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4일 변질된 영혼을 바로잡아 고쳐주십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04 06:40:54    조회 : 246회    댓글: 0

◎ 2018년 나해7월4일 [(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제1독서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5,14-15.21-24

복음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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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고양이와 개는 표현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겉으로 보면 같은 모습이지만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대화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이 내미는 손이 가식과 거짓으로 보일
것입니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 보내는 화해와 평화가 위장으로
포장한 거짓 쇼로 보일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미군의 유해가 북한에서 미국으로
송환될 거라고 합니다. 미국은 남한과의 군사훈련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거라고 합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기지를 없앨 거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이 미국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진정성을 믿어
주는 것입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풀어주면 좋겠습니다.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 간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만나고, 북한에서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말하니까 사람들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만나고,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으니까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다고 비난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주시는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은 산소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맞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신화는 불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드러나는 표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촛불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낸 상징이
되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희망의 불을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소유와 탐욕에 물든 사람은 변화의 불을 피하려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개혁의 불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보여 준 극단적인 길을 보았습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이룩했던 모든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칼은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문명은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지나친 경쟁과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명은 가난, 질병,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많은 이웃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인간의 탐욕과 욕망 때문에 오염되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 파괴되고 있기도 합니다. 

문명은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명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불을 밝히셨습니다. 변화의 불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개혁의 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불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는 예수님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와 개혁이 두려웠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나누어 주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
바라셨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성령과 악령을 구별할 수 있으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을 구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3가지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는 열매를 보고 참된 영과 거짓된 영을 분별해낼 수
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결과가 공동체를 분열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면 그것은 악의 개입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악한 것들은 그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관을 통해 악령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분입니다.

셋째,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인격과 생각을 외부에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화가 난 사람은 분노의 말을, 야비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야비한 말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비와
은혜의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항상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높이지 않고 은근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말을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탐욕의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머리를 들고
흔들어 댑니다. 어떤 영이든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높이는 대신
인간을 높이고 추켜세우는 영은 악의 영이요 성령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큰 권능을 행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그가 하는 말이 진정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의 말과 행위에 성령의 온유함과 자비함이 나타나는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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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에게 속지 않으려면
 
2018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자신에게 속지 않으려면>

복음: 마태오 8,28-34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결핵전문병원으로 명망이 높았던 웨이버리
힐스 병원에 근무하던 여성 간호사들이 이유 없이 계속 자살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결핵은 합당한 치료법이 없어 걸리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많이
쐬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은 신종 치료법
개발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흉곽 성형 수술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을 절개하여 폐에 직접적인
치료를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치료법은 매우
고통스러우면서도 실제로는 그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가슴을 절개하고 5~7개의 갈비뼈를 제거한 후 허파에 구멍을
뚫고 풍선을 넣어 부풀리면 폐가 확장되어 숨 쉬기가 수월해져 몸속에
있는 결핵균이 제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수술법은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수술을 받다가 많은 수가 사망에 이르렀고
수술을 받고 나서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생존확률은 5%에
불과하였습니다. 감염의 이유로 이렇게 사망한 환자들은 병원이 몰래
만들어둔 지하 통로를 통해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었습니다.
1926-1943년까지 17년간 그렇게 극악무도한 수술로 죽어간 환자가
무려 6만 4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 사실들을 모두 지켜본 간호사들이 강하게 항의를 했지만 명성과
이윤만을 추구했던 병원은 그들의 항의를 묵살했고 그렇게 수많은
간호사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타인을 아프게 하면서
괜찮을 수 있다면 이미 마귀가 되었기 때문인데, 간호사들은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수의 간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캔터키주 당국이 조사에
돌입하여 결국 흉곽 성형 수술을 하지 못하게 금지시키게 되었고 이
병원의 잔인한 돈벌이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출처: ‘신종 치료법 개발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병원’, 서프라이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습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보려 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악습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저도 몇 번이나 술을 끊어보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사목을 위해서, 혹은 친교를 위해서 조금은 마셔야
한다고 합리화하며 싫은데도 억지로 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니 제가 마시기 싫으면 아무도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좋아서 마시고 있었던 것이고
원하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런저런 합리화를 통해
스스로 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는데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모든 행위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하냐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 ‘악습에서 얻는 이익’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웨이버리 힐스 병원도 자신들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멈추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체들을 몰래 처리하기 위해 지하 통로까지
파가면서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계속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오는 명성과 돈이 더 좋았을 뿐이고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겉으로만 벗어나고 싶다고 했을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서도
돈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면 벗어날 수 없기에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거짓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마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십니다. 바로
그들을 괴롭히던 마귀 들린 사람 둘을 치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온 마귀들은 그 마을 사람들의 생계수단이었던
돼지 떼에 들어가 그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돈에 대한 집착이었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었지만
실제로는 돈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던
집착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고장에서 나가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돈을 좋아하기에 그 마귀
들린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 고통을 즐겨 감수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모습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은 오늘
등장하는 가다라인들이나 웨이버리 힐스 병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부자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가 돈을 포기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미워해야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따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굴욕과 실패와 피흘림과 죽음과 가난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지 솔직히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믿는
행복이 과연 돈인지 예수님인지 결정해야만 하고, 하나를 결정했다면
하나를 미워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 신물이 나고 진정 벗어나고 싶어지면 그제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실제로’ 생긴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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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마귀들린 사람의 치유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8,28-34: 가다라인들 지방의 마귀 들린 사람

예수께서는 호수를 건너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에 사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만나신다. 마귀 들린 이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이들을
의미한다. 쇠사슬에 묶여 무덤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죄라는 쇠사슬과 죄라고 하는 차꼬에 묶여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29절)
한다. 

그가 말하는 때는 “메시아의 때”로서 마귀가 정복당하는 때를 말한다.
그러면서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31절)하고 간청한다. 돼지 떼는 호수 가까운 곳에서 아무
것이나 주워 먹으며 세상의 죄에 따라 살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 속된 호수 가까이 사는 그들은 오류와 무절제한 욕망에
젖어있어서 쉽게 마귀들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예수께서는 “가라!”하고 명령하셨고,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돼지 떼는 물속에 빠져 죽는다(32절).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보고는 저희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34절)고 전하고 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께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현존 그 자체가 도전이며,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떠나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깨끗이 치유된, 크나큰 고통을 당했던 그 마귀
들렸던 사람도 보았지만,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도전으로 두려움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그분과 만나기조차 꺼리는 것이다.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손해가 아까워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달라고 했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믿음이
없었던 그들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하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이 주님께 우리를 떠나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삶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하느님의 뜻 앞에 서 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하나의 십자가의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십자가를 어떻게
처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십자가가 영광을 줄
줄 알지만, 그 과정이 두려워 그 십자가를 버려야 할까? 아니면 그
도전에 순순히 응답함으로써 영광을 누릴까?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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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또 다른 마귀의 얼굴
 
2018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또 다른 마귀의 얼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무덤에서 나오다 마주친 마귀 들린 두 사람 사건은
상상만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두 사람 다 심한 마귀에 들리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범한 삶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한번씩 마귀가 발작을 시작하면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그들을
멀리했습니다. 자연스레 인간 세상 밖으로 쫓겨나와, 인적이 드문
무덤 가에서 짐승과도 같은 삶을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이 몇가지 있습니다. 한
인간 존재 안에 마귀가 떡 하니 들어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귀가 한
인간 존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인간 존재는 자기
중심을 상실합니다. 악령이 한 인간 존재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합니다.
마귀의 힘을 한번 물리쳐보고자 발버둥쳐지만 중과부적입니다.
마귀의 세력이 집단적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무덤가에서 나온 두
사람에게 들어온 마귀들은 그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와 통제에 완전히 넘어간 상황에서 그 누구라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무데나 머리를
짓찢으며 자해를 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모독하는 거칠고
기괴한 말들이 쉴새없이 흘러나옵니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쭈볏쭈볏해지는 신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가끔씩 마귀의 활동이 잠잠해지고, 잠시나마 맨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느끼는 자괴감과 비참함은 정말이지
하늘을 찌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내 얼굴, 내
몰골이 왜 이렇게 흉측하지? 내가 왜 나를 통제할 수 없지? 이렇게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힘이 세던 마귀들이었고, 그토록 한 인간 존재를 망가트리던
마귀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등장 앞에 완전히 꼬리를 내립니다.
전지전능하신 분,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알아차린
마귀떼들은 그분 앞에 간절히 청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8장 29~31절)

예수님의 등장, 예수님의 현존, 예수님의 다스림 앞에 마귀들은 즉시
힘을 상실합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 앞에 알아서 자신들의 원래
자리, 멸망과 죽음의 자리로 돌아가버리는 것입니다. 마귀들의 힘과
횡포가 아무리 세다 해도 예수님 앞에서는 태양 앞에 한 자루 촛불
같은 미미한 존재일 뿐입니다.

마귀의 세력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 큰 힘의 소유자이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분의 손길,
그분의 영역안으로 들어가 머물러야 합니다. 나를 그분께 꼭
묶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장소가 공동체입니다. 한 개인은 참으로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너무나도 쉽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너무나도
쉽게 마귀의 세력 앞에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는 재빨리 주님 품안으로, 공동체 울타리 안으로 복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만난 마귀들까지는 아니어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마귀들과 마주칩니다.

언젠가 분노와 복수심, 상처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귀 새끼 한 마리가 딱 들어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공동체와 이웃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거짓과 악담,
시기질투와 불평불만은 이 시대 또 다른 마귀의 얼굴입니다. 기쁨
충만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무기력과 낙담, 우울함과 절망감은 이
시대 또 다른 마귀의 얼굴입니다.

아직도 반성할줄 모르고 활개치고 있는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잔재나
독재 잔재, 역사왜곡과 갑질 횡포는 두고 두고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또 다른 마귀의 얼굴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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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태 8, 29)

가장 알맞은 때는 언제나 우리 주님께서 정하는 것입니다.
괴롭히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언제나 어리석은 악의 속성입니다.
군대라는 힘의 논리로 맞서지만 끝내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생명의 참된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비탈길을 내리달려 죽음에 이릅니다.
마귀 추방을 통해 소중한 본모습을 되찾아주십니다.

변질된 영혼을 바로잡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를 살게 하지만
악은 서로를 멸망으로 치닫게 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우리를 악에서 지켜주시고 손 잡아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온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복음을 안겨주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중한 인격을 더럽히는 악은 타락한 마귀는 얼른 물러나라.

“가라.”(마태 8, 32)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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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존귀한자 나아만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7월4일 수요일

존귀한자 나아만

오늘은 “존귀한자 나아만”에 대하여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1절 말씀에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만장군은 나병이 들어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집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어린
소녀하나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나병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나아만 장군은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엘리사에게 가면 나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다급하게 왕에게 찾아가 자신의 병을
위해서 적국인 이스라엘에 가겠노라 허락을 받습니다.

아람왕은 나아만 장군이 뭐라고 해도 평소에 믿고 의지하였던 터라
곧바로 허가를 해 주었지요.

저는 아람 왕으로 부터 평소에도 나아만 장군이 이렇게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참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위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습니까?
성경에서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참 괜찮은 인품이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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