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8일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0-28 06:50:14    조회 : 226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0월28일 [(녹)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31,7-9
제2독서 히브리서 5,1-6
복음 마르코 10,46ㄴ-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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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0주일

2018년 나해 10월28일 연중 제30주일

지난 17일입니다. 대통령께서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에 참례하였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교황청 관계자와 참석한 내빈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대통령의 인사말을 듣고 보면서 참 기뻤습니다. 인사말에 진정성이
있었고,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고, 한반도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대통령의 인사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던 교황님들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선교사 없이 스스로 신앙을
선택했던 한국교회를 본받으라고 하였고,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의
신앙과 열정을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인이 되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103위 성인을 시성하셨고 한국을 2번 방문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반도의 평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평창 올림픽에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지난번 판문점 선언이 있기 전에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족을 만나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의 기도와 관심은 한반도의
평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었던,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한국 교회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권력의 굴하지
않았던 한국 교회는 어둠 속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대통령 본인도 오랫동안 천주교 정의 평화 위원회와
인권 위원회에서 봉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연대했던 한국 교회는 존경받는 종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교회의 기도가 한반도의
평화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통령은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의 염원이 한반도 평화를 싹틔우는
씨앗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씨앗은 분명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다짐을 하였고, 그 다짐은 하나둘 실현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으며, 앞으로도 더
만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꿈을 혼자서 꾸면 꿈으로 남지만 여럿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인류와 평화를 위한 사람들의
염원과 기도가 함께 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꼭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눈이 먼 바르티메오는 주님께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메오는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바르티메오는 곧 다시 보게
되었으며,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주님께 청한다면 오늘
제1독서의 이야기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려오고 땅 끝에서 모아들이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은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그래서 더욱 가슴깊이 다가옵니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 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눈물로 씨 부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우리는 모두 즉시 예수님을 따랐던 ‘바르티메오’와 같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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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의견과 믿음의 차이

2018년 나해 10월28일 연중 제30주일

<의견과 믿음의 차이>

복음:마르코 10,46ㄴ-52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들은 빅데이터나 과학을 근거로 내려진
합리적인 판단에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첫 인상이나 통찰, 혹은
직관에 의한 판단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랜
연구를 통해 내려진 합리적인 사고가 꼭 다 들어맞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화론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의견이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믿음이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쿠로스 석상이 발견되어 박물관이 구매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조각상을 잠깐 훑어본 두 명의 전문가가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박물관은 이 두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이 석상의 진위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별도의 팀을 꾸려
14개월간에 걸쳐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의 예상대로 이
유물은 기원전 6세기의 진품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말해왔던 전문가들 때문에 계속해서 진품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재검증을 거쳤고 결국 1980년대
만들어진 가짜로 밝혀집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분석 작업보다 한
번 훑어본 전문가의 직관이 더 정확했던 것입니다. 14개월의 조사보다
첫 2초의 직관이 더 정확했다는 것입니다.

[참조: ‘블링크’, 말콤 글래드웰]

의견은 쉽게 변할 수 있지만 믿음은 온 세상이 반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의 힘이 아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신의 부모라 여기는 것은
여러 분석에 따른 의견에서가 아니라 순간적인 통찰력을 통해 생긴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지 공부로 넣어지는
무엇이 아닙니다. 그리고 합리적 의견이 아닌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실제로는 의견의
수준밖에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돈 앞에서 약해지고 애정 때문에도
약해집니다. 청년회를 열심히 하다가 개신교 신자를 만나서 개신교
신자가 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성체를 무엇이라
여기고 영했던 것일까요? 개신교에 가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지금까지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오리인지 백조인지 모르면 고통 속에서
오리도 되지 못하고 백조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학 나가서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문 지도 교수와는 물론이요,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과 싸워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경공부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도 모두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당시의 성경공부와 차이가 없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의해 해석되지 공부를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자를 연구하고 시대상황 등을 연구함으로써
성경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성사(聖事)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진리가 눈에 보이는
문자 안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세상 것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성사인 것입니다. 성경도 성사이고, 성체도 성사이고,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님도 성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문자이고,
밀떡이고, 시골 처녀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문자 안에 진리가 있다는 믿음, 밀떡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 마리아 안에 하느님이 잉태되어 계시다는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물이
성령이요 그 바위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으로 성경을 새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해석만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이런 해석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밀떡의 성분을 조사해보고 연구해봐야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공부해봐야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개신교도 그들 나름으로, 천주교도 그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연구를 많이 한다고 자신들의 믿음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아기는 포크를 보면 그것을 먹는 것인 줄 알고 입에 집어넣습니다.
아직 그것이 무엇에 사용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믿음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더 충만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 자세한 역사적 배경이나 쓰이게 된 동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성서학자들이
반대하더라도 저는 이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목숨까지 걸 수 없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맞설 수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혼자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의견은 자신도 이웃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믿음은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소경 바르티매오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하도
그러니 많은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거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먹을 것도 얻지
못할 수 있지만 이번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의견과
맞섰습니다. 마치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도 그러면 안
되어서 가라앉는 배에서 혼자 뛰쳐나오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세상과도 맞설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이 그렇게 순교하였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세상 사람들이
짓누를수록 더 크게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생각할
때까지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돈을 제일로 여길 때, 우리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길을 갈 때 ‘이 길이 맞나,
틀리나?’를 생각하면서 간다면 비록 그 길이 맞아도 그 길을 가는
동안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 확신을 줄 수
있고 흔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겠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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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기 위해 필요한 빛/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8일 연중 제30주일: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기 위해 필요한 빛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바르티매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복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복음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맹인의 치유사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치유사화는 마태오
복음(20,29-34)과 루가 복음(18,35-43)에도 나타나는데 모두가
수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찾는 장면을 시작으로
(마르 8,22-26),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8,27-30)과 예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는 장면을(8,31-33) 생각할 수 있다. 신앙의 절정 상태에 있던
베드로조차 하느님의 계획에는 눈이 멀려고 한다. 하느님의 계획들은
결코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자.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눈이 멂”으로 당하는 비극적 현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전 생애를 거쳐 그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소경은
어떻게 하는가? 그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52절). 이것은 “믿음”이 그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보는
데만 호기심이 있고 그 수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군중들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47절) 예수께서는 메시아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어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시아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의미의 메시아는 아니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치유된 소경 바르티매오가 한 것처럼 바로 그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믿음은 그 소경의 경우, 예수의 중재역할로
그를 낫게 하여 구원하였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켜 그분이 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베풀어주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준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p. 125-126).

제2독서: 히브 5,1-6: 너는 멜키세덱의 사제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2독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구약의
사제직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여러 번 그리고 백성들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을 봉헌했지만(3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단 한번 희생제물을 바치셨지만 완전한 제물을
봉헌하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형제들을 위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의지’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 10,10).

여기에 나오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6절)는 것도 그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왕이며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척도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희생에 이르는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와 같은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당신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보고,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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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 5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8일 연중 제30주일.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 52)

자연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속이는 마음에 필요한 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맑아짐을 다시 보게됩니다.
어떠한 마음의 눈을 지니고 사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눈을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올바로 보는 것이 소중한 서로의 의미를
만나고 깨닫는 은총이 됩니다.
믿음 속에 치유가 있습니다.
치유는 믿음의 안목으로 나와 너 우리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십시오.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고 믿음으로 찬미하는
은총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비로소 주님이 중심이 되는
올바른 믿음을 청합니다.
믿음으로 다시 보게하여 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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