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8일 모든 만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08 07:30:57    조회 : 261회    댓글: 0

◎ 2018년 나해7월8일 [(녹)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2-5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12,7ㄴ-10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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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4주일

2018년 나해 7월8일 연중 제14주일

교황님께서 로마로 가셔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난민들이 들어오는
람페두사 섬이었습니다. 많은 난민이 유럽으로 오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람페두사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섬에 도착하기
전에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유럽은 잘 살지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난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멀리 북간도와 만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동체를 이루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짓기도 하였고, 학교를
세우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을 받아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남쪽의 사람들은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부산은 피난민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선진국은 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개인들은 연금과 보험에 가입합니다. 어려움이 처할
때면 연금과 보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의료보험
제도가 잘 되어있습니다. 국민연금도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종 보험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도 그런 복지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주도에 난민들이 있습니다. 정부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거나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국민 중에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찬성하는 분도 있고, 난민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의견에 찬성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난민의
모습을 이집트로 피신한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갔던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난민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던 예수님은 난민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집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때도, 죽음에 이를 때도 예수님은
난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난민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것은 지역, 혈연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 나병 환자, 눈이
먼 사람,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앉은뱅이는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어려운 난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기득권을 가졌던, 많은
것을 소유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게는 위선과 가식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은 식별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프고, 가장
외로운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돌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선택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기에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우리 교회의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처음에는 난민이었습니다. 유대교의 회당을 얻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박해도 있었지만 따듯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럼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나의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 따뜻한 환대가 없었다면 교회가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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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
 
2018년 나해 7월8일 연중 제14주일

​<자신을 믿으면 안되는 이유>​

복음: 마르코 6,1-6

1998년 호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선고를 받은 빌 모건이라는 한
남자가 14분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트럭운전을
하며 작은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는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기념으로 긁는 복권을 샀습니다. 그런데
평생 처음 산 복권에 당첨이 된 것입니다. 약 1500만 원 정도 되는데
그는 그 돈으로 평소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자신 소유의 트럭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뻐하고 있을 때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길에서 만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이에 행운의 사나이라는 이유로 TV 쇼에까지 출연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도 사람들은 ‘살다보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TV쇼에서 자신이 복권에 당첨된 가게에
가서 당시 복권에 당첨된 사연을 재연하다가 다시 복권에 당첨됩니다.
그는 복권 한 장을 구입해 긁었는데 이번엔 2억 원이나 되는 복권에
당첨된 것입니다. 그는 그 돈으로 새 집을 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모자라 단 두 장 산 복권으로 차와 집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출처: ‘행운의 사나이’, 서프라이즈]

빌 모건의 삶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누가 저런 삶을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삶은 예상 가능할까요?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예상
밖의 상황을 너무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예상대로 흘러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오늘 하루의 삶과 한 사람과의 만남도 아침에 예상한대로
흘러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 인생을 놓고 보면 거의가
어렸을 때 예상했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25살 때까지 사제가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지금
사제가 돼 있습니다.

인간이 아주 대단한 지능을 가진 것 같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개미보다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하느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예상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교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한 동네에 살던 예수가 메시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 목수의 아들인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으면 하느님을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자신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당시 나자렛 사람들처럼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는 교만함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저희 동창신부 아버지는 사고로 온 몸이 불에 타 사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안실로 옮기는 중에 살아나셨습니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곧 다시 죽게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고로 입과
눈이 눌러 붙어있었지만 의식은 선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체
한 번만 영하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새벽이 되니 온 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고 두 시간 동안 불에 탄
딱지가 다 떨어져나가며 어린이와 같은 새 피부가 돋아났습니다. 그
병원이 수원 성 빈센트 병원이었기에 아침 6시 미사에 가서 성체를
영하고 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죽어가던 환자가 사라져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님이 자신의 병실로 돌아오자 모두 친척 되시냐며 환자가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분은 “제가 그 환자입니다.”라고 몇
번이고 말해도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까요? 하느님의 능력은 믿지
못하고 자신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안 믿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많은 사고는 자신을
지나치게 믿을 때 발생합니다. 믿으면 더 쉽게 속게 됩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속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타인의 생각이 자신 안에서 해석되어 자신의 생각을 믿게
되는 것이 결국 타인에게 속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내 생각을 믿고
나를 믿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바로 믿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굳게 믿는 교만한 사람이라면 속이기가 더 쉽습니다.
자신만을 믿기 때문에 그것만 설득시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저런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들만 들어주면 쉽게
믿어버립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속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납득할만한 이런 저런 좋은 이유를 설명해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삶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생각 때문에 걱정이 생기며 생각 때문에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을 기도시간이라 합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내 앞에 내 생각에 가려져 계시던 주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내가 생각을 끊을 때 시작됩니다. 그러면 내 삶이
그분께 맡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획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때보다
에너지는 훨씬 덜 들어가고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믿는 것에서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옮아가는
시간입니다. 하와가 뱀을 믿었고 아담이 하와를 믿었듯 자신의 생각을
믿다가는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물 위를 무작정 걸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분께 오롯이 의탁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를 점점 하느님께 두게 될 때 예수님이 나타나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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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치유 대신 견디는 은총을!
 
2018년 나해 7월8일 연중 제14주일

치유 대신 견디는 은총을!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나 복음서들을 읽을 때 마다, 이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참됨’ ‘진실성’ ‘진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 그래서는 결코 안될 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은 ‘회고록’,
‘자서전’을 당당하게 출간해서 국민들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상승시킨
바 있습니다. 쥐구멍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조용히 반성하고
가슴쳐도 부족한 지경인데, 거짓과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책도 아닌
책을 내니 개그가 따로 없더군요.

누군가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책을 출간할 때는 대체로,
자신의 삶 안에서 벌어졌던 성공담, 업적들을 강조합니다. 또한
자신의 장점, 경쟁력, 출중한 능력들을 소개합니다. 대신 부끄러운
사건이나 수치스런 경험, 인생의 흑역사들은 감추거나 생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더군요. 바오로 사도가 서기 57년경에
저술하신 ‘눈물의 편지’(코린토 2서 10~13장)를 읽어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한 마디로 솔직담백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없이 쓰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흑역사까지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코린토 2서 12장 7절)

많은 성경학자들이 ‘가시’라는 표현을 바오로 사도가 앓고 있던
지병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눈엣가시’로 여긴 것을 기술한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교통편도 열악했던 당시 끝도 없이 계속된 전도여행, 여행 중에 겪은
셀수도 없이 자주 겪었던 환란으로 인해, 바오로 사도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도 여행을 계속해야지, 몸은 아프지, 너무나 괴로웠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제발 전도 여행 좀 잘 하게 이 병 좀 고쳐주십시오!”
라고 세번이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코린토 2서 12장 9절)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시기
보다는 병을 견디는 은총을 선무로 주십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즉시
사라지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시기 보다는 고통과 십자가를 더
깊이 끌어 안는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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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잡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8일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주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치유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무수히 일어나는 판단을 멈추게됩니다.
판단하는 그만큼 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가두는 판단은 영원히 끝날 수없는
다툼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판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은 말씀과 믿음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 역사는 실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의 전부를 걸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의를
되찾는 길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성찰에 있습니다.
모든 만남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판단을 버리고 말씀을 따릅시다.

고맙고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허약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시는 새로운
생명의 길로 오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일찍이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기억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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