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6일 믿음이란 주님께서 이루실 일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06 06:16:07    조회 : 24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6일 수요일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히브리서 12,4-7.11-15
복음 마르코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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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19년 다해 2월6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작년 12월 27일에 달라스 한인 성당에 왔는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달라스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고,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지냈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동창신부님의
배려로 며칠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차량 봉사를 해 주신 분도 계시고, 음식을 마련해
주신 분도 계시고, 시내 안내를 해 주신 분도 계시고, 제가 달라스에서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을 당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되셨으며,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님, 동네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였고,
기득권자들에게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로마의 법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로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였으며,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의 제사였으며,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전해주는 것은 복음서입니다. 복음서는 이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해석을 전해준 분은 역사적인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체험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새로운
아담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전의 아담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고, 그 결과 고통과 죽음이 인간에게 전해 졌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으며,
죽었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마땅히 받아야할 나의 죄를 위한 희생이었으며,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인해 죽어야 할 나를 위한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는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했던
사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세상에 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2019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제1독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시련을 훈육으로 여기며
견디어 내십시오.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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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간순간 판단하는
마음과 싸우라!

2019년 다해 2월6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순간순간 판단하는 마음과 싸우라!>
복음: 마르코 6,1-6

한 농부가 도끼를 잃었는데 틀림없이 옆집의 젊은이가 훔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집 젊은이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길을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목소리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젊은이가 도끼를 훔쳤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그는 산에 갔다가 전에 잃었던 도끼를
찾아냈습니다. 며칠 전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방심하여 도끼를
그 곳에 두고 왔던 것입니다. 이튿날, 그는 또 옆집의 젊은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모저모 살펴보니, 길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음성이나 그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 안에 판단의 완전한 잣대가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인생의 그 짧은 경험으로 어떻게 사람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판단은 그 사람이 완전하지 않으면 틀릴 확률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그 판단이 틀릴
것 같아서가 아닙니다. 판단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판단할수록 상대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그렇게
판단한 상태에서 상대를 만나면 왠지 이미 껄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저 사람은 참 버릇없네!”라고 판단해 놓고 “그래도 난 널
이해하고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도 요건 좀 바꾸면
좋겠네!”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바뀌면 더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네가 한 가지만 고치면
구해줄게!”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상대에게서 단점을 많이
찾아낼수록 그만큼 사랑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많은 판단을 내려 상대를 더 잘 안다고 여기게 되는 만큼
관계는 멀어집니다. 저도 가만히 보면 저에게 “난 너 잘 알아!”
라고 한 사람과 지금도 관계가 긴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모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좋은데 서로 잘 알게 되면 더
많이 싸우게 되고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더 끈끈해 지기는 하지만 결국 그렇게 오래 사신 분들도
하시는 말은 상대를 바꾸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고향과 친척 집안만큼 그 예언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미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이기에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는 것 안에서 바라보기에 위선적인 것
같아 보이거나 미쳤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교만이 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예수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에 못마땅해 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만큼 축복을 덜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이 사례가 꼭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변할 수 있고 변합니다. 내가 안다고 믿어버리면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때의 아이를 기억하여
그 모습만 가지고 시집장가 다 간 사람에게 “난 널 알아!”라고 한다면
“난 너와 친구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난 널 잘
알아!”라며 바라보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판단을
많이 하면 불안해지고 외톨이가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나자렛 사람들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판단이 저절로 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자신과 싸워야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없듯,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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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6일 수. 성바오로 미키와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
(3절)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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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더 각별한 예의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2019년 다해 2월6일 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더 각별한 예의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30여년 세월 동안 예수님과 같은 고을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 곰곰히 생각해보니 엄청난
행운아들이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매일 뵙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性)을 세상 앞에 드러내시자, 가장
가까이 지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의 메시아성을 거부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명명백백히 드러내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끝까지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한 동네에서 가까이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루카 복음 6장 2~3절)

슬프고 안타깝게도 주님과 가장 가까이 머물던 사람들이 주님과 가장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계 제도 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성직자 수도자들도, 차칫 잘못하면
나자렛 사람들처럼 추락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빠지고, 핵심과 본질과 멀어지고,
권위의식과 형식주의에 사로잡힐때, 우리 역시 주님과 가장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몰라뵐 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다양한 시대의 징표를 외면할 때 그렇습니다.
교회 담너머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절규에 귀를 막을
때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 작은 존재들, 약자들을 무시할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약한 지체’일수록 더 각별한 예의와
존중, 더 세심한 배려와 호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주 체험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가장 멀어지게 되고 마는 체험
말입니다. 많이 사랑했던 만큼 많이 실망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더 큰 사랑, 더 성숙한 사랑, 더 품위있는
사랑, 더 영적이며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에도 인내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존중과 배려가 요구됩니다.
지혜로움과 진지한 성찰도 중요합니다. 여유와 기다림도 필수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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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6일 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 6)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이루실 일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마주하게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래전의 믿음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서로를 높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믿음과 인격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인격 실천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가도록 기꺼이 돕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폄하하는
사람은 실상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깨뜨리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과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격안에서 뜨거워져야 할
뜨거운 삶의 고백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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