터 아기가 태어나면 그 부모에게 특별히 축복하던 전통에 따라 성모님의 부모인 두 성인을 공경하는 축일을 제정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이 세상이라는 밭에 좋은 씨를 뿌리십니다. 따라서 이 씨앗을 잘 키운 농부가 칭송받아 마땅하듯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녀를 훌륭하게 잘 키워 낸 부모 또한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아 주신 성모님을 우리가 공경하듯이, 그 성모님의 부모 또한 공경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좋은 씨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악마가 뿌린 가라지도 함께 자랍니다. 하느님께서 인내하시는 분이시지만, 악을 받아들이지는 못하시므로 결국에는 가라지를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시켜 하실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들도 하나의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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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스스로 재판관이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주님,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4,17ㄴ-22 복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갑곶성지에는 오전 11시 미사가 매일 있고, 수요일부터 주일까지는 오후 미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 미사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습니다. 10명도 채 되지 않는 분이다보니 봉사자들에게 미사 해설과 반주를 부탁하기가 미안해서, 제가 직접 기타 반주를 하면서 미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도 안 됩니다. 저의 기타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물론이고, 더군다나 저는 노래도 엄청 못 부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정말로 얼굴이 두껍다고 생각될 정도로 뻔뻔한 신부님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타를 치는데 기타 줄이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신부님의 노래는 세상에 이런 음치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합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저 신부보다는 괜찮지 않았어요?” 자신이 기타를 잘 치는지 못 치는지, 또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못 부르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신부보다는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 신부를 오히려 판단을 하고 있더군요. 저희들이 보기에는 둘의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둘 다 형편없는데 말입니다. 언젠가 오랫동안 냉담하신 분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성당에 오랫동안 나가지 않았지만, 성당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재판관이고, 판단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로 내 자신이 재판관이고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삶에 유일한 심판관이며 판단의 기준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려고 할 때,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시는 길을 쫓아온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제자들 외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은 굳이 쫓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표징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니 죽어서 갈 하늘 나라의 신비는 관심사가 아닌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내세웠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판단의 기준을 두고, 주님 뜻을 따르려 한다면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려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재판관이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는 우리의 영역이 아닌 주님의 영역임을 기억할 때,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고 따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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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람된 일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며, 사람이 거기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기쁨이 아니다(알랭).
20160726_01.jpg 강아지도 요즘의 열대아가 힘든가 봅니다. 물통에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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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을 가꿀 것인가? 자신의 몸을 엄청나게 다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형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헬스클럽 등의 운동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기위한 뷰티샵, 그밖에도 몸을 가꾸기 위한 시설 등이 참 많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공들이면 뭐해요? 어차피 언젠가 죽게 되면 벌레들의 먹잇감이 될 건데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죽어 땅에 묻히게 되면 결국 벌레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요. 그런데 영원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내 영혼을 가꾸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이 세상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늘 나라에서의 내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20160726_02.jpg 갑곶성지는 또 공사 중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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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선과 사랑을 키워가는 하느님 나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마태 13,36-43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 13,40)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of the weeds 선과 사랑을 키워가는 하느님 나라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가라지의 비유 마지막 구절(13,30)에 대한 우의적 해설(13,37-39)이고, 뒷부분은 ‘사람의 아들’에 의한 최후 심판에 대한 언급입니다(13,40-43). 이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해설이 아니라 아마도 마태오의 해설일 것으로 봅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안에서 성실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는”(13,38) 영광을 입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의 나라’, 곧 세상에서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13,41-42).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고 죄인들이 하느님께 인도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우의적인 해석은 최후심판 곧, 하늘 나라의 완성에 대해 세 가지 교훈을 전해줍니다. 첫 번째 교훈은 악이 힘을 떨치고 늘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산 의인들은 영광을 입고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줍니다. 따라서 악의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악인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짓눌리며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여도 그 때문에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악을 통해서는 하늘 나라를 완성할 수 없으며 악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비할 수 없이 약한 실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심판자는 우리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시니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에게 의롭게 세상을 심판하도록 맡겨주셨습니다(사도 17,31). ‘사람의 아들’은 심판하신 다음 나라를 아버지께 맡기실 것입니다(마태 25,34 참조). 그러니 우리 스스로 악인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내 힘으로 처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는 주님의 선과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거나 불의를 저지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선을 행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그분 친히 우리 마음에 좋은 씨를 뿌려주셨기(13,37) 때문입니다. 마지막 교훈은 주님의 심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선과 사랑 안에 머물며 회개를 서두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의 파견으로 심판이 이루어진 셈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마지막 오심 사이의 때를 살면서 하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려주시는 주님 자비의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은 ‘은총의 때’(카이로스)요, 주님께서 은총으로 뿌려주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키워가는 때입니다. 선과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교회 안에, 가정에,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 사랑과 선이 커가고 빛을 발할 때 가라지가 뿌리 내릴 땅이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반드시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선을 실행하는 의인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악인에 대한 단죄나 분노를 할 시간에 오히려 선과 사랑을 더욱 더 키워가고 정의를 위해 헌신했으면 합니다.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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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레 14,22) 여러분은 어떤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셨나요? 아직 살아 계시나요? 아님 벌써 돌아가셨나요? 내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애지중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키워놨는데 나는 부모님 보시기에 참 대견하고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울까요? 대부분의 우리네 부모님들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 우리를 낳아 기르시면서 많은 고생을 하신 분들이지요. 그러다보니 마음만큼 실제적으로는 내가 만족할 만하게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늘 죄인이라 여기시기도 하지요. 성모님의 부모님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부모님의 영예는 자식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지위에 있는 부모라도 자식이 시원찮으면 빛을 잃어버립니다. 반면 아무리 보잘것 없어보이는 부모도 자식이 훌륭하면 영예와 존경을 받아누립니다. 자식농사를 잘 한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부모님이 보시기에 자식농사 잘 지은 자녀인가요? 또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을 영예롭게 만들고 있나요? 성모님의 겸손과 순종의 삶은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인 요아킴과 안나도 세세에 기념토록 만들었으니 성모님이야말로 효녀중의 효녀이십니다. 오늘 나의 부모님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셨으니 내가 올바르고 훌륭한 삶을 살아 그분들이 존경과 영예를 누리시도록 다짐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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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 43) 한상우바오로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 43) 스스로의 힘에 의지했던 우리가 이제 믿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녕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가장 아픈 곳에서 피어나는 가장 진실된 꽃입니다. 믿음은 또다른 믿음을 낳습니다. 믿음은 서로를 도와주고 더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믿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마다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믿음을 받아들이셨던 성 요아킴과 안나처럼 믿음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열매는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여정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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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자유만 알고 책임을 모르면 2016년 다해 7월26일 (화) 자유만 알고 책임을 모르면 인생운전에는 간과할 것과 꼭 알아야할 것들이 있다는 것 알아야합니다. 정의가 있고 불의가 있다면 양심은 녹색 적색 신호를 이미 감지합니다. 자유라고 하겠지만 자유의 한쪽 면은 책임이라는 건 대자연 질서입니다. 자유만 알고 책임을 모르면 덜 떨어진 사람,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 자유를 주신 하느님이 책임도 주셨는데 그걸 모르겠다면 말도 안돼죠.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면 거두어 불속에 넣는댔어요.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3,42~43)” 내 기분위주의 전후좌우 운전 무시에 갖가지 인생사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속 속된 힘이 자유인 줄 아는 국회 사장 검사 이러니 항상 사고 나지요.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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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평소에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이유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 독서: 예레 14,17ㄴ-22 < 평소에 하느님 닮아야 하는 이유 > 영국에 있는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이 청년의 수상한 거동을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명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어린이들은 아주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림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아마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좀처럼 눈높이를 높이려 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나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판단합니다. 조금만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하느님은 나를 미워한다거나 버리셨다거나 벌을 주신다고 판단해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나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곧 지금 살고 있는 나의 모습임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내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그렇다고 생각하여 ‘이런 죄는 용서 받을 수 없겠지’하며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하느님까지 평가하기에 하느님처럼 완전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을 보며 자칫 그분을 잘못 평가하고 구원에서 멀어져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 기도를 바칠 때는 유다지방이 전대미문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가뭄에 굶주림과 병듦, 도둑질과 싸움질로 온 유다지방이 지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 하며 주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너무나 큼을 한탄합니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 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그런 벌을 받는 것이라 여깁니다.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이 앉아계신 옥좌를 위하여, 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위하여, 또한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은 이 모든 시련에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비를 다시 내리게 하실 분임을 믿고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라고 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하느님은 절대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두실 분이 아니야!’ 라는 굳은 믿음이 기도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 전적인 신뢰는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닮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이 정도는 지켜주는데 하물며 주님이야!’라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약속도 잘 어기는 사람이었다면 주님도 그러할 분으로 여겨서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며 계약을 쉽게 파기하는 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주님을 끌어내립니다. 이렇듯 전적인 신뢰와 믿음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처럼 완전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주님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히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처럼 되느냐고 포기하기 이전에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자주 내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마지막 시련까지 잘 이겨내고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믿게 되어 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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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인생의 끝에 서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26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 13,36-43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방황도 안주도 아닌 순례의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10_1.gif ♬ 가톨릭 성가 190번 지존하신 성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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