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6일 나를 키우는 사랑의 고통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8-06 06:29:31    조회 : 422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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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8월6일 토요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수도회] 나를 키우는 사랑의 고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7,9-10.13-14 † 복음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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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빛나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그 죽음을 끝내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지요. 또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영광의 자리에만 머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이런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지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맛보려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루하루 많은 십자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고통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역시, 이런 덧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시며, 우리의 삶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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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우리는 지금 주님의 빛을 따르고 있을까요? 2016년 8월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또는 2베드 1,16-19> 복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자동차 사고가 나면 이 사고에 대한 기억을 대처하는 모습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즉, 두 번 다시는 사고지점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과 사고지점을 다시 가보겠다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먼저 사고지점에 가지 않겠다는 부류는 아주 오랫동안 그 사고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사고지점에 가까워지면 괜히 몸이 떨리고 식은땀도 나게 되지요. 반면에 사고지점을 다시 가보겠다는 부류는 실패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떤 경우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훨씬 더 유리할까요? 당연히 후자의 경우인 사고지점을 다시 찾아가는 부류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자의 경우인 사고지점을 다시 찾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쫓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얻은 아픔과 상처를 지금 이 순간에도 떨치지 못해서 계속해서 어려움과 힘듦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지금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게 되면 이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자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 과연 내 자신의 어떤 성장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예전에 신학생 때에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어 엄청나게 고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해가 지자 너무나도 어두워서 산을 내려가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맞게 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힘들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쉬고만 싶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일행 중의 한 명이 멀리서 자그마한 불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불빛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래야 숲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을 향해 멈추지 않고 과감하게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빛을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전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힘든 세상 안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좋았나 봅니다. 하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초막 셋을 짓겠다는 말까지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좋은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편하고 쉬운 길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이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빛을 따르고 있을까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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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늘 실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하이럼 스미스).
20160806_01.jpg 타볼산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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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느리가 시부모께 보낸 편지와 시어머니의 답장(인터넷에서 퍼온 글) 먼저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보세요. 우리는 당신들의 기쁨조가 아닙니다. 나이 들면 외로워야 맞죠. 그리고 그 외로움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요. 자식 손자며느리에게서 인생의 위안이나 기쁨이나 안전을 구하지 마시고 외로움은 친구들이랑 달래시거나 취미생활로 달래세요. 죽을 땐 누구나 혼자입니다. 그 나이엔 외로움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고 나이 들어서 젊은이와 같이 살려하는 게 어리석은 겁니다. 마음만은 청춘이고 어쩌고 이런 어리석은 말씀 좀 하지 마세요. 나이 들어서 마음이 청춘이면 주책바가지인 겁니다. 늙으면 말도 조심하고, 정신이 쇠퇴해 판단력도 줄어드니 남의 일에 훈수드는 것도 삼가야하고, 세상이 바뀌니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남보다 특히 젊은 사람보다 많이 알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편견도 버려야합니다. 나이 든다는 건 나이라는 권력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이 소멸해 간다는 걸 깨닫고 혼자 조용히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화를 몇 개월에 한 번을 하든, 1년에 한 번을 하든 아니면 영영 하지 않아도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세요~ 그것 가지고 애들 아빠 그만 괴롭히세요! 마지막으로 이번 설날에 승훈이랑 병훈이 데리고 몰디브로 여행가니까 내려가지 못해요. 그렇게 아시고 10만원 어머니 통장으로 입금해 놓았으니 찾아 쓰세요. 그러자 시어머니께서 이런 답장을 하셨다고 하네요. 시어머니의 답장 편지 내용.. 고맙다. 며느라... 형편도 어려울 텐데 이렇게 큰돈 10만원씩이나 보내주고.. 이번 설에 내려오면 선산 판 거 90억하고 요 앞에 도로 난다고 토지 보상 받은 60억 합해서 3남매에게 나누어 줄랬더니.. 바쁘면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냐? 둘째하고 막내딸에게 반반씩 갈라주고 말란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여행이나 잘 다녀와라. 제사는 이 애미가 모시마. 부모님께 잘 합시다.
20160806_02.jpg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성당.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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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나를 키우는 사랑의 고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8월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루카 9,29)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나를 키우는 사랑의 고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더운 날씨 속에 긴 여행으로 지친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맞으실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9,29-31).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그 놀라운 영광의 빛에 감싸여 잠에 빠져들었습니다(9,32).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숱한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보면서도 여전히 미지근한 신앙, 의심, 대립, 피곤함에 머물렀던 그들에게 모처럼 평화가 찾아든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33)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오랜만에 꿀맛 같은 휴식과 평화를 맛보자 거기에 계속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고통과 아픔, 차별과 배척, 의심과 갈등이 있는 세상 안으로 내려가지고 재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역설'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오직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과 행복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서의 영광스런 변모는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 곧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신비를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 죽음의 수치심을 극복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 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영광과 기쁨은 시련과 고통 끝에 주어지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삶을 행복의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을 겪어낼 때 주어집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라 큰 사랑을 체험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힘들고 피곤한 나날의 삶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향하여 눈을 뜨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믿는 마음으로 멀리 봐야 합니다. 제자들이 올라갔던 높은 산을 바라보며,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야겠지요. 우리가 지고 가야 할 많은 짐들이 바로 우리 삶의 한 부분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씨앗이기에 소중히 품어 안아야 할 것입니다. 매순간 영광과 희망과 사랑의 산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 산에 먼저 오르신 예수님 친히 우리를 기다리시며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에게 고통을 직면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초대입니다. 우리 다함께 작은 어려움, 고통을 받아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한 행복의 산으로 부르시는 그분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네 힘들고 고통스런 삶 구석구석에 함께 계시는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모두 산에서 내려갑시다. 일상의 삶이 어렵고 고달파도 사랑이신 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우리네 현실의 삶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맡기며 서로 어깨를 맞대며 그분께로 나아갑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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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8월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9)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일까요?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나요? 머리를 새로 하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멋진 새옷을 장만해 입고 그럴 때가 아름답지요. 그러나 사람이 진짜 아름다울 때는 기도하고 난 후가 아닐까요? 깊이 기도하고 난 후의 수행자의 모습은 맑고 티없는 순수 영혼의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모든 번뇌와 근심걱정을 다 내려놓았으니 맑고 청아한 피부와 눈매,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한 마음이 풍겨내는 향기야말로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멋져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도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였답니다. 기도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나요?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시나요? 그래서 온갖 미용에 좋다는 음식이나 화장품에 관심이 많으시나요? 그보다 기도하는데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해 보세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관상하는 이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답니다. 오늘 기도 후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흐뭇해 하시는 기쁨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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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8월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우리 예수님께서는 거룩함을 자연스레 실천으로 옮기십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 먼 마음을 열어 거룩한 변모를 보게해주시는 분도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는 것에서 거룩함은 시작됩니다. 거룩함이 시작되는 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안에는 하느님만 있을 뿐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 자녀들인 우리의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깨우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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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16년 8월6일 토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 9,28ㄴ-36 고모님의 팔순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어머니께서 꼭 가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의 운동장이 크게 보인 것처럼, 고향의 어르신들은 높은 산과 깊은 바다와 같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이제는 몇 분 남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래서 더욱 가고 싶어 하셨는지 모릅니다. 고향에서 사촌들을 만났습니다. 일찍 서울로 올라온 저는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사촌들도 이제는 모두 50대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중년의 넉넉함이 보였고, 흐르는 시간 앞에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어떤 이는 저처럼 사제가 되었고, 어떤 이는 작은 사업을 하고 있고, 어떤 이는 선생님이 되었고, 어떤 이는 삶의 풍파를 겪었고, 어떤 이는 몸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예전 어르신들 보다는 풍요롭고, 넉넉한 삶을 사는데, 예전 어르신들보다 마음의 여유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같은 신앙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로병사, 흥망성쇠, 희로애락은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성입니다. 연어가 넓은 바다로 나갔다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이, 우리는 하느님께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알아야합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욕심, 욕망, 이기심 때문에 추하게 변하는 것을 봅니다. 법을 집행하고, 법의 이름으로 변호하고, 법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암행어사가 비록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몸속에는 임금의 명을 수행하는 ‘마패’를 가지고 다니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되시어 신적인 권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오늘 ‘거룩한 변모’를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제자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늘 제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모습을 따라하면서 어느덧 성장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할지라도 그들 안에 있는 가능성을 키워주십니다. 그런 스승이 참다운 스승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믿고, 사랑의 물을 준다면, 나눔의 거름을 준다면, 믿음의 빛을 비추어 준다면 그들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불신, 분노, 미움의 잡초를 뽑아준다면 그들은 모두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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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_1.gif ♬ 시인과 농부 (Poet and peasant Overture -Suppe, Franz V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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