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정의란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1-25 23:53:45    조회 : 20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1월25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 7,13-14
제2독서  요한 묵시록 1,5ㄱㄷ-8
복음 요한 18,33ㄴ-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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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2018년 나해 11월25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사 신부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971년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가난한 아프리카의 참담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풍요로운 미국과 가난한 아프리카의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신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제로서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지인들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한국의 가난한 아이를
입양하려는 따뜻한 이웃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웃은 법률을 배우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온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한국 동요를 배우면서 한국에서 온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집을 방문했는데 아이의 아빠가 먼저
인사 온 아이에게만 과자를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렇게 하면
과자를 받지 못한 아이가 서운해 할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아빠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눠
주니까 서로 나눌 줄을 모르더랍니다. 누가 오던지 먼저 오는
아이에게 주었더니 형제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형제들은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위한 헌신과 노력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서로의 능력과
재능이 다른 것은 빼앗으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삶을 주신다면 이것은 진정한 평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로봇처럼 70억이 같은 삶의 질을 가진다면 행복할
것인가? 우리끼리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간다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놓았는데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욕심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의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나누도록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돕는 것은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정의란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산은 잔고가 많으면 흑자이지만 하느님의 계산은 받은 것을
적게 나누는 것, 그래서 내 능력의 잔고가 남은 것이 적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쟁력은 협동으로
나옵니다. 백지장도 함께 들면 좋다고 합니다. 함께 나누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봅니다. 경쟁력은 경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협동에서 나옵니다. 경쟁은 적을 만들고 협동은 친구를 만듭니다.
사랑과 나눔은 공감 능력에서 나옵니다. 

신구약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이고, 메시아의 시대에는
그들의 처지가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작을 하셨고,
제자들에게 과업을 맡겨 주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 사목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에는 물질적인 가난이 있고, 영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물질의 유무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을 부유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정착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지고, 인간관계가
조직화됨으로서 이 세상을 순례의 여정이라고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인간 상호관계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메시아를 보내는데 가난한
이들이 구원받습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자리가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었고, 그들은 대림
(待臨)을 살고 있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오십니다. 성모님은 마음이 가난한 이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임을 믿고,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성모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처지가 바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초대
교회는 찬미가를 성모님의 노래로 함께 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경배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오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 선포였습니다.
그리스도 왕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 왕이 어떤 왕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그리스도 왕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을 따를 수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 때문에 박해를 받고, 모욕을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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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 왕의 백성이
되는 법

2018년 나해 11월25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그리스도 왕의 백성이 되는 법>
복음: 요한 18,33ㄴ-37

라즈 라후나탄 교수의 ‘왜 똑똑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란 책은
최고의 석학들의 명강의 모음 ‘코세라’에서 1,700만 회원이 뽑은 인생
최고의 강의 내용입니다. 행복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쓰이고
검증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복을 갉아먹는 7가지 죄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솔루션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들입니다.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평생을
걸쳐 연구해 온 것들이 그리스도의 단순한 가르침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역사상 가장 완전한 진리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세상 행복을 쫓다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돈과 명예, 쾌락 등을 행복이라 여겨 추구하면 참
행복을 잃는다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책은 또 우월해지려고 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높아지려하면 낮아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월해지려는 마음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랑을 갈구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욕망이
고통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나 형제, 아내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애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애정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내가 아프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지나치게 자신을
통제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믿지 말라고 책은 말합니다. 예수님도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믿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아를 끊는 방법은 몰입니다. 어떤 것에 집중할 때 생각이 사라지고
단순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보다 감사와 사랑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의 수준이 하느님 자녀가 되는 행복의 수준까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은 그 잠깐의 경험은 평생을
행복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게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것을 볼 때 물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 생각만 하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대로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배우는 것, 이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해가
마무리됩니다. 그리스도 왕의 시민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이 다스리는 왕국의 신민이 되려면 그분만이 참 진리임을
믿어야합니다. 세상 모든 학자들의 연구를 다 모아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넘어설 수 없음을 믿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당신은 ‘왕’이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진리’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당신은 진리의 왕이시고 당신이 증언하는 진리를 따르는
이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에 속한다는 말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믿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목소리에 따라
살아가며 그래서 그분이 지배하는 나라, 곧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백종원 씨의 골목식당에서 홍탁집 아들이 워낙 백종원 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서 백종원 씨가 크게 분노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머니를 봐서 도와주려 했는데 아들이 전혀 백종원 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방송은 그것으로 중단이 되고 그 집의
방송분은 더 이상 방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 며칠 그 집이 다시 매스컴에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홍탁집
아들이 완전히 바뀌어 자신이 백종원 씨가 가르쳐 준 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 집을 촬영하기 위해 쓴 돈을 몇 배로 갚겠다는 각서를
내걸었고 실제로 맛까지도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가 다시 방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홍탁집 아들은 처음엔
백종원 씨의 솔루션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백종원
씨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저도 나름 사제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솔루션을
제공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제 솔루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솔루션을
따라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참 보람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그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솔루션은 오직 ‘사랑’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자신만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벽돌로 지어진 성당에 들어가서 미사 한다고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야 그분의 시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빌리도처럼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기는 하는데 관심이 없어
듣지도 않고 나가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도 하루에 성경을 한 줄도 안 읽는다거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5분도 할애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왕이든
아니든 상관없소. 나는 지금 내 일에 바쁘오.”라고 말하는 빌라도와
같습니다. 그분 진리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더 알려고 노력해야
그분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그분이 가르치러 오신 것이
진리임을 믿고 그 진리를 알기를 원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기 위해 똑 같은 과정을
겪어온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가 진리임을 알고 부모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살려고 해서 두 발로 걷고 말을 하며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가 두 발로 걷는지
네 발로 걷는지 관심이 없다면 부모가 진리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온전한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진리는 알려하지 않으면 그 진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알고 싶은 것이 그
사람에겐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려고 시간을 투자합니까,
아니면 세상 것을 알려고 투자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까? 이것이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한 시민인지를 결정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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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 18,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1월25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 18, 37)

하얀 흰 눈이 땅으로 내려앉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스도왕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왕으로
마무리되는 우리의 전례력입니다.
부족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완성시켜주십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시작이고 매일매일이 마무리입니다.
임금이신 주님께로 돌아갈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왕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올 한해도 수없이 우리를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반성합니다.
노동과 봉사의 모습으로 희생과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늘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넘치는 사랑에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왕께서는 올 한해도 우리를 껴안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끝까지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다시 고백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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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닌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
그리스도!
 
2018년 나해 11월25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닌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유배를 떠난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은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초를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관리들의 실무 지침서 격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합니다.

목민심서 안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공직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덕목을 지녀야 하는지? 어떻게 백성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 를 조목조목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이 시대 공직자들에게도
유효한 불멸의 명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습니다.

“훌륭한 수령은 고을을 떠난 후에도 사랑은 남습니다. 수령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 기준은 수령이 고을을 떠난 후 백성들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는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즉시 떠오르는 인물이 한분 계십니다. 이제는 고령으로
사목일선에서 물러나셔서 케냐에서 투병 중이신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이십니다.

가끔씩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살레시오중고등학교 동문들을 만나면
정말이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동문들이지만, 만났다 하면 원선오 신부님에 얽힌 추억을 떠올립니다.
즉시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다들 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분은 정말이지 참 목자, 참 스승이셨습니다. 제게 그분은 아버지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그분이 건넨 감동과 은총이 얼마나 특별했으면,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분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남긴 흔적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기며 되살아났습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지만,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종이 되신 분이셨기에,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사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목자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일정 기간 머물며
봉사하다 떠난 후, 본당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은 우리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목자들의 떠남이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입니까? 혹시라도 반대로 우리의
떠남이 너무 기뻐 박수를 치고 용약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물 좋은 한 자리’를 추구하는
출세주의자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기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긋납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성취나 야욕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리스도교를
망신시킬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맞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동일시되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욕심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권력은 섬김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교회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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