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0-17 07:13:48    조회 : 42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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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걷는 인생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2,1-10 † 복음 루카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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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공감 백배 울려 퍼집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 방식의 명확한 두 가지 형태를 규명한 바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 것으로 소유하고, 내 뜻이 관철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사는 인간이, 소유적 본능에서 벗어나 ‘존재’, 곧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고, 애초부터 내 소유란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소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우리 시대에 경종이 됩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는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의 대가라고 여기고, 더 큰 곳간을 지어 재산을 쌓아 두고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려고 합니다. 분배의 정의보다 부가 부를 창출해 내고, 부의 대물림이 현실화된 우리의 천민자본주의의 현실이 예수님 시대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랍기만 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기적 소유의 본능을 이겨 낼 수 있는 나눔의 이타적 삶이 있다는 점입니다. 부자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쌓은 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는, 육의 욕망과 감각에 따라 사는 우리가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때 세상 것들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것임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보다 나를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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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10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21 요즘에 성지에는 순례객들이 많이 방문하십니다. 특히 주말에는 그 숫자가 너무나 많아서 정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시겠다는 순례객들에게 “사람 많으니 오시지 마세요.”라면서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처음 오시는 순계객들에게는 복잡하고 정신이 없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제도 정말로 많은 순례객들이 오셨습니다. 성당 안의 보조 의자까지 다 앉으셨고, 성당 밖의 좌석까지 이용해야 할 정도였지요. 이렇게 많은 순례객의 숫자에 놀라신 것은 물론이고,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순례를 할 수 있을 지가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그래서 성지의 직원들에게 몇몇 분들이 항의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솔직히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순례 오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조용한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순례를 원하셨을 테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이 많다보니 성당 안이 시끌벅적했고, 여기에 비가 곧 올 것처럼 날씨도 많이 흐렸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더군다나 미사 후에 있을 식사도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못할 것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시고는 모두가 기뻐하셨고, 미사 후의 식사도 질서정연하게 잘 하셨습니다. 식사 후에는 각자 성당으로 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되면 우리의 사고는 더 이상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거나 아니면 더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볼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나만의 만족을 위한 것, 나와 관계된 이들의 만족만을 위할 때에는 결코 좋은 생각과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오늘 어떤 이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형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독차지 했나 봅니다. 동생의 입장에서는 형의 그런 행동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을 했고, 그 억울함을 주님께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런데 형 역시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유산 때문에 형 자체를 못된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동생의 모습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형 역시 유산에 대한 소유로 동생을 아프게 한 것 역시 잘못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나만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처럼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것에 대한 탐욕에 가득 차 있는 사람보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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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을 진정으로 위하고 남이 잘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까?' 고민하는, 그런 선한 마음은 나를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잡념도 없어지고, 보약이 따로 없습니다. 오늘 기분이 나쁘다면 비록 작은 일이라도 누군가를 도와줄 생각을 하십시오(혜민 스님).
20161017_01.jpg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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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잡초 어느 스승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들판에는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이 잡초들을 없앨 수 있느냐?” 제자들은 땅을 갈아엎는다, 잡초를 불로 태워버린다, 뿌리째 잡초를 뽑아버린다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말에 스승님은 각자가 말한 대로 자기 마음에 있는 잡초를 없애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1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살아가면서 마음의 잡초를 없애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갈아엎기도 힘들었고, 마음의 잡초를 불로 태워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뿌리째 마음의 잡초를 뽑아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마음을 가지고 1년 뒤에 다시 스승님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잡초가 가득한 들판을 찾았지요. 그런데 잡초로 가득했던 그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풍요로운 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스승님은 안 계시고 스승님이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잡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믿음, 희망, 용서, 기쁨 등의 곡식 등을 심었을 때 마음속의 잡초를 없앨 수 있다.” 무성히 자라고 있는 마음의 잡초가 있지 않습니까? 탐욕, 허영, 이기심, 시기심, 미움과 판단 등의 잡초가 내 마음을 얼마나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마음의 잡초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이라는 곡식을 통해서만 내 마음 속 잡초가 사라질 것입니다.
20161017_02.jpg 마음의 잡초를 깨끗이 없앨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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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걷는 인생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루카 12,13-21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걷는 인생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 불교에서도 탐욕을 진에(嗔?), 우치(愚癡)와 더불어 근본적인 번뇌요 불도 수행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독(毒)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탐욕은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는 죄종(罪宗)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탐욕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인간을 범죄로 기울게 하지요. 탐욕은 인간 욕망의 격렬한 형태로서 이성의 소리를 거스르는 감각적인 욕망의 발동을 일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육(肉)이 영(靈)에 대항하여 일으키는 반란으로 봅니다(갈라 5,16-17). 요한 사도는 탐욕을 육의 탐욕, 눈의 탐욕,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으로 구분합니다(1요한 2,16). 육체의 탐욕에 대한 싸움은 마음의 정화와 절제의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한편 재물에 대한 탐욕은 도둑질과 약탈과 사기의 뿌리가 됩니다. 인간은 감각적인 욕구 때문에 갖지 못한 것을 원하게 됩니다. 탐욕을 포함한 모든 욕구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행하기 위한 근본적인 목적을 망각할 때 죄악에 떨어지게 합니다. 나아가 남의 것이나 남에게 주어야 하고 남과 나누어야 할 것을 부당하게 탐하게 되면 죄악에 떨어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부(富)와 세상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과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절제한 욕망에 휩싸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지요.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하며, 더구나 남의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코헬렛도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5,9)고 갈파합니다. 오늘의 실상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부당이득을 얻으려는 이들, 분쟁이 많이 생기고 병자가 많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이들, 민영화를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가들, 대기업들의 문어발식의 족벌 경영과 골목상권 장악 등. 프란치스코 교종은 돈의 우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봉사해야 하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기쁨, 55. 58항) 돈의 우상화는 결국 차별과 소외를 불러일으켜 인간다운 삶을 파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에페 2,10) 따라서 참 행복을 바라거든 재물을 지나치게 탐하고 재물 모으기에 급급하여 인색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겠지요.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재물을 쓰거나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탐욕 때문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고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탐욕을 절제하고 선행과 희생,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 정의평화를 위한 노력, 공동선을 위한 연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존재 자체로 살아가고 그 자체로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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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에페 2,10)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신이 맘에 안드는 구석이 많지요? 생긴 것도 좀더 잘 생겼으면 싶고 좀더 날씬하고 싶고 좀더 키도 컸으면 좋겠고 이목구비도 좀더 반듯하고 멋있었으면 하지요. 그것만이 아니라 몸도 좀더 건강하고 성질머리도 좀더 나았으면 싶지요. 머리도 좀더 좋아 지혜로왔으면 싶고 좀더 영적으로 성숙했으면 싶지요. 헌데 말입니다.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닌데 내가 맘대로 뜯어 고칠 수는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작품일 뿐입니다. 그분이 나를 만들어 놓고 흐뭇해 하시는데 왜 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야 하나요. 그분 맘이지요. 그분이 만약 나를 만들어 놓고 맘에 들지 않으신다면 나를 뜯어고치시던가 없애버리고 다른 작품을 만드시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 꼬라지가 내 맘에 들지 않는다해도 하느님께서는 그래도 맘에 드시니까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 건 아닐까요? 장미와 백합을 만드신 분이 이름모를 들꽃도 만드시고 온갖 종류의 맛이 다르고 색이 다른 과일나무들을 만드셨지요. 그렇다고 야생화가 장미보다 예쁘지 않다고 할 수 있나요? 들꽃이 나도 백합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할까요? 나는 하느님의 멋진 작품이고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하고 독창적인 작품이랍니다. "나를 만드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나를 꼴보기 싫어하지 말고 만드신 분의 뜻이 잘 드러나도록 나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더 중요하답니다. 우리의 선행, 착한 행실이 그분의 작품이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게 만드는 유일한 도구랍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충분이 멋지고 아름다우십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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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늦은 밤 라디오를 켜놓고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함민복 시인의 ‘가을’이라는 시가 소개되고 있더군요. 시인들, 참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어찌 그리 구구절절한 사람의 마음을 딱 한 문장으로 압축하시는지요.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려만 보이던 풋사과들도 완연한 붉은 빛을 띠며 무르익어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인연의 깊이도, 그들과 주고받는 사랑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신앙도 더 성장하고 성숙해나가는 올 가을이면 좋겠습니다. 산책길에 제 앞을 아장아장 걸어가는 서너 살 된 아이, 그리고 노심초사 아이를 챙기는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 작지만 이목구비 모든 것을 다 갖춘 아이가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 하나. ‘나도 한때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그때도 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겠지? 무럭무럭 성장하는 모습에 대견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었겠지?’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분께 가장 큰 기쁨과 영광은 우리 인간이 활짝 아름답게 꽃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지닌 신앙도 초보 신앙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을 거듭한 우리가 어느 순간 하느님에게까지 닿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 가장 큰 보람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님(AD 24~110)의 신앙은 참으로 눈여겨볼 만합니다. 주교님은 지난번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우리와 비긴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십니다.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 60년 주교로 임명된 후 38년 세월동안 안티오키아 주교로서 활발히 사목활동을 전개하십니다. 107년경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가던 중 인근 교회 신자들을 수신인으로 한 그 유명한 일곱 통의 사목서한을 쓰십니다. 사형이 확정된 수인의 몸으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이냐시오 주교님은 사목자로서의 품위를 조금도 잃지 않고 사목활동을 계속해나가셨습니다. 신자들을 걱정하며 눈물과 기도로 사목서한을 쓰셨습니다. 자신 한 몸 돌보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교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당신 양떼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냐시오 주교님이 남기신 편지는 통상적인 편지가 아니라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끌려가는 순교 여정 중에 쓰신 편지였기에 큰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편지의 수신인들이었던 각 교회 공동체 신자들은 주교님의 편지를 돌려가며 읽었고 두고두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필사본들이 당시 교회 전역에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주교님이 남기신 편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 싶은 사랑의 애절한 호소’였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이 본받음은 수난과 죽음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절절한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순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더욱 생생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도 좋고 십자가도 좋고 맹수의 무리도 좋으며, 뼈를 비틀고 사지를 찢어도 좋으며, 팔다리를 자르고 온몸을 난도질해도 좋습니다. 이 세상의 목표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저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제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분이며,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이제 출산의 고통이 저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은 참으로 잘 준비된 순교자셨습니다. 그는 순교야말로 한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최고 가치요 은총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부터 그의 마음은 순교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두발은 비록 지상에 닿아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 품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교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냐시오 주교님의 체포는 당시 전교회의 슬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주교님을 살려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소식이 주교님 귀에 이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들려오는 소식통은 이랬습니다. “주교님이 로마에 도착하면 가장 끔찍한 사형방법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로마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안에서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들에 의해 죽게 되는 방법인 맹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러나 주교님은 너무나도 태연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제게 베풀지 마십시오. 저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두십시오. 맹수는 저를 하느님께로 가게 하는 길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입니다. 저는 맹수의 이빨에 잘게 부수어진 그리스도의 순결한 빵이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사자우리로 들어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이냐시오 주교님의 놀라운 신앙 앞에 작고 보잘 것 없는 제 신앙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좀 더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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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부잣집 아들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려했고, 말리는 주인에게 폭행을 가했고, 손님과 시비를 벌였다고 합니다. 경찰서에서도 피해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했고, 경찰에게도 막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권세와 부유함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언론에 보도 된 만큼, 법에 의한 처벌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자고, 풍족하게 살았지만 정신은 병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감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약을 먹고, 병원에도 가고, 치료를 받습니다. 우리의 몸은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영혼이 건강한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지내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증상이 모두 있는 사람은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픈 영혼을 치유하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날 때, 예의를 지키듯이 하느님께 기도할 때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님들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만날 때마다 멀 사달라고하고, 돈을 달라고 하면 짜증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부모를 만날 때마다 길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신앙을 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자녀에게는 더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심에 감사한다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음을 감사한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셔서, 사랑스러운 자녀를 주셔서 감사한다면 하느님께서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고마워하면 고마울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원망하고, 짜증을 내면 원망할 일들이, 짜증낼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자연스럽게 바뀌기 마련입니다. 기도는 그래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했는데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기도했는데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만 늘어놓은 독백일 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 중에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침묵 중에 있으면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십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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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오래 전의 이야기 입니다. 가족은 물론 친지가 없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계셨는데 본당 수녀님께서 틈틈이 방문하여 청소도 해드리고 말벗도 해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녀님께서 할머니를 책임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처분해서 양로원에 들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혹 마음 상할까봐 조심스레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양로원에 들어가면 당신의 재산을 다 잃는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생각을 접고 할머니를 열심히 챙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은 홀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발견하고 뒷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관계로 이러저러한 조사 끝에 동사무소를 통해서 쓸쓸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아파트가 생명이나 다름없었겠지만 그 아파트를 잘 활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쌓아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442번 주는 우리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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