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9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09 06:16:09    조회 : 254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9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제1독서 요한 1서 4,11-18
복음 마르코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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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2019년 다해 1월9일

며칠 전에 뉴스를 검색하면서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삶이란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있는 장소와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삶이
폭풍우에 갇혀서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소와 상황을
통해서 의미를 배운다면 삶은 폭풍우 넘어 있는 밝은 태양을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댈러스라는 상황은 1달이
지나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이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간다면 앞으로 주어진 1달은
저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한 자루의 연필, 색색의 물감은 화가를 만나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화가는 연필과 물감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그림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작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꽃동네’는 아픈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장애인들, 외로운 노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비상구’가 되었습니다. ‘꽃동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시작은 아주 작았습니다. 제가
제기동에 있을 때였습니다. 경동시장 입구에 ‘무료급식소’가
있었습니다. 본당의 교우들께서 매일 무료급식소에 가서 설거지도
하고, 봉사를 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음식 재료가 떨어질 때가
되면 누군가가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 식당을 하시는 분, 지나가는 사람들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당시 무료급식소는 배고픈 이들에게 희망의
집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일들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가진
사람들,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 명예와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을 하려는 사람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려는 사람들,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려는 사람들, 자기를 버리고 줌으로써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 위에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나눔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던
예수님께서는 폭풍의 한 가운데로 걸어오셨습니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곁으로
당당하게 가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구원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19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 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고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신앙에도 때로 폭풍이 불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고통과 아픔이 다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위에 적은
글을 한번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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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9일 공현 후 수요일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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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사랑은 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2019년 다해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사랑은 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경배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평생토록 ‘대체 하느님은 누구신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파악해보려고 발버둥을 쳐왔지만,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요한 1서는 거듭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결국 관건은 ‘사랑’이군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 그분께서
베푸신 크고 뜨거운 사랑을 온 몸으로 맛보지 못한 사람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에 대해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한 존재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사랑으로 여깁니다. 자연스레 감시와 통제가
뒤따릅니다. 그렇게 될때 사랑은 그 맛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그
때부터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고통으로 변해갑니다.

가끔씩 인간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 가운데, 불행한 사랑, 참혹한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기지만, 상대방에서는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처럼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꼭 끌어 안기도 하지만, 아쉽지만 떠나보내기도 하는
사랑입니다. 때로 한없이 인내하고 용서하기도 하지만, 강한 채찍질도
서슴치 않는 사랑입니다. 때로 그 사랑은 용광로처럼 뜨겁기도
하지만, 한 겨울 칼바람처럼 냉혹하기도 합니다.

언제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하느님의 그 큰 사랑, 그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 그 뜨거운 사랑을 한번 체험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한 성지에 들렀을 때, 존경하는 노 수도자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덕담
한 마디가 늘 귓전에서 맴돕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언젠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대는 너무 기뻐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을 그대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때, 너무나 깜짝 놀란 나머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임종을 맞이하는 환우들을 바라보며, 자주 하느님 사랑을
대리 체험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면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화사한 표정을 짓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 이미 맛본 진한 하느님 체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평생토록 믿고 바랐던 그 사랑의 하느님을 곧 만난다는 기쁨에,
마음조차 설레입니다. 기쁘고 행복한 얼굴, 품위있고 편안한 얼굴로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걸어들 가셨습니다.

오늘도 사랑의 결핍 때문에, 사랑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떠나가는
사랑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양한 고통과 십자가
때문에, 힘겨워하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나지막히 외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복음 6장 50절)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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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9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우리가 사는 곳에는 용기와 두려움이 함께 존재합니다.
믿음의 현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 이곳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가시듯
우리의 두려움 위를 걸어가십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믿음에 도달하는 길은 맞바람의 길이기도 합니다.
시련없이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시련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시련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역경의 맞바람조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용기라는 믿음을
얻게하는 은총임을 믿습니다.
맞바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맞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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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월9일 (수) - 창조주 하나님과의 동행

오늘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동행" 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오늘의 말씀처럼 일반상식을 만드시고 일반상식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년 365일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한 시간, 일 분, 일 초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지구보다도 더 큰 행성들이 수백 수천 개 있으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행성 또한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수많은 행성들에 비해서 지구는 콩알보다 적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그 거대한 행성에 비해 콩알보다 작은 지구 속에
대한민국 그리고 그 대한민국 속의 인천, 인천 속의 한 동네는 참으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도 미미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는 이 천지창조의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비해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들은 하루 온종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 번 만 번 끊임없이 외쳐도 그 지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는 다 못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고민에 쌓여 있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거대한 천지창조의 하나님 안에서 넉넉하고 든든하고
무한 광대한 우주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광활한 우주인과 같은 넓은 마음의 소유자 되십시오.
하나님과의 동행은 당연합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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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월9일 공현 후 수요일 (마르6,45-52)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섬김의 삶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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