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3일 기도는 슬기롭고 기도는 순박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13 08:12:23    조회 : 231회    댓글: 0

◎ 2018년 나해7월13일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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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러시아 월드컵을 보면서 늦게 잠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생방송을 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를 보는 편입니다. 주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늦은 시간이라도
생방송으로 볼 것입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공부하기보다는 요점정리가 된 것들을 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기도 하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볼 것입니다.
그래야만 전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인 예수님을 제단에 모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예수님을 제단에 모실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적대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은 요점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때로 박해와 죽음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이제 배우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구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주어지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은 계속해서 급여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에 이르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몰래
저에게 지혜를 주시나이다.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 제가
깨끗하여 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다.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이제 다음 달이면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신부님이
새로운 곳을 향해서 떠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떠나야 하는 곳에서는 박수를 치면서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합니다. 도착해야 하는 곳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새로이
오시는 신부님을 환영할 것입니다. 사제의 인사이동이 기쁨과 박수를
받는 축제의 자리일 수도 있지만, 사제의 인사이동은 조금은 더
절박한 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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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2018년 나해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복음: 마태오 10,16-23         

‘어바웃 타임’(2013)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가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팀’은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 ‘빌’로부터 그 집안은 대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말해줍니다.
실제로 그 방법대로 해 보니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후로 팀은 실수하거나 놓친 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릴 수는 없습니다. 팀이 과거로 돌아가 남의 여자를
가로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시간을 되돌려 무언가를
얻게 되면 대신 잃게 되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시간이 지나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깨달아갈 때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깨달은 시간을
돌리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일상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것입니다. 팀은 변호사인데 재판이 있는 날은 긴장하여
출근하고 재판에 간신히 이겨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루를 한 번 더 살아보니 처음 살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건을 살 때 친절하게 인사하는 점원의
얼굴에 자신도 미소가 띄워지고 법원 건물이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다며 감탄해하고 재판 때에도 동료와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오니 아내까지도 고생한 남편을 기쁘게
맞아줍니다. 같은 하루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피곤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매 순간을
이미 살아본 것처럼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 근심
속에 똑 같은 하루를 힘들게 살지만 어떤 사람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현재를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시간여행으로 얻은 교훈은 어차피 내가
노력해봐야 바뀌는 게 없기 때문에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해보고 나서 깨닫는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재판정에 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이란 그냥 현재를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받을 박해를 피하려고도 하지 말고 어차피 주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 말해 줄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옷매무새부터 시작하여 온갖
잡다한 것에 신경을 쓰고 만나서는 끊임없이 무슨 말로 이어가야하나
부담을 갖습니다. 만남이 끝나고 나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허무함을 느낍니다. 

박해가 오면 받고 할 말은 주님이 해 주실 테니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내가 해서 더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고 그 결과는 그것이 어떻든 받아들이기만 할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안 좋은 일은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자가 큰 스님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도
없자 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스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미 다
알려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따지냐고 말합니다. 밥 차려주면
먹어주었고 인사하면 받아주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때 동자스님이 골똘한 생각에 빠지자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며,
“이놈아, 생각을 하면 어떡해. 그럼 다 망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동자는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빠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도(道)라는 것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놈이 좋은 결과를 내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하루를 망치게 합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참다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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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제자들의 새로운 싸움/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양들”과 “이리떼”의 의미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에 선할 때는 양이라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같다고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하라고
하신다. 뱀은 지혜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를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박해를 당하면 당장 위험에 뛰어들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게 되면 그들에게 배워 은혜를 누리게 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 안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자꾸 사람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삶이며,
우리는 이 시대에서 순교정신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순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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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먹이를 삼키는 뱀처럼 말씀을 받아 삼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이 벗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닥을 기듯이 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회개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구멍을 빠져 나오듯 악습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거듭 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목숨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지혜입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순박한 기도의 삶이 자연스러운 지혜입니다.
순박한 집중 사이로 기어가는 겸손한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는 슬기롭고 기도는 순박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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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가장 잘한 일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7월13일 금요일
 
가장 잘한 일

오늘은 “가장 잘한 일”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8장 17절 말씀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일평생 무엇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말하기도 하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함이 된 일,
자신에게 기쁨과 보람이 되었던 일을 참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손을
꼽지 않습니까?

함께하는 사랑밭의 소속인 백광순 케냐지부장 SNS 프로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한 일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 역시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일입니다’
평생에 살다가 천국 갈 때도 내가 한 일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얼마나 잘한 일이 되겠습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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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예수님이시라면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7월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10,16-23)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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