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9-09 07:16:05    조회 : 232회    댓글: 0

▣ 2018년 나해 9월9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이사 35,4-7ㄴ
제2독서 야고 2,1-5
복음 마르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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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3주일

2018년 나해 9월9일 연중 제23주일

식물은 움직임이 거의 없습니다. 뿌리는 땅속에서 움직일지 모르지만
줄기는 천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식물이
동물보다 더 멀리 더 많이 퍼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다리가 없어서 걸을 수 없고,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는 식물이 멀리
퍼질 수 있는 것은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씨는
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도 합니다. 곤충들이 옮겨주기도 합니다. 새가
날아다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 없는 식물은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바람이 선택한 것 같고, 곤충이 선택한 것 같고, 새가 선택한 것
같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선택한 것입니다. 

강대국들은 가난한 나라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더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합니다. 강대국들이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고 가난한
나라와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염물질의 배출량을 줄이고
환경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꽃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가난한
나라에서 에너지를 가져다 쓰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지원이 많았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이바지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들은 가난한 나라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대기업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이것인 신앙인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트리리라.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냇물이 흐리리라.”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말입니다. 오늘의 화답송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을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돌보시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이방인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자리를 피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된다고 자리를 피합니다. 사제는 다른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자리를 피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즉시 아픈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이 더 들면 오는 길에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오늘 제2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앙인은 가진 것으로, 직책으로, 혈연으로,
이념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돈이 있어서, 여유가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마음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에파타’ 마음이 열리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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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귀를 막아야 잘 들린다

2018년 나해 9월9일 연중 제23주일

<귀를 막아야 잘 들린다>

복음:마르코 7,31-37

어떤 부인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한 정신과 의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같이 살 수 없을 거 같아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이라 자기가 하기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요.”

그 말을 들은 의사는 싶은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병원 옆으로 조금 가시다 보면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그곳은 신비의 샘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물을 통에 담아 집으로
들고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드십시오. 그런데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실행 한다면 아마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부인은 의사의 말대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아내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부인도 맞받아쳤겠지만 그날은 의사가
가르쳐 준대로 신비의 물을 입안 가득히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남편의
잔소리는 잠잠해졌습니다. 그 이후도 남편이 화를 낼 때면 부인은
어김없이 그 신비의 물을 입에 머금었고 그것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해갔습니다. 신경질이 줄고 아내를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변해갔습니다.

부인은 너무 기뻐 의사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러 갔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 신비의 샘이 너무도 효능이 좋더군요.
우리 남편이 싹 달라졌다니까요.”

의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남편에게 기적을 일으킨 것은 그 물이 아닙니다. 당신의
침묵입니다.” 

아내의 침묵은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 남편은 이해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럼 변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도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나의 말을 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들어주기만 해도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잘 유지될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하는데, 그 자매님이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했을 때 옆구리 대상포진이 오던 것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말을 해 주셨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아는 지인과 함께
탔는데 옆구리에 통증이 오는 것이 꼭 대상포진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던 자매는 곧바로 그 자매의 손목을
잡아끌고 내려 공원에 앉아서 장장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어려운 일들이 겹쳐있어서 힘들었는데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 일어나보니 통증이 전혀 없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잘 들어주는 것도 커다란 은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의 이야기에 잘 공감할 줄 모르기도 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 주기는 하지만 진정 함께 눈물
흘려줄 준비는 돼 있지 않은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왼쪽 귀가 조금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학할 때 귀
속으로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신경을 죽였고 그만큼 이명이
생겼습니다. 쇠 가는 소리가 계속 납니다. 그때 평생을 이명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침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명이 큰 도움을 줍니다.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기도할 때나 일생생활 할 때 오히려 이명을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명을 들을 때는 다른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본인은 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판단입니다. 나의
귀를 막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끊임없이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말이 끊임없이 판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화를 내거나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은 치유해주십니다.
그런데 먼저 그 사람의 귀를 당신 손가락으로 막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귀를 막으시는 것일까요? 이미 군중에게서 그를
데려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이유는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시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끊는 것이 잘 들어주는 것이고 잘 들어주는
것이 곧 잘 말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에 귀를 막아야합니다. 내가 나에게서 떠날 때
상대의 말을 온전하게 공감하게 됩니다. 

영국의 위대한 인상파 화가인 죠셉 터너(Joseph M. Turner)는 거센
폭풍이 일어난 바다를 그린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친구를 자기
화실로 초대했습니다. 터너의 그림을 본 친구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완벽해! 아니, 자네, 이렇게 실감나는 폭풍우 장면을
그릴 수 있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터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폭풍이 이는 바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서, 그는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한
바닷가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서 터너는 고기잡이로 생활하는 한
어부에게 돈을 주면서, 다음에 폭풍이 일기 시작하면, 자신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죠셉 터너는 어부에게 자신을 돛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터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성난 파도와 폭풍우를 본 것이 아니라네. 아마 폭풍우를
느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걸세. 거센 폭풍우가 나에게 불어와서
어느새 내가 폭풍의 한 부분으로 그 안에 서 있다는 느낌을 느꼈단
말일세.”

어쩌면 진정으로 듣는다는 말은 그 말을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 끼어들면 그 말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3자로 판단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제3자로 듣는 것은 영원히
남의 이야기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공감해줄 수 없고 상대와
친밀해질 수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주님 말씀 안에
들어가 그 말씀을 체험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3자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내
목소리에 귀를 막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 침을 말 더듬는 사람의 혀에 발라주신 이유는
당신 말씀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체험되지 않은 말, 혹은
진정으로 이해되지 않은 말은 힘을 갖지 못합니다. 체험한 것을
그리는 것과 멀리서 본 것을 그리는 것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기도
안에서 얼마나 자아로부터 멀어져 주님 안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더
깊은 묵상을 할 수 있고 더 충실히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듯 먼저 자아의 소리에 귀를
막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자아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곧 유혹이고 자신 안에 갇히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생각을 멈추어 자신 밖으로
나와야합니다. 자신 안에 갇히면 영원히 듣지 못하는 사람이요
말더듬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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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예수/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9일 연중 제23주일: 나해: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예수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군중들의 이 말은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구원의 표징을 예언한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는 말씀에
연결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하면서 가졌던 신학적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이사 35,4-7: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고...

이에 대한 근거가 바로 오늘 제1독서이다. 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의
귀양살이 중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다가오는 해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4절)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들은 진짜
기적적인 사실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마침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놀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짜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시키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지금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보고 듣고 즐기도록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어줄 것이다.

복음: 마르 7,31-37: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소리를
내다, esténaksen의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 선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 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벙어리가 될 수 있다. 벙어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의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죽은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송장 속에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혀진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제2독서: 야고 2,1-5: 가난한 사람들을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제2독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5절) 잘 들으라고 한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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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 역시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2018년 나해 9월9일 연중 제22주일

우리 역시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에파타!’ 복음을 접할 때마다, 제 지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수도회 입회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통 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다보니, 당연히
말주변이나 말재주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꿔다놓은 보리자루!’

어떤 정소를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의 투명 인간처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창시절 제
생활기록부에 단골로 적혀있던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격,
남 앞에 나서기를 지극히 꺼려함,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얼마전, 몇 십년 만에 해후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가 주도한 한 강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뀌어버린, 제 모습에 강의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변화된 제 모습을 보며,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 신앙 여정 안에 ‘에파타!’라고 외치시며
저를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또 다른 깨달음, 또 다른 시야를
지니도록 계속해서 ‘에파타!’ 작업을 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고, 죽기살기로 노력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
힘을 보태주십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한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면 기적이 가능합니다. 제대로 한번 변화되어 보려고, 제대로 한번
눈을 떠보려고, 제대로 한번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다보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리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되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듣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놓치며 살아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늘한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동료 이웃들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목소리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징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 반드시 해야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주님의 한 말씀,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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