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5일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9-05 06:23:41    조회 : 24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9월5일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코린 3,1-9
복음 루카 4,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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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특별히 치료할
것은 없지만 혼자서 거동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에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요양병원에는 간호사와 의사가 있고,
간병인이 있어서 어르신들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챙겨 주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고, 현실적으로 거동이
어려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요양병원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봉성체를 하면서
요양병원으로 오는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었고, 색소폰과 오카리나로 노래를 연주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중에도 어르신들을 위해서 봉사하러 오신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 같았습니다. 

산책하면서 중학교의 벽에 벽화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색의
차가울 것 같은 벽이었는데 벽화가 있으면서 상상과 꿈의 벽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걷다 보면 어느덧 학교의 정문에 다다를
것 같았습니다. 벽화의 주제는 ‘고백’이었었습니다. 벽화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있었고, 말하지 못한 것을 예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꿈을 키울 것 같았습니다. 잘못한 것은 용서를
청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벽화를 제안한 사람도, 벽화를 그린 사람도 모두 학생들을 위한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본당의 사목자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긴다면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될
것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갑질 논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당리당략으로
국력이 소모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또한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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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악에 무자비해야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2018년 나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악에 무자비해야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복음: 루카 4,38-44

어린이를 사랑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밤, 방정환 선생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선생은 차분히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까지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소.”

너무도 부드럽고 친절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강도가 더 당황했습니다.
선생이 준 뭉칫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 하는 강도에게 방정환
선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소.”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에게 강도가 붙잡힌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 집으로 들어온 경찰과 강도를 본 선생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또 오셨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쓰셨단 말이오.”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자가 강도입니까.”

방정환 선생의 말에 경찰은 의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서 강도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와 사람은
분명 별개입니다. 죄가 사라져도 사람은 남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시각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병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아마도 정황상 시몬의 장모는 자신의 딸은 버려둔 채 예수만
따라다니는 사위 시몬에 대해 화가 나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시몬의 장모를 탓하시지 않고 그를 잡고 있던 열을
탓하십니다. 장모가 아닌 그녀를 잡고 있는 열이 악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든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 탓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자비이고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일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부터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먼저 병을 이해해야 그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그 병을 얻은
사람의 탓을 먼저 하면 안 됩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그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악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원죄의 영향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의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집단에서 머무르려면 그 집단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시몬의
장모처럼 그런 화병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자비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과 그 사람을 잡고 있는 악을
명확히 분별해야합니다. 자비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악의 잔악함을 명확하게 깨달을 때 나옵니다. 악의 힘이 큼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악에 당하는 사람에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악에는 자비롭고 사람에게는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에는 무자비하고 사람에겐
자비로우십니다. 악이 당신을 찬미하더라도 예수님은 악에
무자비하게 대처하십니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악은 악으로 대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대해야합니다. 악과 타협하면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도
치유해줄 수 없습니다. 악의 잔악함을 알 때 사람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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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은총을 받음은 봉사를 위한 것/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4,38-44: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의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에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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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붙드는 인간, 떠나시는 주님!

2018년 나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탄복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나자렛
사람들은 박수와 찬사를 보내도 부족할 지경인데, 자신들의 치부와
속마음을 들킨 것으로 인해 크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무슨 소나 돼지도 아니고 내몰기는 왜 내몹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벼랑 끝까지 몰고간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명백한
살의(殺意)를 지녔으니,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살인미수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정 반대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메시아를 거부하고 추방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분은 붙드는 행위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듯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붙들어서는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셔야 할 크신 분이기에, 작은 고을 카파르나움에만
머물러 계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뿐만 아니라, 온 갈릴래아 지방을 넘어,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을 구원하셔야 할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 전체를 다스리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아쉽지만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붙드는 인간, 떠나시는 주님! 오늘 우리 역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역시, 크신 주님을 내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고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크신 하느님을
너무나 작고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켜 놓는 그릇된 신심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더 큰 바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셔야 할 분입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따라 더 먼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 역시 더 넓은 세상으로 힘차게 뻗어나가야 할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 누구에 의해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지당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활동 영역은 그 어떤 이념, 종교,
민족, 인종이든 경계를 초월해서 활발히 퍼져나가야만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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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천배의 복

9월5일 수요일

오늘은 “천배의 복”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1장 11절 말씀에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의 대목을 접할 때 마다 저는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요동치는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고는 터질 것만 같은
전율과 환희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 배의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정말 저는 그 천 배의 복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복이라면 과욕이요 욕심이겠지만 오늘의
신명기 1장 11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천배의
축복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그대로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말씀을 믿는 자가 되고 또 천배의 복을 받는 자가
되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배의 복을 주셨다고 그들이
인정하는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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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때를 안다는 것|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루가 4,38-44)

때를 안다는 것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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