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0일 말씀은 우리 삶의 제 색깔을 찾아줍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30 06:25:26    조회 : 243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월30일 [(녹)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리서 10,11-18
복음 마르코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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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저녁 미사 시간이 7시 30분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7시로
착각했습니다. 6시 30분에 성당에 도착하니 고백성사 시간까지
30분이 남았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에서 모처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도가 필요한 것을 아시고, 미사
시간을 ‘착각’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조배를 하면서 성당의 모습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입구의 성수대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모양입니다. 둥근 대리석에 물이 솟아오르는 형상입니다. 마치
에제키엘 예언서에 나오는 것처럼 샘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제대
중앙 벽에는 예수님의 고상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고상 뒤에는 스테인 글라스가
있습니다. 빛이 없어서 색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1달이 넘게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지만
이렇게 차분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따르는 30일 피정 중에는 ‘3가지
유형의 사람’을 묵상하게 됩니다. 신학생들은 묵상하면서 자신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멀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재물,
권력, 명예의 유혹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마음은 벌써 세상을 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만 시련과 고통이
오면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의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친교와 나눔은 좋지만 희생과 봉사는 어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가
되는 사람입니다. 스테파노 성인처럼 박해의 돌을 맞으면서도
사람들의 용서를 청하는 사람입니다. 순교로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여
천국의 별이 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간청했습니다. 하느님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되도 심판을
멈추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간청합니다. 45명만 되도 심판을 멈추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명만 되도
심판을 멈추시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지금 나의 죄를 사해
주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롭습니다. 2019년 1월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마음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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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걱정하면 예수님은 숨
막힌다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걱정하면 예수님은 숨 막힌다>

복음: 마르코 4,1-20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인 씨가 각자의 마음 밭에 뿌려져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어떤 것은 길 위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씨는 돌밭
위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을 것 같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은 잘 자라다가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것들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주님의 밭이 되었기에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된 영혼을 가리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각자의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결정합니다. 내가 새라고
믿으면 새처럼 날려고 할 것이고 동물이라 믿으면 동물처럼 살
것입니다. 만약 나이아가라 폭포 위 흘러가는 얼음 덩어리 위에 새와
염소가 동시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조금 있으면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염소는 걱정하게 되고 새는 기대하게
됩니다. 염소는 죽을 걱정을 하고 새는 절벽 위를 신나게 나는
즐거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렇듯 각 존재마다 자신에게 걱정을 주는
대상이 다릅니다. 자신 밭 위로 떨어지는 말씀의 씨앗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걱정해야 할 존재라고 믿고
있기에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 걱정만 합니다.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세상
것들뿐입니다. 자신이 걱정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의 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구원의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 걱정에서
벗어나는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돌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어려움이 닥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음이 드러나는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지만 막상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그 걱정과
두려움에 하느님을 잊습니다. 걱정은 가시처럼 주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게 목을 조여 옵니다. 걱정이 많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새가 절벽 앞에서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들국화 밴드의 전인권 씨는 “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냥 지금 있는 걱정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심리치료도 이와 같이 합니다.
불안이 많은 이들은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들도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합니다. 기차역에 들어오는 모든
기차들이 ‘나의 기차가 아닌가?’를 걱정하며 기다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때가 되면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그냥 그런 생각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 우리와 관련 있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버릴 것입니다. 내가 타야 하는 기차가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말씀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걱정해야 걱정할 일이 안 일어날 것 같지만 모든 걱정할 일은 너무
걱정해서 발생합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벳 속담이
있습니다. 걱정은 주님 말씀이 싹트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손만 대면 금으로 변하는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이 세상 걱정들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재벌의
아들이었음을 믿는다면 내가 잃게 될 이 세상 작은 돈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걱정할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내 안의 모든
걱정을 감사로 바꾸며 살아갑시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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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3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절)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미래의 부활을 보여주신다.(1베드 1,3 참조) 씨가 땅에 떨어지면
땅속에서 썩지만, 주님의 위대한 섭리는 그 씨앗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알의 씨앗에서 많은 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

“씨를 뿌리러 나갔다.” 나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인 섭리 안으로 나가신 것을 의미하며,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문이 가로막혀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다. 여기서 당신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말씀하신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3절) 씨 뿌리는
사람은 골고루 구별 없이 밭에 씨를 뿌리듯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다.
(로마 5,15 참조) 그런데 인간은 그 씨앗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 곧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탓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밭이 어떠냐에 그 결실이 달려있다.

자연으로 보면 돌밭이나 길이나 가시덤불은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돌밭이 기름진 땅이 될 수도 있고, 길도
사람이 지나가지만 않으면 풍요로운 밭이 될 수 있으며, 가시덤불도
걷어 내면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은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고 한다. 싹이 말라버린 것은 뜨거운 열 때문이 아니라,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6절) 이런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씨처럼 마음이 거칠고 무심하고 부주의 하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8절) 땅도 좋고, 씨 뿌리는 분도 한 분이시고, 씨도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맨은 것인가? 이것은 땅의 준비 상태에 달려 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땅의 준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잘못은 농부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밭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한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결실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 결실을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은총의 삶을 주님께 청하며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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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이제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천상으로 올라가신
김복동 할머님!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이제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천상으로 올라가신 김복동 할머님!

안타깝게도 또 한 분의 할머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93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하고도 고귀한 삶을 마치셨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목소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해오셨던 애국자이자
투사, 인권 운동가이자 인간미 넘치는 휴머니스트셨던 김복동
할머님이십니다.

김복동 할머님께서는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 앞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 장비를
위한 노력에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오셨습니다.

병약하고 연로한 몸을 이끌고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전범재판에
출석하셔서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을 찾아 가셔서,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책임감 있는 배상을 크게 외치셨습니다.

임종을 지킨 분의 전언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씀도
‘일제에 대한 분노’였답니다. ‘일본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였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김복동 할머님의 분노는 그냥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위대한 분노였습니다. 일제의 잔악성과 파렴치함을 고발하는
예언자로서의 노기띤 분노였습니다.

이런 때 마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본 수상이 공식 석상에서 예의를 갖춰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는 것! 자신들의 만행으로 인해 죽고, 다치고,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적정한 보상을 해주는 것!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진정한 의미의 용서나 화해, 새출발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행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동일한 과오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매일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들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하는 진정성있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인간의 끝, 인간의 바닥을 낱낱이 다
보여준 그들, 인류와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인 그들이건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진정성 있는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들을 인간으로서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김복동 할머님께서 분노하신
이유입니다.

곰곰히 주변을 살펴보니 김복동 할머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신 또 다른
이유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
친일파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친일파인
사람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 소원이었던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끝내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님 앞에 참으로 송구한 마음이 큽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나태함, 냉랭함을 용서 청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천상으로
올라가신 김복동 할머님의 지친 영혼, 그러나 고귀하고 위대한 영혼을
당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상처도 분노도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얼굴로 편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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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르 4,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 20)

말씀 안에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의 길은 말씀의 길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 열매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제 색깔을 찾아줍니다.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시작은 열매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열매를 줍니다.
말씀이 시들어가면 우리의 열매도 시들어갑니다.
말씀 없이 신앙은 결코 내면화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말씀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말씀의 여정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백 배의 열매도 말씀 하나로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힘든 고개를 또 넘어갑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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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월 30일 (수) - 악인은 평강이 없다

오늘은 "악인은 평강이 없다"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48장 2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과자나 무언가를 남모르게 훔쳐 먹었을 때 혹시
들키진 않았지만 그 마음에는 참 조바심을 많이 가지고 마음이
콩닥콩닥 뛸 때가 많이 있었지요. 또 TV에 가끔 잔혹한 범행을 한
사람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악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차고 타인에
대하여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의 극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악한 사람은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정상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마귀가 시키는 어둠의 행위를 했지만 보통 사람들도 기본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다 아니다’를 스스로가 이미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행하고 나면 그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순간 마다 선한 일과 악한 일 중에서 선한
일을 택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평안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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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월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마르4,1-20)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 진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어떤 열매이든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수능이나 혼사 등 어려운 일이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닥치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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