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 주님의 등불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9-19 07:17:24    조회 : 43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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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9월19일 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수도회]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잠언 3,27-34 † 복음 루카 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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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등불을 켜는 이유는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얹어 둡니다. 될 수 있는 한 빛이 더 멀리 비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등불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실천하면 빛이 사람들을 비추게 되고,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9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등불을 자신과 이웃에게 비추게 됩니다(요한 8,12 참조). 어부는 먼 바다에서 그물질을 끝내고 항구로 돌아오다가 등대의 빛을 보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어부에게 빛은 편안한 안식입니다. 우리에게도 빛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새해에 많은 사람들은 해맞이를 하러 갑니다. 순례자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을 보고 모세 성인이 보았던 하느님의 빛을 연상합니다. 신앙의 빛은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비추고 기쁨을 발산시킵니다. 그 빛은 은총을 몰고 오고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그 빛은 사라지고 불안과 괴로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신앙의 빛을 끄지 않도록, 그 빛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이 세상의 풍파와 고뇌 가운데에서도 은총의 빛을 계속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고 어두움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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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의 말씀이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 ○ 잠언의 말씀입니다. 3,27-34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6-18 제가 자주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인천 시내를 나갈 일이 있을 때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그런데 지난 한가위 연휴 때였습니다. 신부님들 모임이 저녁 6시에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가 오후 4시가 안 되어서 성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큰 일 났다 싶었습니다. 평소에는 1시간이면 충분히 갈 거리가 명절 연휴로 인한 정체가 너무나 심했던 것이지요. 왜 이렇게 차가 많은지, 또한 계속해서 자기 앞으로 다른 차가 끼어들기를 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앞 차에 대한 불만도 커졌습니다. 명절이기 때문에 막힐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저의 정신없음 역시 불만의 대상이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들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부님들과의 약속 자체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까지 이 길을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 이렇게 길이 막혔던 적은 이번 딱 한 번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딱 한 번 길이 막혀서 운전을 오래하고 있을 뿐인데 뭐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은가 라는 마음을 먹으니 그런 생각을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하긴 어떤 분이 자기가 지나가려고 할 때면 매번 신호가 바뀌어서 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호체계를 잘못 만든 것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실제로는 절반 이상을 파란 불을 만나서 그냥 통과하게 된다고 합니다. 많이 신호에 걸려서 차를 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통과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음을 바꾸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인 마음,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걷어내었을 때, 분명히 기쁨과 행복이 나와 함께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하지요. 등불은 주위를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다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우리 모두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 각자가 갖는 부정적인 마음들,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 등이 주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퍼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께 더 큰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갈 것이고, 그로인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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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우리에게 다양한 마음을 선물했지만 공존해야 할 단 하나의 세상을 주었다. 서로의 공통점을 축복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조나단 삭스).
20160919_01.jpg 순교자 현양대회 미사를 위한 제단과 그늘막 설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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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내일 있을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로 며칠을 계속해서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미사 중에 순례를 오신 순례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으로 부탁을 드렸지요. “요즘에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 때문에 정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이 현양 대회가 잘 진행되고 참석한 모든 이들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어제는 특히 바빴습니다. 제단 설치와 미사 때 뜨거운 태양을 막을 그늘막을 설치하느라 미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행사장에 있었지요. 그리고 오후 미사 시간 전에 사무실을 들어갔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어떤 형제님께서 전날 미사 때 기도해달라는 저의 말을 듣고는 아침 일찍 성지에 오셔서 구석구석을 청소, 정리정돈, 그리고 수리까지 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점심도 드시지 않고 하루 종일 성지에서 혼자서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직원이 이름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말없이 일하시다가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큰 감동이었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교회가 더욱 더 발전하고 주님의 뜻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내 자신을 알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알아주는 것보다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 멋진 모습이 아닐까요? 하루 종일 봉사해주신 형제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20160919_02.jpg 순교자 현양대회 준비가 착착 되고 있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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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루카 8,16-18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 8,18)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느님 나라의 영적 원리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역설적인 삶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진 자’는 누구이며,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요? ‘가진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늘 나라의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의 지식이란 이성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체험적 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진 자’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닌 자요, 말씀의 진리를 삶의 실천으로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더욱 온전한 지식을 얻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진 자’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는 사람이기에 정녕 ‘하느님 외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애착으로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진정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는 ‘가진 것이 없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적 이치를 따르는 ‘가진 자’는 듣는 자세도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실천하는 '가진 자'는 더욱 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자’는 빛(요한 1,9; 8,12)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8,16),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드러나게 활약하시겠다는 결의를 나타내셨던 예수님처럼 행동과 말로 선포합니다. 누구든 말씀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춤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곧,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말며,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포악한 사람의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3,27-31)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닌 믿음과 사랑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세 등이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청지기의 비유(루카 19,11-27)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축복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은총과 은사의 선물들을 충실히 관리하고 주님의 뜻대로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의 것들은 지니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현세의 모든 것들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의식과 지향입니다. 현세의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 되돌리고 이웃과 나누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소유는 영원하지 않아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으니 즉시 나누고 선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잠시 멈춰,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영의 가난, 믿음과 말씀을 경청하고 선을 실행하지 못한 채, 가진 것마저 빼앗기며 살아가는 가련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맑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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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잠언 3,27-28)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요. 추석 동안 우리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정을 나누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졌지요. 사실 매일 그렇게 어른들도 찾아뵙고 작은 선물도 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고 놀며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게 뭔지...? "뭐가 중한디?"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잠언의 말씀이 마음을 울리네요. "가능하면 나누고 살고 도우며 살아라.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네요. 맞지요. 그리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게지요. 내 욕심만 챙기며 산다고 때부자가 된 것도 아닌데 나누고 사는 삶이 참부자로 사는 길이겠지요. 오늘 내가 도와야 할 일이 보이거나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보거나 알게되면 망설이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봅시다. 그리 하실꺼죠?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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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 8,16-18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상습 피로와 열두 서너 가지 고민꺼리들, 누적된 스트레스로 가득 했던 어느 날 새벽,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적합한 형용사를 떠올려보니 여러 가지였습니다. ‘게슴츠레’ ‘우중충’ ‘누리끼리’ ‘꼬질꼬질’ ‘흐리멍텅’... 부랴부랴 세면을 하고 한 수녀원 새벽 미사를 드리다가 한 A급 애기 수녀님의 얼굴을 봤는데,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초롱초롱’, ‘샤방샤방’, ‘생기발랄’ ‘총기 충만’한 얼굴로 미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잘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복음 8장 16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 같은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짙은 암흑 속에 빛이 되어주는 사람, 심연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밝고 화사해야 마땅한데, 참으로 어둠이 짙습니다. 암담하고 팍팍합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표정들은 마치 좀비들처럼 퀭하고 음산합니다. 순간순간 셀 수도 없이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사고들은 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듭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우리 봉헌생활자들이 빛나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생명의 광채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영혼의 등불에 성령의 심지로 불을 밝혀야겠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동적 공격의 명수들입니다. 차라리 힘들면 힘들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표현하면 좋겠습니다만 용기 부족으로 그러지를 못합니다. 대신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는 내면의 메시지를 자신의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닙니다. “내가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해?”라고 말하지 않고 엉뚱한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최근 가톨릭교회 종사자들의 딱딱함과 불친절에 크게 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울적하고 어두운 얼굴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이 제대로 전달이나 되겠습니까? 심각하고 울적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누가 그 사랑과 자비를 믿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정 관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울적한 표정 짓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는 얼굴로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더 자주 미소를 지어야겠습니다. 더 자주 화사하게 웃어야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지하 골방에서 웅크려있지 말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와 외쳐야겠습니다. “저를 한번 보십시오. 제가 곧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제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 삶을 한번 보십시오. 제 삶이 곧 살아있는 복음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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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뚤어진 자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 > 독서: 잠언 3,27-34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 심심풀이 화풀이 상대는 다른 연인들, 괜히 시비 걸어 동네 양아치처럼, 가끔 난 삐딱하게 다리를 일부러 절어, ... 너 하나 믿고 마냥 행복했었던 내가 결국엔,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버려 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지드레곤이란 유명한 대중가수의 ‘삐딱하게’란 노래 제목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다 비뚤어진다는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가사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던 일이 잘 안 되고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망가져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니 큰일입니다. 비뚤어진 자는 그렇게 살면 나에게 더 손해이고 더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굳이 선택해서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손목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약을 져 주고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그런 불친절한 의사가 준 처방대로 지은 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달 넘게 고통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지 못하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지며 짜증도 많이 났다고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 병원을 찾았는데 여전히 같은 의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친절하게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을 받는데 물리치료사는 자신에게 매우 친절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약 한 번 먹었더니 80%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 약 한 번 먹었으면 되는 것을 나는 왜 그것을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고생만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삐딱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은 의사의 성격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되는데 사람까지 판단하다보니 고통을 알고도 참아야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 화살을 쏘았으면 그 화살을 뽑을 생각은 안 하고 누가 쐈는지 먼저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굳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고통 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는 고통도 겪어 낼 테니 미워하게만 해 달라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삐딱한 삶입니다. 따라서 오늘 독서 잠언 말씀에서는 마음이 삐딱한 이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고통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이 말씀 바로 뒤에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고 하시고 또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비뚤어진 악인은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빈정대는 자들”이지만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빈정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라 올곧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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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 8,16-18 추석 연휴가 끝났습니다. 조카가 삼촌 신부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태어났으니 조카도 나이가 제법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즐거워하는 조카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용돈을 받았습니다. 한참 일을 하면서부터 어르신들에게 용돈을 드렸습니다. 이제 저도 용돈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른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추석날 아침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밥이 되지 않았습니다. 밥통의 전원을 눌러야 하는데, 깜빡했던 것 같습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밥을 하려면 40분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 ‘햇반’을 먹곤 했습니다. 햇반을 먹자고 제안을 했고, 조카는 곧 햇반을 사왔습니다. 자칫 우울할 뻔 했던 추석아침이 ‘햇반’으로 밝아졌습니다. 하긴 추석은 햇곡식을 먹는 날이니 ‘햇반’을 먹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핀란드의 끝없는 도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작은 국가인 핀란드가 국가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교육제도’라고 합니다. 핀란드 교육의 핵심은 선택과 경쟁이 아니라 평등과 협력이라고 합니다. 교사들의 자율과 전문성을 키워주고,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으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꿈을 대신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녀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핀란드에서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직업은 ‘교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사들의 자부심이 크고,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핀란드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 폰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과속 방지턱도 알려주고, 과속 단속구간도 알려주고, 막히지 않는 길로 가도록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은 많은 보물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많은 애플리케이션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줍니다. 저도 일기예보, 지하철 노선, 버스 노선, 신문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은 신앙인으로 이끌어 줄까요? 어릴 때 읽었던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거센 힘이 있었지만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남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해주고, 진리의 빛을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웃들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빛, 믿음의 씨앗을 함께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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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믿음은 말씀대로 사는 데서 드러납니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 8,16-18 믿음은 말씀대로 사는데서 드러납니다.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 (야고 2,17)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추구합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 (루카8,16).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만큼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합니다.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는 날들 이루시길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267번 성모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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