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3일 사랑은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03 06:44:04    조회 : 240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3일 [(녹)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4-5.17-19
제2독서 코린토 1서 12,31─13,13
복음 루카 복음 4,21-30

**********
◈ [서울] 연중 제4주일

2019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일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봄비처럼 생명을 살리고, 따뜻함을 주는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겨울비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고, 추워지는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봄비가 꽃을 피우고, 만물을 키우는 사랑으로서 의미가
있다면, 겨울비 역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며, 휴식과 안식을 주는
이별로서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 앞에 좌절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느님까지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고통을 받아들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선택은 삶의
결과를 좌우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벌이 아니고, 고통은 자연현상이며, 인간 사회의
구조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살아있는 지구의 활동은 지진, 해일,
화산 폭발, 홍수, 가뭄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합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전쟁, 폭력, 착취, 억압, 차별, 사기, 협박은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며 이는 본인과 타인의 고통을 유발합니다. 

고통은 3가지 측면에서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호’입니다. 숨을 멈추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뜨거운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우리는
화상을 입기 쉬울 것입니다. 백신은 우리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항체가 생기면서 더 큰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의 몸이
고통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여유와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하면 몸은 더 이상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는 ‘성장’입니다. 화려한 발레리나의 춤 뒤에는 고통을 견뎌야
했던 무딘 발이 있습니다. 마라톤을 우승한 선수의 웃음 뒤에는
심장이 멋을 것 같은 고통과 훈련이 있었습니다. 씨앗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알은 깨지는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는 죽은 것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태중의 아이는 엄마의
품을 나와야만, 생명의 줄이었던 탯줄을 끊어야만 스스로 호흡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는 ‘창조’입니다. 에디슨은 놀라운 발명을 많이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발명은 99%의 노력과 1%의 재능으로
이루어집니다.” 99%의 노력은 99번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인류가 지금의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어낸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종업원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장과 이야기합니다. 사장이 더 큰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죄를 씻기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전쟁을 앞둔 군대는 총, 탱크, 군함, 전투기와 같은 무기를
준비합니다. 전투력은 강한 정신력에서 시작하지만 막강한 화력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땅, 돈, 상품, 기술과 같은 무기를
준비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로 만든 특별한 상품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홀로 푸르게 빛나는 나무처럼 살기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제 1독서는 하나의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가 어떤 고난에 있어도 나를 지켜 주시며, 나를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신뢰, 이와 같은 신뢰를
가진 사람은 고통과 시련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1독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하리라.”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의
시대에서 사회적인 혼란을 목격하였고, 그런 혼란의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때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하는 예수님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과 뜻을 확실하게 말하였지만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예수님의 학력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예수님의 주변 환경을
보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 삶의 주변에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옛날에 가난했는데, 저 사람은 옛날에 공부를 못했는데,
저 사람은 장애자였는데” 하면서 우리는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왜곡된 시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가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뛰어난 약효를 지닌 처방을 주고 있습니다. 그
처방대로 하면 그 어떠한 환난과 고통도,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절망에서도 능히 일어 설 수 있는 약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진을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합격을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상을 받았는데 어찌 축하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중에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하고 있는데 어찌 찾아보지
않고, 어찌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시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차가운 겨울의 냉기를 녹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힘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미움 받을 용기가 없으면
발전할 수도 없다

2019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일

<미움 받을 용기가 없으면 발전할 수도 없다>
복음: 루카 4,21-30

우리나라 언어는 참으로 소통이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종교 안에서도 이런 면이 잘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미사 끝나고 부제가 주교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그 부제가 좀 지나치게 격이 없는 부제이기는 하였으나 저는
이탈리아에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신학교 한 학년만 차이나면 사제가 되어서도 여전히 선배에게
존경하는 말투와 행동을 보여야합니다. 신학생이 사제를 대하는 것,
사제가 주교를 대하는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의 논문 지도 신부님은 신학생 때부터 주교관에 들어가 둘이
TV를 봤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제가 되어보니 외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제 앞에서도 어려워 말을 못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도 이런 권위적인 문화에 젖어있어서 신자들에게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발끈 할 때도 있었습니다. 종교에서도 이렇다면
사회에서는 더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위계문화가 명령을 지시하면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 집단의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하는 데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계속
유리할 수만은 없습니다. 창의력은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에게서
발휘됩니다. 또한 권위주의가 협동에 장애를 일으켜 집단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아웃 라이어’의 말콤 글래드웰은 이 지나친 위계질서 때문에
비행기까지 추락한다고 주장합니다. 비행기의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은 1. 브라질, 2. 한국, 3. 모로코,
4. 멕시코, 5. 필리핀 순위인데 이 순서대로 비행기 추락 사고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일 예로 1997년 8월 5일, 괌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여객기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블랙박스에서 수거한 기장과 부기장의 대화는 실로
추락하기 직전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합니다. 그 이유는
기장은 지쳐있었고 부기장은 기장의 권위가 두려워 감히 자신의
주장을 말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부기장이 위급상황에서 다시
상승하겠다는 말을 하고 자신이 바로 대처했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기장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 동안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어구조 자체가 매우 권위적이어서 소통을 방해하고 그
결과 협업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복잡한 경어체계가 있는데,
아주 낮춤(해라), 예사 낮춤(하게), 예사 높임(하오), 아주 높임
(하십시오) 등입니다. 제가 아는 언어들 안에서는 이런 경어체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사이가 어색하여
조금 높여주는 말 두 경어체계로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너’라고 하며 기도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상당히 미묘해서 저 사람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먼저 살펴보고 너무 높여도 너무 낮춰도 안 되는 딱 적당한 경어 체를
선택해야합니다. 물론 말이 편해지면 그들만의 더 끈적한 세계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권위적인 문화는 바뀔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학자 손호민 씨는 자신의 책에서 평사원 김씨와 과장 사이의
대화를 한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런 우회적인 화법이 외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과장: 날씨도 으스스하고 출출하네. => 한잔 하러 가는 게 어때?
평사원: 한 잔 하시겠어요? =>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과장: 괜찮아. 좀 참지 뭐. => 그 말을 한 번 더 해 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평사원: 배고프실 텐데, 가시죠? => 저는 접대할 의향이 있습니다.
과장: 그럼 나갈까? => 말길을 잘 알아듣네!  

저는 요즘 잘 안 되지만 주교님께도 ‘요’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연세 드신 분께는 ‘다’나 ‘까’를 붙여야하는데도
모르는 사람이나 대등한 관계에서 붙이는 ‘요’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버릇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이랬습니다. 저랬습니까?”라는 말을 쓰면서 친근하게 소통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집에서 부모님께도 “이랬어요.
저랬어요.”라고 한다면 더 큰 가족이라고 부르는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여기까지 읽으시고 어떤 분들은 ‘저 신부는 우리나라 말을 사랑하지
않는군!’, 혹은 ‘어른들에게 반말 쓰는 버릇없는 신부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 말을 사랑하고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권위를 중요시하는
군대문화 때문에 비행기가 떨어진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에
동의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이상한 소리 하면 오늘
복음말씀처럼 고향에서 미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고향에서 미움을 당하십니다. 분명
그들이 알기로는 목수의 아들인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 시돈 지방의 과부에게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셨다는 것,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장군 나아만만 고쳐주셨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십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태어나 혼자 특별하다고 한다면 “너만 잘났냐?”
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겪어야 할 운명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그동안 속해 있던 곳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박해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한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고향에서
당당히 미움을 받으십니다. 

한국의 반도 안 되는 인구의 유대인들이 왜 노벨상을 휩쓸고 있고
우리나라는 하나도 못 타내고 있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며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미움
받더라도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또 탈무드를
공부하며 하부루타 식의 토론을 배우는 것도 특이합니다. 하부루타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주제로 끝장 토론을 하는 공부방식입니다.
우리나라 100분 토론처럼 남의 의견을 뛰어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체계 있게 설명해 내면 그만입니다. 그 토론식의 공부
방식 자체에 의미를 두지 누가 옳은지 그른 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터놓고 소통하다보니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그 수준까지 공부를 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 유명 대학의 30%, 하버드 대학의 30%가 유대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세상을 휩쓰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평균 IQ는 유대인들보다 한국인이 더 높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미움 받을 용기가 있도록 교육받습니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임을
성경공부를 통해 믿고, 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서 누구에게도
버릇없다고 미움 받아도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도 그렇게 가야합니다. 우리나라가 예의에 몰두할 때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를 상기해야합니다. 말로만
소통이 되는 성당이 아닌 참으로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성당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100분 토론이 아닌 하부루타
식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제시할 수
있는 문화가 되어야 교회도 나라도 비행기처럼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 [수원] 예언자의 사명과 증거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일: 다해: 예언자의 사명과 증거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구태의연한 삶을,
즉 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삶을 들쑤셔 피곤하게도 다른 삶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항상 박해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기도 한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변화되어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들 한다.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이미 자신
안에 일어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여긴다.

제1독서: 예레 1,4-5.17-19: 나는 너를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예언자는 항상 ‘불편한 존재’이다. 항상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함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그런 경우이다.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그는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하여 처음부터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용기를
주신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17-19절).

복음: 루카 4,21-30: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자렛의 이야기에서 우선 조금 전까지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사람, 예수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에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가지 사실, 즉 예수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또
당신의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게 된다.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앞에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적개심을 갖는 것이 지방색을 드러내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같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나자렛에서는 하지 않으시고
카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광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신앙을 갖고
있거나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1고린 12,31-13,13: 사랑의 찬가

바로 이 예언적 증거가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의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은총인 ‘사랑’을 통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2,31)라고 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한다(13,1-13).

우리들이 세상에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 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해야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 처럼’ 우리 자신을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기를 갖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될 위기에 처해있는 가치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예언적’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로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를 생각하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항상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수도회]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닙니다!
 
2019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일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닙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해 이제나 저제나 하고 계시던, 90이 넘은 어르신
병자 성사를 집전하러 병실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어르신께서 임종에
가까워지셨고, 의식이 전혀 없다고 여기셨던지, 가족들은 어르신
머리맡에서 장례 문제를 상의하길래, 제가 순간적으로 ‘빡’쳤습니다.

‘절대 그러시면 안된다.’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나서, 제가 어르신 귀
가까이 대고 큰목소리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르신, 힘드시겠지만, 제가 드리는 말씀 잘 들으세요. 그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열심히 잘 살아오셨습니다. 달릴 길을 잘
달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고 계시며, 분명 큰 상급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부디 마음 편히 가지세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저를 비롯한 가족 모두는,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도 고통스런 얼굴이었는데,
그분의 얼굴에 순식간에 희미한 미소와 충족감이 깃들었습니다.
가빴던 호흡도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두 눈가로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분명한 눈물이 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선 잠드시듯
‘스르르르’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짜리 한 국악 소년이 ‘사랑가’를 아주 멋드러지게
부르길래,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그리도 구슬프게 사랑가를
부르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다는 말, “소싯적, 다시 말해서 유치원 다니던 시절,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갔다고^^”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간 존재는 다들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인
듯 합니다. 사랑없이 못사는 존재인가봅니다. 비어버린 사랑의 탱크,
식어버린 사랑으로 인해 그렇게 다들 허전해하고,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네 인간들인가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이 없이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2천년 전 이미 세상 둘도 없는
사랑가를 그렇게 구성지게 노래하셨던가 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지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코린토 1서 12장 4~7절)

바오로 사도의 ‘사랑가’에 따르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요, 슬픔도
슬픔이 아닙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지닌
사람입니다. 결국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사랑이 전부입니다. 그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야 말로 불멸의 사랑,
진정한 사랑, 참 사랑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