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피조물에게 복음 선포하여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12-03 06:45:44    조회 : 45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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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12월3일 토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수도회] 오늘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9,17-24 † 복음 마태 8,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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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지요. 가장 큰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판단 기준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에 저마다 자기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도, 또는 사이비 종교인도 자기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악의 세력이나 사이비 종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 역시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참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오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판단과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도록,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단지 그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오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고, 더욱 많은 이들의 사고방식, 양심, 문화 등을 복음의 힘으로 변혁시키기 위함임을 다시금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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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2016년 가애 12월3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제1독서 <주님께서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10,8-9 제2독서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23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20 우연히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노숙자로 보이는 여인에게 꼬마 아이가 컵라면을 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은 힘들게 버는 거예요. 우리 엄마도 돈 버는데 얼마나 힘든데. 내 얼굴 볼 시간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돈만 번다고요.” 그러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그런데 너희 엄마는 왜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라고 질문합니다.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왜 벌겠어요? 나랑 엄마랑 행복하게 살려고 벌지.”라고 똑 부러지게 말합니다. 계속해서 이 여인은 “그런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돈만 벌면 언제 행복하게 살아?”라고 물어보지요. 아이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나중에요.”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도 하고, 또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과연 언제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요? 이 아이의 말처럼 언제인지 모를 먼 훗날인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행복은 아직 오지 않을 미래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얻고 지금 당장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이런 행복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얻지 못할 행복만을 신기루처럼 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을 잘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일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 말씀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받는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 뵙고 그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계속되는 행복의 말씀입니다. 먼 훗날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받아들일 행복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우리, 그리고 모든 이가 함께 행복해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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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일어나 옳은 일을 하려 할 때 고집스런 희망이 시작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기다려 보고 일하라 포기하지 말라!(앤 라모트)
20161203_01.jpg 어제 강의를 했던 의정부교구 탄현동 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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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산병 어떤 책을 보다가 고산병 증세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오더군요. 저도 몇 년 전 남미에 있는 페루를 갔다가 고산증세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조금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습니다. 고산병은 어지럽고 멀미를 하는 것처럼 메스껍기도 합니다. 또한 감기 걸린 것처럼 으슬으슬 춥고 몸도 늘어집니다. 이런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요즘 방송에 많이 나오듯이 파란색 약을 구입해서 먹어야 할까요? 보통 해발 4,000미터 이상 높은 곳이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고산병이라고 합니다. 이 고산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몸을 적응시켜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지요. 그래도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빨리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정답이랍니다. 낮은 데로 가야 낫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기겠다고 약을 먹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하네요. 몸 자체를 적응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약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라는 말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내 몸 자체로 이겨내기보다는 다른 외부의 방법을 동원해서 이겨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다보니 또 다른 문제를 양산했던 것이지요. 내 몸이 조금씩 적응하면서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20161203_02.jpg 탄현동성당의 성모님.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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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오늘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3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축일 마르 16,15-20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23) 오늘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하고 이르십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복음 선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불행하다’(1코린 9,16)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의로움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복음 선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자 교회의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복음 선포는 자기선전이나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주입시키며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행위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복음선포 사명에 온 존재를 바쳐 헌신했던 분입니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온갖 고난을 겪어내며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산첸 섬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자신의 모두 전부를 쏟아 부으며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선과 정의를 선포하는 도구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주님,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고 말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기쁘게 실행하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여파로 나타나는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와 자본의 권력화와 우상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복음의 가치는 상대화 하고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취하는 선택적 가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또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세상에 인공호흡을 하는 것과 같은 절박한 과제인 듯합니다. 그토록 심각하고 강력한 도전이기에 복음선포를 포기하거나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복음선포는 내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먼저 자신부터 복음이 되어야겠지요. 따라서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내려놓고, 멈추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되새기고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에 따른 분명한 선택과 행동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복음선포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요, 자기만의 신비적인 초월체험에 머무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대로 현세의 거짓 가치와 행동방식, 거짓되고 부패한 권력의 행사, 차별과 무관심 등 인간을 저 변두리로 내모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매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 안에서 더 가난하고 보다 더 작아지며 철저히 자신을 비워내는 ‘사랑 준비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꺼이 다른 이들의 종이 되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며,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1코린 9,19. 22) 이타적 사랑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살아내야 할 참으로 아름다운 몫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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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2016년 가애 12월3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15-20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암울한 시대의 산물로 새로 생긴 특별한 증세가 있답니다. 이른바 ‘순실증’입니다. 드러나는 증세는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아왔나 하는 자괴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답답해하고 화를 못 다스리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병원 신세를 지는 분들도 많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한층 커진 시대입니다. 다들 우울해하고 실망하고 있습니다. 무기력 증에 빠져있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덩달아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되겠습니다. 각자 처지에서 ‘순실증’에 깊이 빠져 있는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이란 종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적인 종교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해도 절망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며,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종교가 바로 우리 가톨릭입니다.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힘겨워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아주 작은 위로, 작은 희망을 줄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집단적으로 절망하고 가슴 답답해하는 이 시대, 우리가 세상에 내어놓을 답은 사실 희망이요 위로이신 주님, 그분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은 이웃들에게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야겠습니다. 실망하고 허탈해하는 이웃들, 이 세상 부질없어하는 이웃들, 깊은 절망감에 빠져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만나고 체험한 이 좋으신 희망의 주님을 전하는데 앞장서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같은 경우를 보십시오.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 선교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살을 에는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만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인도에서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고 난 그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건너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중국 코앞 산첸섬에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과도한 복음 선포로 인한 열병이요 과로사였습니다. “만일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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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 2016년 가애 12월3일 토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15-20 2016년을 시작하면서 매달 본당 성소후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교구청에서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본당을 방문하면서 현장의 모습을 보고, 현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는 성소국의 방문이 약간(?)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 주셨고, 저는 본당이 처한 현실과, 본당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성소국의 방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신 (양천, 고덕동, 한남동, 노원, 신천동, 일원동, 녹번동, 성북동, 신림성모, 중화동, 여의도, 제기동, 개포동) 본당 성소후원회와 신부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본당 방문을 통해서 얻은 결실이 있습니다. 성소의 발전은 3가지 요소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본당 사목자의 관심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성소후원회의 모임을 격려하고, 모임에 함께하면, 보좌 신부님이 예비 신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면 성소의 씨앗이 싹트게 됩니다. 둘째는 성소후원회 회원들의 기도입니다. 매번 모임에 묵주기도를 하고, 복음을 나누고, 성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본당은 성소의 싹이 건강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예비 신학생들이 모임에 잘 참석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간식을 주시는 성소후원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입니다. 부모님이 세상의 가치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삶을 살아간다면 아이들은 이미 가정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시작합니다. 성인전을 읽고, 매일 기도한다면 비록 부유하지는 않아도, 배움이 크지는 않아도, 높은 직책에 있지 않아도 성소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서서울지역 평의회를 명동 교구청에서 하였습니다. 교구청의 국장신부님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역의 신부님들은 본당과 지구의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교구청의 신부님들은 교구의 현황을 보고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하게 협조를 해야만 건강할 수 있습니다. 영양분과 산소를 듬뿍 담고 혈관을 통해 피가 흘러야 원할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몸이 소통과 협조를 하듯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소통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 맑고 투명한 사회, 국민을 위한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에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누구의 책임이 클까요? 결론은 사목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려주지 못하고, 덕이 부족하고, 품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사를 충실하게 집전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복음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사목자가 비록 부족해도, 말을 잘 못해도, 음주를 못해도, 음주를 즐겨 해도 공동체는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특히 고백성사를 잘 들어주고, 장례가 나면 빈소를 찾아가서 유족을 위로하고, 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오셨던 예수님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대하면 사랑이 꽃피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기쁜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다시 갈망이 생기는 만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 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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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성가 482번 일월성신을 내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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