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0일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자신을 찾는 것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09-30 06:13:27    조회 : 224회    댓글: 0

▣ 2018년 나해 9월30일 [(녹)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민수 11,25-29
제2독서 야고 5,1-6
복음 마르코 9,38-43.45.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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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6주일

2018년 나해 9월30일 연중 제26주일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여름의 뜨거움도, 태풍도 가을의 결실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마음으로 10월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 한결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고난의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했던 성모님과 여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대신 지고 갔던 시몬과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주었던 베로니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차 트렁크를 닫지 않고 하루가 지났더니 차가 방전이
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보험사에 전화를 해서 시동을
걸었지만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제게는 아직 ‘눈이
오는 추운겨울에도 푸른 소나무와 전나무’와 같은 한결같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험사에 전화를 하니 몇 가지 알아보는
절차를 하였고, 곧 차량 정비사와 연결해 주었습니다. 차량 정비사는
친절하게 배터리 충전을 시켜주었고, 차는 힘차게 시동이 걸렸습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조금 넘었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고, 평양 선언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잡은 것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북한을 믿지 못하는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북한이 미국으로 기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중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한반도가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일본도
설득해야 합니다. 남한 내에 북한을 믿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한반도의 평화는 인내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조금 늦더라도 한걸음씩 천천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능력이 모세와 함께 있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에게 내린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병자를 치유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 성서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식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라 말을 할지라도 영적식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고독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는 늘 좋은 결실이
맺어집니다. 악한 영을 따를 때도 우리는 위로를 얻기도 하고, 고독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악한 영을 따를 때는 언제나 나쁜 결실들이
맺어집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는 향수 냄새가 납니다. 담배를
많이 핀 사람에게는 담배 냄새가 납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달리고, 배나무에서는 배가 달리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인지, 악한
영의 뜻인지를 ‘결실’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했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비록
고독과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악한 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열과 갈등, 미움과
상처’가 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이기심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쁨과 평화, 나눔과 사랑’이 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인내와 친절, 겸손과 양보가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식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식별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했고 지식이
모자란 사람들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 있어도 ‘영적인 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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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안 믿다간 끔찍한 일 영원히

2018년 나해 9월30일 연중 제26주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코 9,45;47~48)”

사람이 죽어 어떻게 되는 지 궁금하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서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 안 믿다간 끔찍한 일 영원히 당합니다. 절대 믿어야한답니다.

사람은 만물과 달리 혼령이란 것이 주체임 알고 책임져 살아야합니다.
죽으면 육신은 흙되고 정신주역 혼령 지배는 비 물질계원리가 합니다.
혼령은 인생 윤리성대로 초자연계인 하늘행과 지옥행이란 설명입니다.

몸과 감정우선 앞세워 살았으면 내 혼령은 정신(精神)무능 마비상태죠.
내 혼령 무시해서 비뚤어진 내 정신 이제 인터넷교리 배워 바로잡아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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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온유해지려면     

2019년 나해 9월30일 연중 제26주일

<온유해지려면>

복음: 마르코 9,38-43.45.47-48

태초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당나귀는 자꾸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귀를 잡아당기시며 (당나)귀를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벌이
자꾸 침을 쏘아서 많은 동물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번엔 벌이 침을 한 번만 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 가장
불쌍한 것은 양이었습니다. 독사가 물면 물리고 맹수가 덮치면
잡아먹혔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양을 불러 은근히 물었습니다.

“너의 이를 옥니로 하고 네 발톱을 갈퀴발톱으로 바꿔 줄까?”
“아, 아닙니다. 저는 육식하는 맹수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의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럼 너의 입 속에 독을 감춰둘까?”
“아이고, 그건 더 싫습니다. 뱀들처럼 미움을 받고 살기는 싫어요.”
“그렇다면 너의 이마에 뿔을 달아주면 어떨까?”
“그것도 안 되겠어요. 염소는 걸핏하면 뿔로 받으려 하거든요.”

양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를 본 창조주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큰
축복을 양에게 내렸습니다.

“오, 착하고 어진 양아! 너는 힘이 없어도 땅에서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이름은 어진이들의 상징이 될 것이며 어느 힘센
짐승보다도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주위엔 어떤 맹수도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줄 목자를 세워줄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따듯함입니다. 양이 만약 사람의 성격을 상징한다면 바로 이 따듯함,
다른 말로는 ‘온유함’을 지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박사가 한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지는 않지만
천으로 감아서 만든 어미 인형을 젖이 나오는 철사 인형보다 더
좋아한 예는 매우 유명합니다. 동물도 그렇지만 인간도 무엇을
해주느냐보다는 따뜻함이 관계의 우선입니다. 누구나 차가워
냉소적이거나 너무 뜨거워 자주 화를 내는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그 온유함은 매우 획득하기 어려운 덕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온유해질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부드러운 척 하려다가도
어느새 화가 솟구치거나 쏘아붙이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온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처음 부분 예수님은 매우 온유한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아보려 했다는
제자들에게 다음부터는 막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하여 물 한 잔만 주어도 반드시 그 상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매우 자비롭고 따듯한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후반부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데
무척 매몰차십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시고, 손과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정리하자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겐 그 삶에 있어서 철저함을
강조하시는 것이고, 아직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겐 매우
온유하신 태도를 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전적으로 ‘외유내강
(外柔內剛)’이라 하였습니다.

‘외강내강’, 혹은 ‘외유내유’란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내적으로도 강하고 외적으로도 강하거나, 내적으로 유하고
외적으로도 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온유하면 이웃에겐 매몰차게 돼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 온유하게 대처하면 그 탓을 누구에게든 돌려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매몰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온유하려면 그래서 자신에게는 매몰차야합니다. 어느 하나가
강해지면 어느 하나는 약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겐
매몰차야하고 외적으로 매몰찬 사람이라면 내적으로는 물러터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
자신이 온유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겐 매몰차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 오히려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내적으로 그만큼 많은 단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잔인하게 만드는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를 매몰차게 죽이지
않으면 외적으로 온유해지기는 불가능해집니다. 화와 짜증과 불만이
많아지고 언어가 거칠어진다면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해 너무 무르게
대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온유함은 자신과의 싸움의 대가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온유함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방법은 그 성령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 철저한 기도시간을 지키는
일입니다. 구약의 야곱이 에사우 앞에서 온유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밤새 주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씨름 마지막에 천사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분지릅니다. 그래서
덕분에 절뚝이게 되었는데 이로써 얻은 것이 온유함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을 의미하고 하느님과 씨름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거기서
오는 성령의 힘으로 나의 자아의 정강이가 부러지면 자아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렇게 야곱은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고, 에사우는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야곱을 용서하고 안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에사우가
주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
지구를 매몰차게 대하여 후손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들에게 매몰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에게 포악하지 못하면 바깥으로 포악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지내다 화 한 번 잘못 내면 평생 어색한 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화해하라는 식의 권고를 받아들이면 자신을
망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지 십자가를 거부하는 마음과
화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은 화해의 장소가 아니라
싸움의 장소였습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말고 포악해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포악해지지 않으면 누군가와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포악하라는 것이 자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손을 자르고 눈을 뽑으려는 강한 의지로 싸우라는 뜻입니다.
자신과의 싸움 없이 이웃에게 온유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는 전리품과 같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온유함이 있어야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가 살 땅이 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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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신앙은 모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30일 연중 제26주일: 나해: 신앙은 모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아야 하며 본질적으로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제1독서: 민수 11,25-29: 이 백성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1독서에서는 이 사상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도와
백성들을 지도할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영을 내려주셨는데(25절),
여기에 뽑히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도 그들과 같은 영을
받아 입신을 하게 된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우리의
영도자여,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십니다.』 그 때에 모세는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8-29절).

모세의 이 대답은 참으로 놀랍다.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또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이 진실로 예언의 영을 받아 신앙상의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말과 생활로써 주님의 놀라운 신비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복음에서는 전반부에 예언의 행위가 아니라, 구마행위를 다루고 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께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38절)라고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의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태 12,30)라고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의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자 맷돌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R. Fabris, in I Vangelli, Assisi 1978, p. 778).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43-48절 참조).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신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제2독서: 야고 5,1-6: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공동체 내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만일에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고 그들의 경작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품삯을 계속
착취한다면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다(1-3절).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있는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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