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 모든 길의 시작에는 봉헌이 있었습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1-21 06:52:14    조회 : 247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1월21일 수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 2,14-17
복음 마태오 12,46-50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2018년 나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강의 중에 ‘소와 사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는 여물을 좋아하고,
사자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자기의 생각으로 사자에게 여물을
주었습니다. 여물이 맛이 있고, 몸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소를 사랑하기에 맛이 없는 여물을 먹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소는 사자도 여물을
좋아 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해 준 것입니다. 소가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사자의 마음을 보았다면 사자는 여물 대신에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는 자신이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소와 사자의 이야기는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주변을 보면 소와 사자의 이야기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식에게 주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에게
주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추석부터 몸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한 평생 가족들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방황하는
아들 때문에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셨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진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걷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사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모님은 피보다 뜻으로
어머니시다

2018년 나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성모님은 피보다 뜻으로 어머니시다>

복음:마태오 12,46-50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증오심이 생길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구약의 이사악입니다. 이사악은 아버지로부터 제물로
바쳐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악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구해준 처녀와 혼인합니다. 물론 이사악이 아버지를
증오했다거나 보복을 하려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하지 않았다면 이사악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악은
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아버지의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핏줄의 애정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믿음을 닮은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려 했던 것은 오히려
이사악을 새로 태어나게 만들려는 하느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것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다시
태어남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비롯됩니다.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사랑을 받는 사람 안에서 그 사랑을 주는 분의 뜻을 따라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이 받은 것이 없는데 주인을 따라주는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밥이라도 주고 눈길이라도 주니 주인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태어남은 자신에게 양식과 보호를 준 부모의
뜻을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부모의 뜻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뜻을 받아들이면 봉헌이 시작됩니다. 자신을 바치는 것보다
자신의 뜻을 바치는 것이 봉헌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여
아이들은 자신의 뜻을 바칩니다. 게임을 하고 싶어도 공부를 하고,
인사를 하기 싫어도 어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참다운
자기봉헌입니다. 이사악은 자신 때문에 아파해야 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르며 새로 태어났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세 살이 되던 때부터 성전에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신 고백을 세 살 때부터,
그러니까 자의식이 생긴 때부터 하고 계셨다고 보아야합니다. 나를
봉헌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 뜻을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고 하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을 피로써만 낳으셨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인 당신의
어머니가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뜻’으로 낳으셨습니다. 모든 새로 태어남은 뜻을 통해
성취됩니다. 뜻으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누군가가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그 봉헌 덕분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분은 성모님밖에 없습니다. 뜻으로 낳는다는 의미를
아시는 성모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에
기분 나쁘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피보다 뜻으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십자가에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다보면 내가 새로 태어나고 내 뜻을 받아들이는 이웃들이 새로
태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뜻을 통한 낳음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되고
창조자가 되는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작품을 만들면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처럼,
위대한 창조, 즉 하느님의 자녀들을 낳는 그 기쁨은 세상 어떤 기쁨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래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라는 기도를 충분히 들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라고 하듯, 당신이 뜻으로 낳은 아드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난 자녀도 기쁠 수밖에 없어서, “태중에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당신을 닮아 아버지의 뜻대로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 일을
하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아 하느님 뜻대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성모님을 기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우리
뜻을 봉헌하는 자기봉헌이 쉼 없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할 때 나도 태어나고 나를 통해
누군가도 또 태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자로서의 하느님
기쁨에 참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 [수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축성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다고 한다. 세 살 된 마리아가 선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 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는 선한
영 일곱과 악한 영 일곱이 있다. 선한 영은 지혜, 분별, 경륜, 용맹,
지식, 경건,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며, 악한 영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반대되는 교만의
영이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45절)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악마인 그 자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고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고
하신다. 즉 그분은 순종하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순종하는 친족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이름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수도회]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신앙의 소유자, 성모님
 
2018년 나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신앙의 소유자, 성모님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해보니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성모님은
구세주 하느님을 당신의 태중에 셨습니다. 몸소 그를 낳으셨습니다.
오랜 세월 그를 당신 품에 안고 고이고이 길렀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며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한 남모를 고초와 아픔과
상처가 왜 없었겠습니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마태오 복음 사가는 우리에게
성모님의 고통과 상처를 살짝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공생활을 위해 예수님께서 출가(出家)하신 이후, 성모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아! 이제 내가 할 일 다 했다. 고생할만큼 했으니, 이제
발 좀 쭉 뻣고 편히 쉬자.’하면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계모임도
하시고, 관광도 다니고 그러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출가 이후에도 성모님의 안테나는 항상
예수님이게로 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할까?
끼니나 챙기고 다니는지? 누가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없을까?’늘
노심초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에게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줍니다. “자네 아들이 미쳤다는군.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다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성모님께서는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신 후,
서둘러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달려오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아무리 바쁘셔도, 어머니가 오셨다는데, 한번
나가뵈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다들 예수님께서는 ‘그래요? 어머니가 나때문에
걱정되셔서 그 먼길을 오셨군요. 나가보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꽤나 의외였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복음 12장 48~50절)

뜻밖의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기도하고
인내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한 평생은 신비스럽고 심오한 존재, 예수님, 그리고
그분이 던지시는 영적 말씀을 이해하고 헤아리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신 나날이었습니다.

성모신심과 관련해서 항상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여인, 믿음과 봉사의 여인으로서의 성모님
모습은 뒷전에 둔 채 끝도 없는 한 개인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채워주는 기적의 여인으로서 성모님만을 추구해서는 곤란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어떻게
협조하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유혹 앞에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성장시켜나갔는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모님의 가장 큰 업적은 한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했고,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고, 그 말씀을 매일의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특별한 기적을 되풀이하는 능력의
여신(女神)이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잡다한 소원들을 원 없이
채워주는 완벽한 해결사여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황홀한 신비로
이끌어주시는 묘한 분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모님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칭송합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던 빛나는 믿음을
찬양합니다.

한결같은 자세로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던 충실성을 공경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신
분이기에 존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 성장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비워냈던 분이라서 사랑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 [수도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21일 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 50)

우리 영혼을 자라게하는 봉헌입니다.
마음을 다잡게하는 봉헌입니다.
따뜻한 봉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와같이 봉헌이 길이 되고 봉헌이 감사가 됩니다.
마리아의 첫 기도또한 봉헌이었습니다.

모든 길의 시작에는 봉헌이 있었습니다.
봉헌의 순간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순간입니다.
믿음을 되살리듯 사람을 살리는 봉헌의 길을 우리또한
걸어가야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봉헌의 삶을 마리아는
꿋꿋하게 걸어가셨음을 기억합시다.
봉헌의 삶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자신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소중한 실행은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 [기타] 11월21일 (수) - 육에 속한 사람

오늘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14절 말씀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육에 속한 사람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우선인 아닙니까?
자기의 이익을 찾는 사람입니다. 우선 나부터 챙기는 사람이지요.
바로 이러한 사람은 지금도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서서 힘이 되거나 도움이 되려고 하지 않고
나와 무슨 상관있냐는 생각을 하며 자기 일이 아니면 남의 일처럼
생각 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생각이나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전체 인생을 좌지우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인생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사람, 그를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 [청주] 예수님의 가족|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마태12,46-50) 

예수님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는 뜻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 믿음에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서 행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지킨 분으로 참
가족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하셨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행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가
그분의 모범과 표양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4,24).
영적인 사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순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형님과 누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가족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실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