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5일 넘어지게 하는 자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25 06:09:31    조회 : 236회    댓글: 0

★ 2018년 나해 7월25일 수요일 [(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4,7-15

복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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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18년 나해 7월25일 수.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기말고사의 시험지가 유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좋은 성적을
얻기를 바란 엄마의 그릇된 사랑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유출된
시험지를 보고 공부한 아들은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겠지만 양심은
무너질 것입니다. 불법이기에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은
듣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 때문에 생긴 바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비슷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야고보와 요한에게 좋은 자리를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연히 다른 제자들은 불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영광의 자리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자리는 사람의 힘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는 하느님께서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여러분을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예전에 안면도엘 갔었습니다. 남성 구역봉사자들과 함께였습니다.
방은 2개였습니다. 구역봉사자들은 제게 방을 하나 주고 한방에서
자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면 너무 불편하시니 같이
자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방을 3개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덧, 혼자 자는 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짓,
욕심, 위선, 시기, 질투를 담으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헛된
것입니다. 나눔, 사랑, 봉사, 희생을 담으면 질그릇처럼 보여도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한 번도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파수꾼’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파수꾼은
남들이 잠을 자는 시간에도 홀로 깨어서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주교님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더 크고,
더 무거울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 우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어쩌다 성당을 찾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전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위로와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감사할 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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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금, 여기’의 영성

2018년 나해 7월25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지금, 여기’의 영성>

복음: 마태오 20,20-28

요즘 김기태 씨가 쓴 ‘무분별의 지혜’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김기태
씨는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삶의
의미를 쉼 없이 찾아 헤맸던 분입니다. 수도회도 들어갔었고 배도
타봤던 사람입니다. 이런 방황하는 그를 끝까지 응원해 주었던 사람이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일할 때의 선배였다고 합니다. 그 선배는
김기태 씨가 무언가 찾겠다며 헤매다닐 때 끝까지 응원해 주었고
지리산 토굴에서 수행할 때도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싸서 직접
찾아와 주었고 절에서 50일 단식을 하며 가부좌를 틀고 있을 때도
비를 뚫고 찾아와 건강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참 평화를 찾아 영혼의 모든 갈증이 사라졌을 때 이
기쁨을 가장 처음으로 그 선배와 나누고 싶어 전화하여 만났습니다.

“아내, 그래? 공부가 다 끝났다고? 그럼, 당장 만나야지!”

그렇게 기쁘게 만나 동동주 몇 잔을 걸친 후 선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김 선생! 이제 말해 봐. 무얼 깨달았지? 깨달음이 뭐던가?
깨달은 진리가 뭐야? 궁금해 죽겠어.”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진리였습니다.”
그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김 선생! 누구나 다 아는 걸 깨닫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돌아다녔다는 말이야?”

“예, 누구나 다 아는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저는 34년이
걸렸습니다...”

[출처: ‘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2부 3강 11] 

안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게 삶이 되었다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깨달음의 끝은 언제나 ‘지금,
여기’입니다. 파랑새를 찾으러 떠나도 제 자리로 돌아와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 가장 큰 영성입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다 자아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지금
여기로 돌아와야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현재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의 형인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들이
마지막 때에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다른
사도들의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예수님은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함을
말씀하시며 그들도 따를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질문에 두 형제
사도는 예수님이 마실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대단한 신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실망스러운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말은 야고보나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도 모르니 그들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미래를 왜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만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겸손한 사랑을 할 수 있으면 나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중은
지금의 연속입니다. 지금 나중을 생각하다가는 지금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고3이 대학 생활만 생각하다가는 지금 공부할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바로 이 시간 이
장소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 꼭 해야 하는 일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김기태 씨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구하던 움직임을 그쳐 ‘지금’으로 돌아오니,
나 하나조차 감당할 길이 없어 언제나 힘들어하던 내가 다른 이의
마음속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함께 치유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고, 늘 ‘혼자’임을 한없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던 내가 어느새 많은 사람을 편안히 만나며 그들 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해 주는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어릴 적
아버지의 부재로 사랑을 받지 못해 아무것도 진정으로 느낄 줄
모르는 냉혈한의 가슴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차가운 가슴 속에서
너무나도 깊고 따뜻한 사랑이 나왔다.”

이렇게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주 현재로 돌아와 현재를 살다보면 현재가 쌓이고 그러면
더 자주 현재를 살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과거에 묶이거나 미래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만 생각하며 살아봅시다. 그러면 예수님 옆자리가
나로 정해져 있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면 이미 예수님 옆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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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을 따르는 길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25일 수.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이 그의 동생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출신으로 어부가 직업이었는데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항상 중요한 사건의 증인으로 복음에
나타난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던
그 현장에,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하시는 현장에 증인으로 꼭 등장하는
분이었다.

사도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심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셨고, 성인의 유해는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모셔져 있으며 스페인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 마태 20,20-28: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20,18-19)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엉뚱하게도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서 특별한 지위를 청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예수님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마르코 복음에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고 하신다.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며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그들 모두는
실로 주님의 잔을 마셨지만, 그분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담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그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 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 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첫 자리를 탐하는 것은
허영이다. 선행은 우리의 의지와 활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보상도 받는 것이지만, 첫 자리를 쫓는 것은 하느님의 판단에
끼어드는 것이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런 욕망은 사람을 압제자로
만든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셨고 경멸과 악의에 찬
대접을 받으셨고 죽임까지 당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과 행동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분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니, 만일에
자랑거리를 좇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상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며,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닮지 않은
것은 참된 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처음에는 주님께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결심하고
그러한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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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섬기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늘 눈여겨봐야하고, 최종적인 지향점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상적 모델 공동체인 제자 공동체! 그 공동체 안에도
잠시나마 구성원들의 극단적 미성숙과 야심, 다툼과 분열이 있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됩니다.

가정 공동체나 직장 공동체, 수도 공동체나 교회 공동체, 그 어떤
공동체이건 간절히 꿈꾸는 공동체 상이 있습니다.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공동체, 불협화음이 없는 일치의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에
존경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평화롭고 행복한 공동체...

그러나 결핍과 한계 투성이인 우리 인간들이, 모든 것이 제한된 이
지상에 두발을 딪고 서 있는 이상,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은
요원하다는 것,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 한 가지는, 결정적인 회개를 통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기 전, 제자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 우리네 공동체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미성숙의 극치를 달리던 제자 공동체가 보여준 한 예를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주님께 다가와 한
가지 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러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비록 속보이지만 견딜만한 부족함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바램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너무나 치사해보이는 두 제자의
태도였습니다. 솔직히 그런 야심이 있었다면, 남자답게 직접 스승님께
청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겁하게 자신들은 뒤에 숨고,
어머니를 방패막이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멀었던 두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왕국에 대해서 철저하게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을
통한 이 세상에서의 입신양명을 꿈꿨습니다. 스승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정신은 지상적 통치권과는 철저하게도 거리가
멉니다.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노골적으로 명예로운 자리를
추구한다면, 그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정치인들처럼 출세를 지향한다면, 그는 결정적 회개 이전의
미성숙한 야고보 요한 사도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와 주님을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섬기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야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야심이어야 합니다.

그런 부족함 투성이였던 제자 공동체였지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총의 결과, 깜짝 놀랄 정도의 성장과
변화를 이루어냈고, 마침내 인류 역사 상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빛나는 성공과 승리의 제자 공동체, 그 배경에는 다음의 3가지 비결이
있었습니다.

① 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주님께서 현존하셨습니다.
② 공동체 구성원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고 실천했습니다.
③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 구성원들은 언제나 주님께
달려갔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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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넘어지게 하는 자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넘어지게 하는 자

오늘은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 말씀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겠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 일이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께 항변합니다.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스캔달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캔들’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지요.

그러니까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것 ‘스캔들’은 한마디로
‘함정’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까?

바로 유대광야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혼란케 하고자
여러 가지로 유혹했던 사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할 수만 있으면 세상
유혹으로 함정을 파놓고 걸려 넘어지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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