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6일 고요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16 06:31:33    조회 : 24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16일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리서 2,14-18
복음 마르코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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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서울에서는 사제관에 일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합니다. 청소와 세탁은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식사 준비는 아직 미숙함이 있습니다. 그래도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맛있는 반찬과 음식을 나눠 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저는 교우 분들의 도움으로 맛있는 식사를
거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곳에는 기업과 정부의 주재원들이 있습니다. 주재원들이 하는 일은
제품을 홍보하고, 물건을 많이 판매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주재원은
북극에서도 에어컨을 판매하고, 사막에서도 코딩잠바를 판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문화와 습관을 잘 알아야
합니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현지인들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물건을 판매하기
전에 현지인들과 신뢰를 형성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감정에 이끌리는 경향도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체력관리도 중요합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아프면
의욕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곧 회사의 말과
행동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늘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첫째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아플 때는
찾아가서 손을 만져주셨습니다.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아픈 사람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된 사람들은 복음의 홍보대사가
되었습니다. 댈러스에는 많은 한국 분들이 오고 있습니다. 세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업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 분들 중에는 신자들이 있고,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아간다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기능이 많은 스마트 폰도
충전을 하지 않으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늘 충전된 스마트
폰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십자가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기도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수도자도, 사제도, 주교도 기도하지
않으면 악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모래
위에 세워진 공동체와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공동체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진 공동체와 같습니다. 

셋째는 변화와 혁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땅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례를 주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졌고, 이곳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있습니다.
애벌레가 변화와 혁신을 하지 않으면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는
결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신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기도 중에 하느님께 청하며,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2019년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결실을 맺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갑시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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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타인을 과도하게 허용하는
것은 나에 대한 학대다

2019년 다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타인을 과도하게 허용하는 것은 나에 대한 학대다>

복음:마르코 1,29-39

며칠 전에 어떤 강의에 갔습니다. 요즘엔 강의를 조금 자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보다는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밤에 하는 것은 거의 안 나가는데 어쩌다가 나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다음번에 또 와 달라고 부탁하기에 저는
매몰차게, “안돼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매몰찼던가!’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왠지 강의에 휘둘리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어쩌면 ‘사제가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써야하는 거 아닌가?’라며
서운해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오는데 가끔 제가 강의 하는 곳이면 찾아와 도와달라고
청하시는 분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불쌍하신 분이라 항상
도와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인사를 드린 다음 또 도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통화만 하면 되니까 전화번호까지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다 알려드리는데, 이번에도 “전화번호는 안
돼요. 다음에 만나면 또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저의 마음도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킬 수
있는 내 자신이 있어야 내어드릴 내 자신도 존재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기적이다.”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혼자 천당 갈 거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도 제가 이기적이고 교만한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를 더 먼저 챙겨야 나중에라도 누군가에게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음을 압니다. 제가 쓰러지지 않아야 쓰러지는 누군가를
잡아줄 수 있습니다. 함께 비틀거리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좋은 가르침을 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타인들이 당신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밀어붙일 때 배를 타고 물가에
들어가서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침해할 수 없는 시간을 항상
찾으시고 기도하는 시간을 절대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침해받지 않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보충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학대하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학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휘둘리고 있다고 느끼면 몇 년을 끊고 내가 힘을 길러서 몇 십 년을
도와주는 것이 낫습니다. 나의 능력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빼앗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합니다. 그 시간까지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있습니다. 그
중 ‘칭찬’도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악령들은 예수님께 좋은 칭찬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역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제자들에게는 당신을 널리 알리기를 원하셨지만 마귀들에게는
당신의 정체를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칭찬이 되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많이 들으면 그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과 계획에 누군가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시간과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단호하게 그들을 떠납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에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빼앗으려거든
차라리 돈을 빼앗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침해하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먼저 독립적인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자유를 줄 줄 알아야 타인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람이 됩니다.
타인이 나를 지나치게 침해하게 하면 나도 그 대가로 다른 사람을
침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에게 먼저 잘 해 주어야 타인에게도
잘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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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 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 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고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 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으셔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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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치유, 연민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음을
알리는 표지!
 
2019년 다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치유, 연민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음을 알리는
표지!

참으로 부러운 한 어르신 사연입니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셨는데, 평소처럼 밥 한 공기 뚝딱 맛있게 잘 드셨습니다. 차도 한
잔 여유있게 드셨습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그날도 아들
며느리에게 “잘 챙겨줘서 고맙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잘
될거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내가 매일 기도하고 있다.”며 따뜻한
덕담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들어가 잘란다.”며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길로 영영 작별이었답니다.

우리는 다들 꿈꿉니다. 평화롭고 편안한 임종,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은 죽음! 그러나 그게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마치도 한 마리
나비처럼, 나약한 육신의 허물을 벗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날아오르기 위한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극심한 임종의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바라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은 해결사요, 축복이로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끝도 없는 계속되는 심연의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계속 감당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죽음이 없다면 무한 반복되는
우리들의 죄와 악습, 상처와 결핍을 어떻게 계속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니 죽음은 우리를 모든 억압과 속박,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하느님의 선물인 듯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은 모든
것을 원상복구시키며 치유시키는 은총인 듯 합니다.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집 안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아마도 시몬의 장모는 최근 사위 시몬이 딸과 직업까지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건으로 인해 홧병, 열병이 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미안한 마음이 크셨을 것입니다. 특별 서비스를
베푸십니다. 친히 시몬의 장모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하게 손까지 잡아드리며 일으키시니,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좀전 까지만 해도 터져나갈 것 같은 홧병, 열병, 서운한
감정이 순식간에 치유되었습니다.

시몬의 장모 치유 시점에 맞춰 해가 떨어지며 안식일이 끝나자,
군중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옵니다. 시몬의 집은 순식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처럼 야전병원이 되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치유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치유활동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보내주시는 구원의 표지가 아닐까요? 자비하신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음을 알리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아닐까요?

치유와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토록 갈구하는 육체적 치유는 언제나 한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 크신 자비에 힘입어 한 두번 육체적
치유의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치유는
무한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치유받고 또 치유받아 엄청나게 오래 산다면,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지속적인 치유로 인해 계속 죽지 않고 또
살아나고 또 살아나서 150세가 되었다고 친다면, 그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겠습니까?

친구들은 벌써 오래전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손녀의 손녀가 나를
시중듭니다. 시들대로 시든 비참한 내 육신의 모습을 매일 대하자니
참혹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치유도 중요하지만 그를 넘어서, 영적 치유,
정신적 치유, 내적 치유를 강조하십니다. 영적 치유를 통한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넘어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ul><center>
<img src="http://cfile255.uf.daum.net/image/9997BA485AAEA46C04CF18" width="400" height="53">
</center><ul>
◈ [수도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16일 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모든 일의 출발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하루를 여십니다.
기도보다 큰 울림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삶의 바탕화면이며 삶 그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며
우리의 생활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외딴 곳의 기도는 찾아가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와 생활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삶 전체를 꿰뚫는 것이 기도의 강력한 선물입니다.

살아있는 마음이 살아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외딴 곳에서의 기도는 더 깊은 사랑의 샘이었습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축복이고 지혜이며 성숙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시작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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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월16일 (수) - 충만하라

오늘은 "충만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 "충만하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날마다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뿐인 내편이라는 연속극이 있는데 그 연속극에서 한 아주머니는
평생을 꾸어서 살고 얻어서 살고 항상 징징대며 돈 빌려 달라는 것이
노래삼아 하는 사람의 캐릭터를 봤습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지요. 평생을 여기서 빌리고 저기
막고 저기서 빌리고 여기 막고 날마다 틀어막다가 팔다리 아파
늙어지는 사람들을 간혹 봅니다.

참 한심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은 넉넉해야 합니다. 밥을 해도
쫀쫀하게 하지 말고 넉넉하게 나눠 줄 수 있고 반찬을 해도 넉넉하게
해서 이웃과 함께 먹을 줄 아는 참 충만한 성도 하나님이 크게 쓰실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소유의 축복을 주십니다. 스크루지 같은
욕먹는 노랭이가 되지 말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밥을 먼저 살 줄 알고
먼저 대접할 줄 알고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 하나님이 오늘의 말씀처럼
충만 하라는 그 명령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넉넉히 주실
것입니다.

오늘 누가 돈 낼까 눈치 보지 마시고 먼저 한턱내시지요.
바로 충만하라는 명령의 넉넉한 자를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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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외딴 곳으로 가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마르1,29-39)

고요함이 있는 곳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외딴 곳에서 빈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은 곳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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