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부부사이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7-02-24 06:46:00    조회 : 459회    댓글: 0

☆ 2017년 가해 2월24일 금요일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수도회] 성사적 만남의 신비를 사는 혼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집회 6,5-17
† 복음 마르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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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자신보다 상대를 더 많이 생각하고
보살핍니다. 사랑은 두 인격이 서로를 향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 서로를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혼장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부당한 관습에 대하여 제동을 거시면서 혼인에 대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필요에 의해 결합되고 헤어지는
흔한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악과 불륜을 저질러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혼인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살아 계시고, 두 사람을 혼인의 유대로 결합시켜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이 파기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은총으로 ‘둘이 한 몸’이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갈라져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대한 신뢰를 지키시듯이, 혼인 역시 서로 부족한
인간끼리 사랑하며 성숙해져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성숙한 부부는 욕망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라는 집회서의 말씀대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나의 든든한
피난처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혼인 서약을 끝까지 지켜 주는 성실한
친구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보물을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곁에 나는 참된 보물을 두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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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사랑의 관계

2017년 가해 2월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6,5-17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유치원아이들이 동물원에 갔습니다. 그곳에 많은 동물들을 볼 수가
있었지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아까 여러분이 본 동물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
뭘까요?”

사육사 선생님께서 사자가 가장 무서운 동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이 무서운 사자를 인간들이 잡아서 가두기 때문에, 사자들은 인간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사육사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참 잘했어요.
그럼 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뭐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구보다도 먼저 앞에 앉아 계신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암사자요.”

아마 아내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이 버스 기사 아저씨는
아내를 무서워하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무서워했을까요?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만약 무서웠다면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사랑의
관계가 무서움의 관계로 변한 것이 아닐까요?

남녀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결혼은 사랑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사랑의 관계가 무너질 때 가정은 제대로 유지되지 못합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관계가 어떤 이익의
관계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 등으로
자신의 이익이 침범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교회에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사랑의 관계를 사람이 함부로 갈라놓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여자와 완벽한 남자는 없다. 모자라는 남자와 모자라는
여자가 만들어 가는 완벽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항상 사랑의 관계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이
사랑의 관계가 유지될 때,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도 이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 ~~~~~ ~~~~~
대화는 말하는 자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를
오가는 쌍방 통행이다. 일방통행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정정숙).  

~~~~~ ~~~~~ ~~~~~
햇볕이면 충분하다(‘좋은생각’ 중에서)

리콴유는 싱가포르 정치가로, 26년간 총리로 일했다. 그는 작은
나라였던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금융, 물류의 중심지로 발전시켰고,
청렴한 정부를 갖는 데 기여해 ‘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1972년, 그는 싱가포르를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관광청에서 보고서를 만들어 그에게 보냈다. 내용은 이러했다.

“중국에는 만리장성과 진시황릉이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일본에는 후지 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는 이렇다 할
유적이나 명소가 없고, 일 년 내내 햇볕만 내리쬐니 관광 산업은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답변을 썼다.

“하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군요. 햇볕이면 충분합니다.”

싱가포르의 최대 장점인 햇볕을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관광청
직원들은 연중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각종 나무와 꽃을 가꾸어
‘보타닉 가든’, ‘주롱 새 공원’ 등 명소를 만들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아름다운 원예 국가이자 세계에서 관광 수입이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되었다.

그 작은 것도 최대의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과 굳은
믿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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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성사적 만남의 신비를 사는 혼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24일 연중 제7주간 금, 마르 10,1-12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10,9)

성사적 만남의 신비를 사는 혼인

예수님 시대에 율사들은 아내가 풍기문란, 남편이 먹을 음식을 태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신명 24,1)이
있으면, 남편이 간단한 소박장 하나로 소박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인격적인 이혼을 비판하시면서,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10,6-9).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시어”
(창세 2,24) 서로 변함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하느님께서 육화 안에서
인간과 결합하시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오리게네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혼인이란 두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희망, 하나의 열망,
하나의 규율, 하나의 섬김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은 함께
기도하고,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며, 서로 위로합니다. 둘은 하느님의
잔치에서 완전히 동등하고,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동등하며,
위로를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으며,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남편과 아내가 이런 성스럽고 사랑 가득한 관계를 이루며 산다면
참으로 행복하겠지요. 그러나 화성과 금성에서 온 너무도 다른 남녀가,
성사적 만남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러다보니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며 사는 부부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성사(聖事)인 혼인을 비성사화 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행복한 혼인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선물이요, 거룩한 신비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로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 안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과 기준과 힘으로 접근하는 한,
사랑의 일치는 이루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니, 결국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고 지배하려 듭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절대적
주체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물건처럼 객체화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깊은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을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성사적 관계가 아니라 상거래가 되고 말 것이 뻔합니다.
내가 죽어 없어질 때까지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은 없고 늘 상대방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서로를 대하는 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안에서의 성사적 관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혼인의 성사적 신비를 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서로가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시작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집회서의 말씀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말로 대하고, 사익을 구하지 않고 역경에서도 변함이 없는 성실성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도 각자 하느님을 품고 서로를 하느님처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사랑함으로써, 혼인성사의 신비를 살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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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 8)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 8)

어디에도 완벽한 부부는 없습니다.
서로 맞추며 살아 가고 닮아 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삶이란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쓴맛과 단맛을
수없이 반복하며 요셉과 마리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혼인 공동체의
빛과 어둠 치유와 상처라는 성장의 시간입니다.
한 몸이 되는 사랑은 끊임없이 배워나가는 부부들의 여정입니다.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부부는 서로 참고
감싸주면서 혼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한 가정의 부부는 같은 십자가를 지고 한 몸이 되는 이들입니다.
부딪히고 싸우며 하나가 되는 혼인 공동체의 축복입니다.
남과 여가 만나 자식을 낳고 키우며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하느님을 닮는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혼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선물이며
부족함을 같이 메워주는 하나의 체온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혼인서약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청하는 성가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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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혼인의 해소 불가성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혼인의 해소 불가성

복음: 마르 10,1-12: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유다인들은 결혼에 대해서는 아주 고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절의 덕은 덕 중의 덕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부정의 죄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정은
하느님의 영광을 떠나보냈다.” “모든 유다인들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을 범하는 것보다 죽는 편이 더 낫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아내를
내어 보낸다면 제단이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오직 한 사람 하와만을 짝을 주신
것은 두 사람이 모든 일에 동등하게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간음이란 혼인의 원래 목적에서
실패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5절)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아담이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그리고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창세 3,13)라고
핑계를 대는 것에서 나온 법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 것 같다.

혼인은 교회가 묶어주고 봉헌으로 굳건히 하며 축복으로 봉인하고
천사들이 선포하고 아버지께서 확증하시는 것이 혼인의 행복이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열망, 하나의 규율, 하나의 섬김으로 일치된 두
그리스도인과 같은 짝은 없다. 이 둘은 형제와 같은 관계이며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창세 2,24; 마태 19,5; 에페 5,31).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이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앞에
함께 엎드리고, 함께 단식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하는 관계이다. 하느님의 잔치에서도 완전히 등등하고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동등하며 위로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다. 서로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혼인생활을 절제 있게 엮어 가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9절)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가르침은 간음의 경우 외에는 모든 이혼을 금한다. 그 간음은 여자나
남자가 아내이기를 남편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혼인의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매여
있다.(참조: 1코린 7,39)

부부는 항상 서로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부간의 도리와 혼인의 신성한 의무를 충실히 하여야
한다. 부부는 하나라고 한다. 하나이면서 둘이며, 주님을 모시기
때문에 셋인 삶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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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7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2월24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 10,1-12

친구와 관련된 고사 중에는 ‘관포지교’가 있습니다. 친구의 부끄러움을
보듬어주고, 친구의 잘못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감옥에도 가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뜨거운 우정을 보여 줍니다. 친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그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한 우정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까지도 맡길 수 있는 우정입니다.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한다면 유안진 선생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입니다. 상큼한 글로 친구의 우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은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좋겠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동창 신부님들 중에 거동이 불편한 친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친구,
잠시 쉬는 친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친구들의 근황을 접하게 됩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서인지 특별히 날을 잡지 않으면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다들 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관포지교’의 우정을 나눌 만큼 수양을 쌓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일상의 삶에서 ‘지란지교’를 꿈꿀 수 있는 것도 행복일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너의 수치스러운
말다툼을 폭로하리라.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예전에 모시던 신부님께서는 참 엄격하셨습니다. 어느 날 모임이
있어서 11시쯤 사제관에 들어왔는데 신부님께서 빗장을 잠그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대문을 두드렸더니, 신부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이 몇 시야!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
거야!” 저는 신부님께서 문간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우선 들어온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늦었네!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이 되었다네!” 만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저는 그 뒤로 더욱 조심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중에는 신부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즐겁게 지냈지만
처음에 그런 경험은 생각을 다시해도 끔찍합니다.  

친한 친구들끼리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부간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평생 살아가면서 계속 쫓아다닌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부부가 좀 더 사랑하고 아껴주려면 말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한 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계속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다면 부부 사이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꼭 기억해두어야 하겠습니다.  

1. “우리 이혼해!”
2. “내가? 그러는 당신은 어떤 줄 알아?”
3. “옆집 남편(아내)처럼 할 수 없어?”
4. “어린애처럼 굴지 좀 마!”
5. “당신, 예전이랑 똑같은 실수를 한 거잖아?”
6. “좀 더 이성적일 수 없어?”
7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8. “난 지금 안 듣고 있어”
9. “모든 게 당신 잘못이야”
10.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
11.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12. “그저 농담이라고” 

부부사이라도 이런 말은 꼭 해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1. 고마워요.
2. 사랑해요.
3. 미안해요.
4. 감사해요.
5. 내가 할게요.
6. 다시 할게요.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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