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나눔의 밥상 둘레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7-29 06:15:33    조회 : 232회    댓글: 0

※ 2018년 나해 7월29일 [(녹)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2열왕 4,42-44
제2독서 에페 4,1-6
복음 요한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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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7주일

2018년 나해 7월29일 연중 제17주일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유배를 가야 했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고,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정에서 가르치는 교육이었습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교리의 문제로,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만여 명이 순교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야 했고, 산속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가족들이 헤어져야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천주교회는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정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회는 많은 발전이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성당이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박해도
없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고백성사를 할 수 있습니다. 단체활동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성경책은
물론 영적 독서를 할 수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사제와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분명 외적으로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문턱은 높아졌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습니다. 80% 이상의 신자들이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판공성사를 보는 신자들의
비율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인 주일 학생과 청년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르치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하니까 조용히 물러나셨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진정한 이유는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다음에 놀라운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사목할 때였습니다. 다리 아래에는
오랜 굶주림과 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냥 지나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자신도 거지이고, 자신도
아프면서 최 씨 할아버지는 다리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냥한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오천 명 아니 오십만 명의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외롭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행복하게 선종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 이런 놀라운 표징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들에 피는 꽃도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면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을 것과 우리가 입을 것을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먹을 것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외로워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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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29일 연중 제17주일: 나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제1독서: 2열왕 4,42-44: 먹고도 남을 것이다

1독서는 복음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44절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43절)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
(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 있어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 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고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의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 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출애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고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제2독서: 에페 4,1-6: 주님도 한 분이시고, 몸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2독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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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 6,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7월29일 연중 제17주일.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 6, 11)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며 진정한 감사입니다.
사람과 빵은 모두 함께 하기 위한 사랑의 성사입니다.
함께하기에 살아갈 수 있고 함께하기에
행복할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함께 하는 깊이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배우며 사랑을 주게 됩니다.

빵에서 벗어 날 수 없듯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의 삶이 바로 해답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줄 사랑을 나눌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성사를 통해 삶은 나누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임을 깨닫게됩니다.
함께 하는 것이 파스카의 축제 사랑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소외될 수 없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오늘도 나눔의 밥상 둘레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할 사람들이며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위한 감사의 진정한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 오늘도 기쁘게 함께 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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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인간은 언제나 절망하지만, 주님은 늘 희망하십니다!
 
2018년 나해 7월29일 연중 제17주일 

인간은 언제나 절망하지만, 주님은 늘 희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아주 ‘살짝’ 하늘나라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세상과
하늘나라 사이에 엄중하게 차단되었던 가림막을 살짝 열어보니,
하늘나라의 광경은 그간 우리가 상상해왔던 곳 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습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아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복음 6장 11~13절)

하늘나라, 그곳은 어떤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주님께서 중심을 잡고 계시고, 그 둘레로 성모님과
사도들, 성인성녀들이 앉아 계시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있는 곳, 더 이상 죽음과도 같은
갈증이 없는 곳, 더 이상 쓰라린 배고픔이 없는 곳,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높낮이도 차별대우도 존재하지 않는 곳, 모든 이가 원없이
먹고 마시는 풍요로운 곳.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상 천국의 모습도 꿈꾸어봅니다.
국회의원이든, 국회 청소 노동자든, 같은 식탁에 앉는 곳,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누구는 특실을 쓰고, 누구는 6인실을 쓰지 않고,
모든 이가 특별대우를 받는 곳, 바로 천국입니다. 재벌이라고 특혜를
받지 않고, 가난하다고 홀대받지 않은 곳, 바로 천국입니다.

제자들의 볼멘 소리와, 그에 반해 넉넉하고 풍요로운 주님 음성이
크게 대조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복음 6장 7절)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복음 6장 8~9절)

보십시오. 인간은 계산하고 잔머리를 굴리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도하십니다. 인간은 부정적이지만, 주님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절망하지만, 주님은 늘 희망하십니다.
인간은 언제나 제한적이지만, 주님은 무한하십니다. 주님은 한
마디로 ‘무한리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2천년전의 한 기적사화로 공부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되풀이되고 실현되어야 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과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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