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휴식은 일보다 중요하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22 06:47:56    조회 : 230회    댓글: 0

□ 2018년 나해 7월22일 [(녹)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 예레 23,1-6
제2독서 에페 2,13-18
복음 마르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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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6주일

2018년 나해 7월22일 연중 제16주일

1989년 한국에서 세계 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성체대회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오셨고,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을
도왔습니다. 성체대회는 끝났지만, 성체대회의 주제인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전해 주고 있는 조직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올해
30년을 맞이하는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입니다.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는 무엇으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전해
주고 있을까요?

첫째는 교육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빵을 만들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둘째는 생명존중입니다.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는 지속해서
헌혈운동을 하였습니다. 조혈모세포 기증 운동을 하였습니다.
장기기증 운동을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돌아가시면서
안구 기증을 하셨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던 누군가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를 통해서 장기기증을
약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셋째는 나눔입니다.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습니다.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몸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땅을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누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머물 곳이 없어서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엄청난 경제적인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당시의
충격은 전 국민의 가슴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이 전 국민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습니다. 정부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고,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기업을 헐값에 외국기업에 매각하기도 했습니다.
국민, 기업,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제위기를 함께
극복했습니다. 계절이 변하듯이, 태풍이 불듯이 국가적인 위기는 올
수 있습니다. 경제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민족은 냉엄한 국제
질서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런 위기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싸움을 일삼는 민족은 도태될 것입니다. 

서울 교구에는 229개의 본당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믿음과
사랑, 나눔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마음이 열리면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없어서 상가에서 지내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이 성전을 신축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가 건물의 좁은 공간에서
TV 모니터를 통해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 수가 적은 것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잘 알 수 있기에 가족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저도
300명가량 되는 성당에서 3년 동안 신자들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서로를 위해서 나누었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딱 하나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분열된 공동체는 재정적인 넉넉함이 있어도, 화려하고
커다란 성전이 있어도, 신자 수가 많아도 위기를 겪기 마련입니다. 왜
공동체가 분열될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한 시간씩 미사 전에 기도하는 사제는 영적인 힘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마련입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을 먼저 만나기보다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본당은 분열되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찾아가는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훈화, 각 단체의 모임에 가능하면 잠깐이라도 함께
하면 좋습니다. 그러면 몇몇 신자들의 달콤한 말보다는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가 나면 제일 먼저
가서 연도를 바치면 좋겠습니다. 유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유족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에 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흥 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84세이신 어르신께서 파주에서부터
교리를 배우러 오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직행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시고 교리를 배우러 오셨습니다. 가실 때도 마찬가지로
마을버스, 지하철, 직행버스를 타고 가셨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는 저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은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을
말씀드렸고, 강의 주제와 시간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장소 이야기를 하니까 좀 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장소가 멀면 잘
안 가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신앙을
잘 모르시면서도 저렇게 열심히 나오시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늦장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불평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온몸과 마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물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권력이나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잠시의 기쁨은
주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의
핵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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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휴식은 일보다 중요하다

2018년 나해 7월22일 연중 제16주일

<휴식은 일보다 중요하다>

복음: 마르코 6, 30-34    

대학교 시절 본당 청년들과 겨울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2박 3일 코스로 기억을 하는데 저는 산행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팔딱팔딱 뛰며 올라갔습니다. 저녁이 되자 무릎이
아파왔습니다. 군대 있을 때 인대가 늘어난 적이 있는데 조금만
무리를 하면 그렇게 또 늘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여자들보다도 뒤쳐져서 환자처럼 나머지 일정을 간신히 소화해야
했습니다. 휴식을 모르는 기계는 망가질 수밖에 없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휴식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박세리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까지 이끌어준 분은 박 선수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경기에 들어갈 때마다 박세리 선수에게
트로피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트로피가 될 것이니 갖고
가야한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이 되자 세계랭킹 102위까지 추락하였습니다. 그 슬럼프 때
“1번부터 18번 홀까지 너무 길다.”며 지쳐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렇게 슬럼프에 빠져 있던 박세리가 미국 동부의 LPGA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개막 전날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퍼팅 연습을
하다 말고 펑펑 울었습니다. 놀란 아버지에게 그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골프만 가르쳐 줬지, 쉬는 법은 알려 주지 않았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딸을 골퍼로 길러낸 대표적 ‘골프 대디’ 박준철 씨는 “세리에게 즐기며
골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게 후회됐다”고 했습니다. 

세계적 선수가 운동을 즐기면서 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합니다.
어떤 운동이든 모두가 긴장하고 탈진하도록 뜁니다. 그런데 그 수명이
길게 가냐 짧게 가냐는 운동을 즐기는 것보다는 알맞은 ‘휴식’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종류의 멈춰 서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쉬기 위해 멈추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멈춰서는 경우입니다.
쉬기 위해 멈추면 휴식과 충전과 여유를 얻게 되지만 고장이 나서
멈추면 뒤늦은 후회와 회한만이 남습니다. 고장 나서 멈추게 되는
경우를 ‘번-아웃(Burn-out)’ 증상이라 합니다. 자신 안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합쳐진 것처럼 아무 의욕이 없고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대학입시 직전 자녀가
포기해버린다거나, 직장에 잘 다니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지옥
같다고 느끼거나, 별 문제가 없는데도 밤에 일어나 혼자 울게 되는
경우가 바로 충전하는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번-아웃
현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일곱째
날 ‘쉬는 일’이었습니다. 쉼은 일의 마지막이요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창조를 위한 충전입니다. 하느님도 쉼이 없이는 새
창조를 하지 않으신다면 쉼 또한 일의 연속인 것입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왜 그렇게 정복만 하고
다니느냐고 물었을 때 다 하고 나서 쉬기 위해 그런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디오게네스는 술통에 누워 쉬면서 ‘저는 세계를 정복하지
않고도 이미 쉬고 있는데요?’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일의 목적은
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쉬지도 못하고 일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만약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면 어쩌면 인생을 잘못 산 것입니다. 자신이 빠져도 잘
돌아가게 해 놔야 인생을 잘 산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시자마자 떠날 준비부터 하셨습니다. 자신이 떠나도 모든 게 잘
돌아가게 만들어야 잘 쉴 수도 있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는 것은 너무 큰 스트레스입니다. 밤과 낮을
준비하여 갈마들게 하신 이유는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추라는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쉬지 않으면 안 되게 창조되었음에도 우리는
쉴 줄을 모릅니다. 일과 성취가 자신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일이 아니라 일을 안 해도 이미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어야할까요? 우선 ‘자신이 빠지면 일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이 쉬면 더 잘 돌아간다고
생각해야 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다 쉬라고 하시고 당신 혼자 남으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수많은 인파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인파를 당신 혼자
감당하십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보다 예수님께
받는 것이 훨씬 이득입니다. 군중들도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원했을
것입니다. 내가 빠지면 더 잘 돌아간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돌보아 주시고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쉼이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자도
피곤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휴가를 다녀왔는데 더
피곤하다고도 합니다. 쉬는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쉬게 해 주어야 하는 부분은 몸보다도 ‘뇌’입니다. 뇌가
지쳐있으면 아무리 자도, 아무리 여행을 다녀도, 아무리 멍 때리고
있어도 피곤합니다. 뇌는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일을 할 때는 휴가
갈 생각을 하고, 휴가 가서는 복귀할 일이 걱정입니다. 뇌는 일을 하지
않고 있어도 일을 하고 몸이 쉴 때도 일을 합니다. 그러니 항상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쉬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멈추어야합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소재들과 멀리 떨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셨는데 한적한 곳이란 ‘광야’를
말합니다. 사실 광야는 쉬는 곳이 아니라 외로움과 고독을 참아내야
하는 곳입니다. 책도 없고 영화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가장 큰 휴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각을 멈추고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루 중 광야로 가서 쉬는 것을
기도라 하고 며칠 동안 쉬면 그것이 피정이라 합니다. 따라서 기도를
위한 시간을 낼 때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입니다.
기도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기도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대신 채워주십니다. 

현재 교구 사제들의 피정은 일 년에 5일 정도밖에 안 됩니다.
평일미사를 안 하면 원성이 높기 때문에 연수도 가뜩이나 많은데
피정으로 더 빠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신자들도 사제가
피정을 간다고 하면 그 시간에 대해서는 배려해 줄 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휴식은 더 나은 것을 주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제들의 피정은 신자들을 만나기 위한
피로회복과 같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피곤한 얼굴로 자신을 만나러
온다면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사제가 너무 바빠서 피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피곤함 때문에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휴식은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잘 쉬기 위해서는 ‘각자의 휴식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일정시간이나 일정기간
머물 수 있는 자신만의 장소를 가져야합니다.

일정한 장소를 가져야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 성체 조배실도 괜찮고
성당이어도 괜찮고 자신만의 다락방이어도 괜찮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고즈넉한 장소여도 좋습니다. 이 피난처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휴식의 장소를 가진 이들은
번-아웃 상황이 왔을 때 갈 곳이 있지만 그런 곳이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방황하게 됩니다.

장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정 시간’입니다. 일정 시간에
공급되지 않는 휴식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초의 심지가 다
타버리는 경우는 초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초가
계속 공급되면 심지는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너무 오래
공급하지 않아 촛불이 꺼졌는데 나중에 왕창 초가 공급돼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초가 꺼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에너지가 공급돼야
하고 계속 불을 밝히려면 꺼지려고 할 때 새로운 초를 켜야 합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기도시간과 규칙적인 피정기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일에 쉼이 끼어들어가는 것보다 쉼에 일을 끼워 넣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일보다 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균형을 잃지 않게
됩니다. 쉼보다 두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쉼은
기도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도 시간을 내어 쉬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5-16)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외딴곳’도 ‘광야’로 번역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낸 곳과 같은 낱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와도 예수님은
외딴곳에서 기도로 쉬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쉴 줄 모르는 사람은 일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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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매력적인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2018년 나해 7월22일 연중 제16주일

매력적인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업무차 남도 지방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깜짝 놀랄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차창밖으로는 수많은 차량과 인파가 어느 한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바로 주말 저녁 프로야구 경기가
펼쳐질 경기장이었습니다.

다정한 연인들, 떠들썩한 친구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총출동한
가족들...설렘과 기대로 상기된 사람들의 표정이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명문 구단인
홈팀은 9회말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관중들의 얼굴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구장 전체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했습니다.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명문 프로야구 구단이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좋은
선수들을 스카웃하고, 더 의미있고 흥미로운 이벤트를 계발하고, 더
많은 팬서비스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 시대 당시
역시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대 변혁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로 부터 매력을 잃고 떠나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시대
주님께서는 돈보스코를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절정기 시절, 발길 닿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신자들, 청소년들, 특히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의 낡은 수단 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매력은 탁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짙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그와 함께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꺼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떼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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