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내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15 06:22:44    조회 : 46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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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1월15일 화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수도회] 나눔을 부르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3,1-6.14-22 † 복음 루카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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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자캐오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참으로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불운과 약점의 아이콘입니다. 세속적으로야 세관장이었기에 재산도 제법 모았겠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유다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탁에서 그 옆에 앉는 것만 해도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키가 작아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자 하는 회개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는 감히 그 고귀한 분께 그런 갈증을 느낄 자격이 있는지조차도 자신이 없지만, 입고 있던 비단옷과 고급 신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체면 다 구겨 가면서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 순간의 만남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묵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청원이 바로 그에게는 구원이요, 새로운 생명이며, 하늘 나라의 시작입니다. 처음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보고, 인정을 받은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고 지탱해 준 재산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을 용서하시고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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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제1독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3,1-6.14-22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어떤 책을 보다가 저자의 체험 하나에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을 하셨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이 다른 의사들과 약간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답니다. 입원해있는 환자를 향해서 ‘환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그리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어르신,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을 절대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박 선생님’, ‘김 사장님’, ‘김 여사님’ 등의 호칭을 붙이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왜 다른 의사와 달리 저렇게 부를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담당 의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환자에서 환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게다가 ‘어르신,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호칭을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그러면 병마와 싸우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지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의 이 배려가 크게 와 닿았습니다. 하긴 저 역시도 예전에 수영장 다닐 때, 수영강사가 제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물론 ‘사장님, 아저씨’라는 호칭 역시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제가 듣고 싶은 호칭은 무엇일까요? 지금 제가 활동하고 있는 ‘신부’라는 직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이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총각’이라고 불리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관장이었던 ‘자캐오’가 나옵니다. 자캐오는 어떤 호칭 듣기를 원했을까요? 그의 직업이었던 ‘세리’라는 호칭을 원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동족의 돈을 뜯어내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길을 막았고,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 가시는 길을 앞질러가서 높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랐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불러주십니다. 남들처럼 ‘세리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 ‘자캐오’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 누구도 자신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집에 머물겠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자캐오의 죄를 보고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캐오 모습을 받아들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모습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우리가 특별히 열심히 해서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음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나눔으로 응답했던 자캐오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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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점을 보고 반했으면, 단점을 보고 돌아서지 마라.
20161115_01.jpg 어제 인천교구의 시국미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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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비판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원래 신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몇몇의 교인들의 비판을 강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후대의 사람들은 그가 진로를 잘 바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전기를 쓴 작가는 만약 고흐가 자신이 가진 열정과 창의력으로 신학자로 헌신했더라면 인류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신학자의 길을 포기했던 이유는 몇몇 사람들의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격려와 응원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했었던 것이지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비판을 하고 보는 모습으로, 그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0161115_02.jpg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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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나눔을 부르는 기쁨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 루카 19,1-10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나눔을 부르는 기쁨 세리는 이방인 압제자들을 위해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고, 부당착취를 했기에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었습니다(19,3). 그래서 예수님을 보려고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19,4). 오늘 복음을 주의 깊게 보면 자캐오가 회개했거나 회개하려고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로 자신의 인격을 향함으로써 일치하려는 지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기쁨이 아닌 세리 자캐오가 기쁨을 받아들여 기쁨 안에 머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고’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자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로 올라가 그분을 봅니다. 영혼의 어둠 중에 있던 그가 기쁨을 열렬히 갈망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 하십니다. 구원의 기쁨 자체이신 그분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던(5,30; 7,34)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뛰어넘어 그와 함께 하기로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그분을 기쁘게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19,6). 자캐오는 구원의 기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이 바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잃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19,10)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기쁨을 체험한 자캐오는 그분께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고 합니다. 그렇게 기쁨은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네 삶은 때로 고달프고 자주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쁨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을 끌어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을 받은 우리 모두는 그것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나누지 못하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니며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겠지요. 사랑과 은총의 대상인 사회적 약자들과 나눔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기쁨과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놓치지 않은 지혜로운 우리였으면 합니다. 또한 이 사회의 모습에서 서로에게 기쁨을 앗아가고 기쁨의 길을 가로막는 온갖 부조리와 악을 거둬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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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묵시 3,15) 한해를 정리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적극적으로 투신하지 않고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나무라시네요.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중용의 도가 최고이고 중도노선이 최고이고 중간만 가는 게 삶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이란 논리에 빠져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진실하게 살아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면한 체 비겁하게 안주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가족과 내가 힘들게 이루어 온 기득권이 행여나 손상될까 전전긍긍하며 얄팍한 현실논리 뒤에 숨어 사회적 약자들 편이 되어주지 못하고 나 또한 기득권층과 한 통속이 되어왔음을 부끄러이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소명과 직분을 온몸과 맘으로 투신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적당히 욕 안 먹을 정도로만 대충하며 살아 온 나의 불성실을 뉘우칩니다. 오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함으로써 가을의 단풍처럼 냉정한 지성과 뜨거운 열정이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그런 날 꾸미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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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 혹시 학창시절 그런 체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이!” 혹은 “야, 너!”라고 불렀던 기억 말입니다. 그 정도는 양호합니다. 듣기 싫은 별명을 부르면 기분은 더 나빠집니다. “어이 땜통!” “거기 돼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는 표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친교의 다리를 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당시 교육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왜냐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자체로 아주 좋은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전 세계 살레시오 교육 현장에서는 신학기만 되면 살레시안들이 아이들 이름 외운다고 ‘쌩고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리코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돌 무화과나무 위에 숨어있는 자캐오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이 지닌 ‘순결함’이라는 의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수전노’, ‘죄인’, ‘민족의 반역자’, ‘구제불능’이라고 불렸던 그였습니다. 희망이나 가능성, 회개나 새 출발 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캐오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신체적 콤플렉스(작은 키)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철저하게도 세상으로부터 왕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는 오로지 돈을 벌고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만 온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예리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자캐오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한 그분의 음성에 자캐오는 지난 모든 상처가 즉시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민과 사랑이 마음이 흠뻑 담긴 예수님의 한 마디에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올렸던 세상으로부터의 장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캐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처량한 모습의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그의 내면 상태를 파악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까, 그래서 제대로 한번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캐오가 걱정했던 일이 발생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멈춰 서시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란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멀리서나마 얼굴만 구경하려고 했는데, 이상하다. 왜 하필 내 앞에 걸음을 멈추시는가? 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는가? 내 꼴이 이게 뭐람. 나무 위에서. 아무래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창피 한번 당하겠는데. 저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라는데, 내 지난 과거를 보시며 제대로 한번 혼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의 걱정과는 완전히 다르게 처신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복음 19장 5절) 예수님의 자캐오 집 방문을 통해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지니신 사명의 본질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죄인에게 다시 한 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이 아침, 2천 년 전과 똑같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요? 결국 구원은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에 응답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또한 구원은 한 인간이 주님의 현존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함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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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감미로운 목소리의 가수 조덕배 씨가 부른 노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이 있습니다. 멜로디와 가사가 모두 마음에 들었던 노래입니다.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아이처럼 뛰어가지 않아도, 나비 따라 떠나가지 않아도 그렇게 오래오래 그대 곁에 남아서 강물처럼 그대 곁에 흐르리. 뛰어갈 텐데 날아갈 텐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처럼 욕심도, 번뇌도, 원망도, 두려움도 내려놓고 물처럼 부드럽게, 산처럼 우직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피정 중에 오늘의 독서를 묵상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저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심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욕심 때문에 닫힌 문을 열면, 두려움 때문에 닫힌 문을 열면, 편견 때문에 닫힌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는 제 맘에 들어오시고, 한없는 기쁨과 사랑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열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론은 글로써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이야기 합니다. 기도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음을 열면 못할 것도 없고, 마음을 열면 두려울 것도 없고, 마음을 열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마음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음이 열린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하였다면 내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던 자캐오가 구원을 받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피해를 준 사람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느님 앞에 솔직한 사람들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과거 때문에 단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현재의 반성과 뉘우침으로 미래의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 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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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순수해 진 댓가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순수해 진 댓가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피아노 시인 Phil Coulter 연주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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