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3일 세례로 다시 시작되는 사랑의 삶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13 06:33:14    조회 : 259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13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야서 42,1-4.6-7
제2독서 사도행전 10,34-38
복음 루카 3,15-16.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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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세례 축일

김구 선생님,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들이 남긴 것 중에는 서예 작품이 있습니다. 글에
힘이 넘치고, 생기가 나는 것은 글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분들의 인품이 글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중에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글도 당대에는
뛰어난 글이었습니다. 필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완용의
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글이지만 그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 글에 혼과 기와 묘가 없기 때문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서울대교구 교구청 축성을 해
주셨습니다. 교황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친교를 나누는 공간을
프란치스코 홀로 정했습니다. 교구청은 새로 지어서 크고
아름다웠지만 교황님께서 축성하시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황님의 인품과 교황님의 따스함이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기꺼이 교구청 축성을 해 주신
교황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도 교황님께서 축성하신 건물에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부친께서는 제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붓으로 시편 126장을 써 주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필체는 예술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국전에 입선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유품이
된 ‘족자’는 세상 어느 서예 작품보다 제게 더 소중합니다. 그 글에
아버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충실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님의 기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시편 126장의 글을 봅니다. 그러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나고,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글이 아니라
아버님의 혼, 기, 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줄 때는 물을 사용했습니다. 물은 정화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함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따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세례의 의미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거룩해
졌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물은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바로 성사가 된 것입니다. 

이제 세례는 단순히 깨끗이 정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함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지난 날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죄와 악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제1독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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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

2019년 다해 1월13일 주님 세례 축일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 복음: 루카 3,15-16.21-22

영국의 어떤 곳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곳에 세 명의 석수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장이 자신과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세 명의
석수에게 “당신은 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사장님이 시켜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석공은 “예, 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사람은 “제가
다듬는 돌이 성전을 짓는데 쓰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니 참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 사람의 석공 중 누가
사장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인으로 생각하며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가장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종교심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내가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합니다.

다른 예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빚
하나도 없이 4천 억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이 한 가게를 운영할
때의 일입니다. 누가 가게 앞에다 똥을 싸 놓고 간 것입니다. 직원들은
더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한 젊은 청년이 맨손으로 그 똥을
집어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스스로를 그 직장의
직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자신을 그 직장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빠른 시간에 그 회사에서
높은 위치에 이르고 젊은 나이에 여러 가게를 가진 성공한 사장들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죽을 생각만
하고 어떤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활기가
넘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모르고의 차이에서
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남들이 다 하는 일을 하면서도
힘들어하며 견뎌내지 못합니다. 

정신분석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가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할 때
한 자해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칼로 배를 그어 배에 수십 개의 칼 자욱이 있었습니다. 박사가 왜
자꾸 자해를 하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자신이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인데 그렇게 자해를 하고 피가
나고 쓰라린 아픔이 오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정체성을 찾아야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인 줄 알아야 두 발로 걷는 것이 의미 있고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받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삶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받을 수 있을까요? 부모로부터
부여받습니다. 부모는 아기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으로써 아이에게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에 수긍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공부 잘 하고, 건강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궁극적으로 부모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자녀가
대신 살아주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아이가 키워졌다면 늑대처럼 사는
것이 그 아이의 삶의 의미이자 가치입니다. 존재하게 한 자만이 그
존재하게 된 이에게 그 존재이유를 알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줄 수도 없고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해 줄 수도 없으며 나 또한 누군가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나의 창조자가 부모가 아니었음을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체성에 대한 방황이
시작됩니다. 다시 왜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고민은 이
질문으로 종합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자신의 창조자를 찾지 못하면 아이는 한없는 혼란 속에
빠집니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자녀도 낳아야하지만 그런
힘든 일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에 일 하면서도 힘들고, 결혼생활
하면서도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하기는 해야 하니까 죽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이 나의 창조자이심을 알게 되는 것만큼 큰 은총은
없습니다. 이렇게 “아,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종교적으로 ‘세례’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나의 창조자이시고 그 하느님의 의도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을 하던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인 중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가 있습니다.
그분은 흑인 신분으로 평생 빗자루질만 해야 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거지 하나를 하더라도
기쁠 수 있다면 참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아직 그 가치와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살찐 여우를 발견하고 ‘저 여우는 어떻게 해서
살이 쪘을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가 관찰한 결과 여우는
사자가 먹이를 먹는 장소에 있다가, 사자가 먹이를 먹고 사라진 다음
남은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도 여우처럼 살면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신들이 남은
것을 이 사람에게 결코 주지 않았습니다. 허기져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대는 왜 사자가 되지 못하고 어리석은 여우와 같은 행동을
하는가?”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을 만들어주신 분을 만날 때 확립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아버지의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로 목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새로운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30년 간 목수의
아들로 살아왔지만 이젠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게 되어 그 일이 의미를
잃습니다. 내가 늑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간임을 깨달았다면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이젠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제 복음전파와 십자가의 길로
투신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참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았다면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미와 가치를 알면 그 일이 비록
고되게 보일지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넙칩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이 기쁘고 가치 있게 여겨집니까? 그러면 세례를
받으신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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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의 세례 축일: 다해: 제2의 공현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13일 주님의 세례 축일: 제2의 공현 축일

오늘은 주님의 공현축일에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였던’(마태 2,11)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세례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러한 점에서 중요성이 있으며
(마태 3,13-17; 마르 1,7-11; 루가 3,21-22; 요한 1,29-34)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주님의
세례축일은 그래서 제2의 공현 축일이며 이제는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하겠다.

제1독서: 이사 42,1-4.6-7: 여기에 내 마음에 드는 종이 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소리는 “야훼의 종”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 1독서의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1절)로서
야훼의 종에 관한 예언으로 예수님에게서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이 종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붙들어 주고’ ‘기가 꺾이지 않도록’ ‘손을 잡아
지켜주고’ 그를 ‘뽑아’ 어여삐 여겼으며 또한 당신의 ‘영’(1절) 즉 힘과
빛을 주시어 어떠한 어려움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굴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가 펴게 될 ‘바른 인생길’(1.4절)은 법적인 의미의 정의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진리’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메시아가 가져다주는 구원은 그러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육체적인 고통의 치유를 통하여
메시아에 의해 이루어질 변화, 쇄신의 증표가 될 것이다. 즉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7절).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나 소경이 본다는 것은
구원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대한 사명을 가진
메시아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대해 호기심을 야기하도록
소란을 피우지 않고, 겸손하게 고통을 참아 받으면서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3절).

그러므로 이 메시아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염려와 배려,
희생과 자신의 봉헌이 필요하다. 메시아는 자신의 사명 앞에 놀라지도
않는다.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기보다 꺼버리기 쉽고 부러진 가지를
쉽게 자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말이다.
결국은 가난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참조 마태 12,17-22).

복음: 루카 3,15-16.21-22: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지만,
그분은 ‘야훼의 고통받는 종’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 여기서
성령은 메시아가 부어주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하며, ‘불’이라는 것은 정화작용만이 아니라, 선악을 결정적으로
구분시켜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루카 3,17). 이러니 예수님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사명, 즉 세상을 구원하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시작된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는 ‘겸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님의 세례는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마태 26,28) 십자가의 죽음에로의
긴 여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수난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것이 바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22절)로 입증되고 있다. 이사야에서 본 내용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장시켜준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게 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인간을
더욱 더 사랑하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사실, 즉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예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21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루가 복음에서 기도에 관한 주제들이
(예: 루카 3,16; 6,12;9,28-29; 22,41)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고 하신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강림절에
성령을 기다림과 기도가 연결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4,31 참조). 성령은 바로 겸손과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아야할 것은 ‘성령과 불로’(16절)
이루어져야 할 우리의 세례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이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변화’로서 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례의 사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헌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속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참된 종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종으로 변화가 먼저 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은 또한 기도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또한
기도에 항구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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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가 얼마나
겸손하고 온유하시고 순명하시는 분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2019년 다해 1월13일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가 얼마나 겸손하고
온유하시고 순명하시는 분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칭찬하시는 내용을
묵상하면서, ‘나도 언젠가 저런 칭찬 한번 들어야 할텐데..’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복음 3장 22절)

예수님께서 이토록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극찬을 듣게 된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틀레헴에서 탄생하신후, 나자렛에서 삼십년 세월
동안 마리아와 요셉에게 철저하게 순명하며 지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혈기왕성한 스물살 무렵 쯤, 끌어 오르는 사명감을
주체하지 못해, 때가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확!’ 공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를 향한 철저한
순명정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 앞에 장엄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거침없고 위풍당당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수려한 풍모에다 탁월한 가르침,
계속되는 놀라운 기적과 치유, 구마...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어떤 걸림돌도 예수님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 한번, 결심 한번이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목
활동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도 다른
인간 존재 뒤에 줄을 서십니다. 옷을 벗으시고 요르단 강 강물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놀랍게도 메시아께서 한 인간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습니다. 참으로 경탄할만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의 주체이자 집전자로서 굳이 세례가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 존재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를
베푸셔야할 분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경배를 받아야 하실 분이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지상
과제, 육화강생을 보다 본격화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하게 인간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심을 통해 말로만이 아니라 정녕 인간 사이에 머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육화강생의 신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세례는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가 얼마나 겸손하고 온유하시고 순명하시는 분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꼭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을 보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복음 3장 22절)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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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13일 주님 세례 축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

세례로 다시 시작되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은 세례의 뜻으로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세례의 마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우리 삶에 주님께서는 세례를 선물로 주십니다.
기쁜 사랑의 선물입니다.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례의 본질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되찾는 것이 세례입니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주님의 세례입니다.
세례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여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례를 통한 하느님 자녀들인 우리의 탄생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세례 축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세례의 삶은 매순간 일상의 기쁨으로 이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의 세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세례는 하느님과 우리의 기쁨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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