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3일 움켜진 손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23 06:43:36    조회 : 194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23일 [(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리서 7,1-3.15-17
복음 마르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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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밥에는 흰 쌀밥과 잡곡밥이 있습니다. 건강에는 잡곡밥이 좋다고
합니다. 씹는 질감도 잡곡밥이 좋다고 합니다. 저는 흰 쌀밥에 익숙해
있어서 잡곡밥보다는 흰 쌀밥을 좋아합니다. 잡곡밥은 질감이 있지만
저는 치아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부드럽게 넘어가는 흰 쌀밥이
좋습니다. 익숙한 것과 건강에 좋은 것을 선택하라면 건강에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흰 쌀밥과 잡곡밥의 선택은 저의 몫이지만 국경에 장벽을 쌓는 것은
정책의 문제이며 국가의 문제입니다. 장벽을 쌓겠다는 정부와 장벽을
쌓는 것을 반대하는 야당의 긴장과 갈등이 연방정부의 셨다운을
야기했다고 합니다. 장벽을 쌓기 위해서 정부는 57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고, 야당은 장벽의 효율성을 문제 삼고, 인도적인 측면에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벽을 세울까요? 여론과 야당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장벽을 포기할까요? 

오늘 우리는 선택의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주시는지, 안식일
법을 지키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소망을 외면하는지 보려고
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지,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은 아닙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법이
중요하지만 법의 정신을 따르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법은 선을 증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법과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법과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법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채우려고
한다면, 법을 이용해서 남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그것은 법의 악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위선과 악용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법의 정신을 실천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 선을 증진 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손을 뻗으시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손을 펼 수 있었고, 이제 그의 손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손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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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의 법:
“괜찮다. 사랑한다.”

2019년 다해 1월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님의 법: “괜찮다. 사랑한다.”>

복음: 마르코 3,1-6

스타강사 김미경 씨가 잘 나가다가 논문표절 문제가 드러나 곤두박질
쳐서 혼자 고난을 이겨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매주 TV에 나와
청년들에게 열심히 일하며 당당하라고 외치던 그녀는 이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쪼그라든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혼자
울고 하염없이 걸으며 하늘의 별과 대화를 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기에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실수였지만 ‘내가 왜 그랬을까?’라며 한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걷고 걷기를 몇 달을 거듭한 끝에 마음
안에서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괜찮다. 사랑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후회 때문에 죽을 듯 고통스러웠지만
‘강의 안 하면 어때, 미경아. 너는 왜 네 탄생보다 꿈을 더 사랑하니?
너는 숨만 쉬고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어깨를 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못하게 되었지만 새롭게 옷을 디자인해서 만드는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엔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왜 그랬니?”라고
죄책감을 주는 목소리고, 다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데 항상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왜
그랬을까?’라는 자아의 질책소리에 민감하여 과거에 사로잡혀 거의
우울증 환자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면 그래도 주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그 믿음이 더 확고해집니다.

‘이런 죄인인 나에게 한 번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구나. 주님은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사랑해
주시는구나!’

우리는 죄책감을 주는 목소리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두
목소리 가운데 어떤 목소리가 나를 지배하게 만들 것인지 결정만
하면 됩니다. 하나는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고 하나는 나의 어깨를
펴게 만듭니다. 쪼그라든 사람은 계속 쪼그라든 삶을 살아가게 되고
어깨를 편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못마땅해 합니다. 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고, 굽어진 허리를 세우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이 인정받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누구든 자신과
이웃을 어떤 규정으로 주눅 들게 만들면 율법학자, 바리사이입니다.

자신과 이웃을 주눅 들게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주눅 들게
하는 법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로 숨은
것은 주눅 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 안에서 “너는 죄를
지었어!”라고 말하는 자아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아는 하도
잔인해서 율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타인을 율법으로 얽매이게 해서
심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당신께서 다 덮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율법에 지배받는 율법주의자와 그래도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신다고 믿는 참 신앙인,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아의 목소리를 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재빠르게 자아의 법에서 주님의 현존이라는 더 큰 믿음의
법으로 방향을 틀어야합니다. 주님의 현존과 주님께서 바라봐주심이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법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시선은 우리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질타하는 시선이
아니라 우리의 쪼그라든 마음을 펴게 만드는 사랑과 안아줌과
위로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되지 않으려거든 먼저 자신이 그 사랑의 법에
지배받고 있어야합니다. 김희아 씨는 딸이 뛰다 넘어져도 “어머,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준다고
합니다. “좀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얼마나 엄마가 얘기했니?”라고
야단치면 아이는 더 주눅 들게 됩니다. 엄마가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한 일을 똑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희아 씨의 딸은 길을 가다
넘어져 손에 피가 나고 있어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다행이지요.”

엄마가 심판관이 아니라 “괜찮다. 사랑한다.”의 법으로 지켜주고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우리를
그렇게 자비롭게 봐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믿음으로 나도 자유로울 수 있고 죄책감에 주눅 들어 있는 사람들의
어깨도 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안 되기
위해 절대로 자신과 이웃을 심판하지 말고 항상 자신과 이웃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괜찮다, 사랑한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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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 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고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
하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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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월23일 (수) -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오늘은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 말씀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치고 값나가는
사람이 별반 없습니다.

더욱이 지날 날의 안 좋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참 안타깝기 이룰 데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도 하지 말고 옛날
일은 생각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일을 가지고 다시 끄집어내고 또 다시 끄집어내는 사람들,
처음에는 불평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으로 변형되어서 급기야는 완전 골수가 되고 그 골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치매가 걸려도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지난날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자에게는 늑대도 타조도 우리에게
찾아와 존경을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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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움켜쥔 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월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마르 3,1-6) 

마음이 오그라든 병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1,5).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야말로 틀림없는 장애인이 아니냐.
가까운 형제를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좀스러운 정서장애.
작은 애착 하나도 끊지 못해 온몸이 쑤셔 오는 지체장애.
항상 남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각장애.
충고의 말을 듣기 거북해하는 청각장애.
칭찬과 격려의 말에 아주 서툰 언어장애 등등”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했던 수녀님).

우리는 육신은 멀쩡해도 내적으로는 한두 가지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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