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7일 주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27 06:33:51    조회 : 208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27일 [(녹) 연중 제3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1독서 느헤미야기 8,2-4ㄱ.5-6.8-10
제2독서 코린토 1서 12,12-30
복음 루카 1,1-4;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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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주일

2019년 다해 1월27일 연중 제3주일

한국의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휴게소가
상당히 밝고 깨끗해졌습니다. 어떤 곳은 휴게소에 쇼핑몰도 있어서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어떤 휴게소는 화장실에 물고기를
키우기도 하고, 잔잔한 음악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휴게소는 지친
사람을 위해서 안마기계를 갖다 놓았습니다. 휴게소의 음식도
다양해서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휴게소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깨끗하고, 음식이
맛있고, 일하는 직원들이 친절하며, 가격도 저렴한 휴게소일 것입니다.
다른 휴게소에는 없는 특화된 메뉴가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휴게소를 찾을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는 휴게소, 가훈을
적어주는 휴게소, 간단한 자동차 정비를 해 주는 휴게소가 있다면
당연히 그런 휴게소를 찾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휴게소의 기준은 무엇일가요? 화장실에 휴지가 없고, 고장 난 변기가
있는 휴게소, 음식이 오래되어 먹기 힘든 휴게소, 직원들이 불친절한
휴게소, 잡상인이 호객행위를 하는 휴게소, 다른 곳에 비해서 가격이
비싼 휴게소는 찾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소문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인생의 길에 휴게소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종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종교, 삶의 가치와 기준을 알려주는 종교,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는 종교, 몸은 지상에 있지만 영원한 삶을 이야기하는
종교,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종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종교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를 믿고,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서 나갈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삶의
열정이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봉사하며, 늘 기쁜 모습을 보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를 찾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종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때문에 서로 다투는 종교,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종교,
자신의 배는 채우면서 이웃의 어려움에 무관심한 종교, 재물과 신자의
크기로 순위를 정하는 종교,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헛된 것을
전하는 약장수와 같은 종교, 허영과 가식으로 가득한 종교, 축복과
은총은 이야기하지만 희생과 십자가는 외면하는 종교, 전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종교, 건정한 가정과 사회생활을 포기하게 하는 종교는
찾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종교를 사이비 종교라고 부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교회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의 종교와 우리의 신앙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몸과 지체’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몸은
인격과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한 활동을 하도록 산소,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고, 만지고, 걸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통합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이것은 지난 45억년 동안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생명의 생존 방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몸과 지체’의 지평을 확대시킨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와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단순히 산소, 영양분, 물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 이념, 교육, 철학, 예술, 신화’라는 자양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지평의 확대와 연대가 있었기에
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못해도, 사자처럼 용맹하지 못해도, 곰처럼
힘이 세지 못해도, 치타처럼 빨리 달리지 못해도 찬란한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영양분은 예수님의 말씀, 삶, 표징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다운 통찰입니다. 

중국의 한 대나무는 심으면 7년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8년째 되면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7년의 시간이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7년의 시간은 성장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준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들의 사랑, 친절, 자선’과 같은 것들의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전체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런 점을 무시 할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됩니다.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 지구촌의
전쟁은 바로 이런 오류에서 출발합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지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희생위에 세워지는 성공과
발전은 결국 또 다른 아픔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고
있고, 그런 균형 잡힌 삶은 말씀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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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나의 행복이다

2019년 다해 1월27일 연중 제3주일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나의 행복이다>

복음: 루카 1,1-4;4,14-21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단 가운데 박지원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비록 벼슬은 없었어도
성리학에 빠져 있던 다른 사절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성리학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만주족 사람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절단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만주족 한인들에게까지도 무시하는 행동을
자주 하여 미움을 샀습니다. 공부에 대한 맛을 잃고 과거시험을
포기한 박지원은 오히려 청나라를 여행하며 놀라움과 기쁨에
‘열하일기’라는 책을 씁니다. 당시 건륭황제가 열하라고 하는 곳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가기 위해 청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기행문입니다. 

우선 청나라에 들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을 짓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크기의 벽돌과 기왓장을 구워 빈틈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튼튼한 것은 당연하고 조선의 가옥처럼 뱀과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짚과 섞은 진흙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비가 오면 무너지기 쉬웠고 갈라짐이 심해 쥐와 뱀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청나라식의 집짓기를 조선에도
들여야 한다고 열하일기에 썼지만 조선 양반들은 무식한 되놈들의
집짓기를 양반의 나라가 왜 따라야하느냐고 다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가 또 놀랐던 것은 ‘길’이었습니다. 청나라는 길이 매우 잘
닦여있었고 마차의 사용이 매우 편하게 되어 있어서 문물의 이동이
원활하였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어느 지역에서나
어렵지 않게 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아 각 지역의 특산품은 거의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다른 지역에서
사려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했습니다. 그러니 국경지대에 사는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의 안 좋은 도로사정을 이용해 자신들 나라의
물건들을 싼 값에 사서 조선에서 비싸게 팔며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빨리 조선도 길을 닦아 문물교환이 쉬워져야
돈이 청나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고도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길을 내면 외적의 침입만
용이하게 만들뿐 다 소용없다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문체가 너무
천박하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하여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참조: ‘금서가 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써에이스쇼, 유튜브]

청나라에서 함께 다닐 때 박지원과 그가 동행한 양반이나 학자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에 놀랐고 더 많은
것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사절단이 청나라를 깔보는 행위에
건륭황제가 화가 나서 이들을 귀향 보내려 했을 때 박지원은 오히려
더 많은 청나라 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내심
기뻐했다고 합니다. 더 머물고 싶었다면 행복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양반들은 아예 청나라를 깔보면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만한 자세로 당시 조선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엄청난 부와 문물을 소유했던 청나라 사람들을 깔보며 자신들을 들여
높이려 하였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야만적인 만주족들이 세운 청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뻐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기쁘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돼 있고, 내가 우울하면 우울한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이 나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짜증난
표정으로 복음을 전해봐야 짜증을 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이는 반드시 기뻐야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기뻐야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야 그 안에 기쁜 소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아픈 사람입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도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픈데 더 아플까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기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면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저는 여기 누군가 때문에 행복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주위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란 바로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기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면 성령으로 행복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기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빵장사를 하는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하여 허기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그 빵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 마음 안에 기쁨이 솟구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나의 행복입니다.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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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7일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말씀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적 삶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1독서: 느헤미야 8,2-4.5-6.8-10: 에즈라의 법전 해설

1독서는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아름답게 재건한다 해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잊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외적인 것에만 치우치지 않고 진정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루도록
모세의 법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
법은 공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일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은 에즈라로부터 하느님의 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9절)고 한다. 즉 ‘하느님의 법’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개’를 일으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후회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그리하여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바로 1독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한 신앙으로 전달되지 못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서문(1,1-4)과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4,14-21)로 되어있다. 루가는 이 서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즉 이 복음을 헌정 받는
테오필로스와 그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신비로
안내하고 있다. 어떻게? 즉 그가 기록한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창작된
것이거나 조작된 것이 아닌 글로나 말로나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2절). 이 확실한 증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구원적 사건들의 핵심에 가까이 갈 수 있고, 역사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테오필로스와
같이 이러한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22절)을 찬미하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것,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22절)이라는 것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신앙의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혹은 그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의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으신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이 내용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해방과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전한 내용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어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말씀에서 제기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언자의 메시아 활동이
바로 그 순간 즉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고 구원업적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 그 해방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육체적, 영신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노예생활에서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즉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나자렛의 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기에 그 옛날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 ‘법’이 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 ‘오늘’은 매일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성경 말씀을 당신의 가르치심과 행동으로
이루셨다. 그럼으로써 이사야를 만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 1고린 12,12-30: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인체를 들어 설명하면서
각자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들은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로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지체들 간에 진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들 사이에 서로 불화를 야기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옛날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그 형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 말씀이 “오늘”,
“여기서” 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성사생활, 또 전례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규범’인 삶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한 몸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생명에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성찰해 보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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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2019년 다해 1월27일 연중 제3주일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치르는 다양한 행사들, 오십 주년, 백 주년
기념식, 금경축, 은경축 행사, 결혼식, 장례식 등등, 실속도 없으면서,
외양만 거창하고 화려하길 꿈꾸는 우리에게,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행보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결말은 너무나 초라하고 졸속적인 우리들,
언제나 용두사미격인 우리들에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거창한 우리들의 시작과는 달리 예수님의 출발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제일 잘 나가던 도시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변방이요 초라했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자렛은 전체 인구 400여명밖에 안되던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기본 인구만 해도 4만 5천여명에 축제 기간에는
수십 만명의 순례객들이 왕래하던 수도 이스라엘과는 게임이 전혀
안되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변방에서 시작해서 중심으로! ‘변두리 중심주의’
‘외곽 중심중의’가 예수님의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변방에서
더없이 소박하게 시작하셨지만, 가장 실속있고 충실하게
시작하셨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장엄하게
낭독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께서 함께 동반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복음 1장 18~19절)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성공리에 마칠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성령의 충만한 현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령은 마치 신선한 한줄기 바람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미성숙과 어줍잖은 권위주의로 혼탁해진 교회 공기를
말끔히 환기시켜줍니다.

성령의 신선한 바람 없이 우리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기 참으로
힘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도록
안내하십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당신 입김을 불어 넣어주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는 자신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힌 폐쇄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등을 떠밀어 변방을 향해, 세상 끝으로 파견되도록
등을 떠미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전달하라고 외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주시도록 우리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좀 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현존하실때, 그분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역사하실 때, 마치도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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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7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 21)

성소의 여정을 걸어가는 저의 시간 시간마다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 속을 걸어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말씀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말씀이 앞장서서 우리 앞을 걸어갑니다.

우리 인간관계 안에서도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각자의 삶을 비추어줍니다.
사랑과 용서를 더 해가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챙겨주심으로 우리를 살게하십니다.

오늘 우리또한 우리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리키시고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실행하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오늘도 성경 말씀을 펼쳐 읽습니다.
모든 기쁨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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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2019년 1월27(일) 세상과 하늘을 함께 보는 업된 사람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18~20)”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 후 그게 바로 ‘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계인 아니고 바로 그 동네에서 함께 살던 사람이었답니다.
저도 아마 그 회당에 있었다면 ‘잘났어 정말’이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빛을 보는 순간 공포에 떨며 오그라들었을 겁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루신 기적소문을 겸손 단순했다면 믿었어야 했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과 하늘을 함께 보는 업된 사람들입니다.

하늘알고 세상사는 멋스런 사람 되게 도울 일꾼들이 매우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터넷교리를 활용하실 교사교육 일정을 잡았으니 참가합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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