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여러분은 믿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10 06:23:42    조회 : 218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10일 [(녹)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6,1-2ㄱ.3-8
제2독서 코린토 1서 15,1-11
복음 루카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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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5주일

2019년 다해 2월10일 연중 제5주일

2006년도의 기억입니다. 어학연수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낼
때입니다. 대학교에서 청강도 하였고, 영성 프로그램도 들었고,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교학처장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앞으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를 하라는 메일이었습니다. 청강하고, 프로그램 듣는
것은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료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따로 더 시간을 주지는 않았고, 남은
시간에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좋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강의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갑자기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런 큰일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라는 말을 성경에서 들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말도 있습니다. ‘구하여라. 찾을 때까지 구하여라. 찾았다면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면 또 다른 기쁨이 있을
것이다.’ 신앙인에게 어떤 말씀이 더 감명을 줄까요?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오시는지요? 

저의 서품 기념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았습니다.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손을 잡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눈물로 씨 뿌리던 어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독일의
탄광에서 탄을 캐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눈물로 씨 뿌리던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박해를 받았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겨야 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교우촌을 만들었던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교우촌에서 신앙은 보존되고,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유형은 크게 4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서 오는 분들입니다. 가족, 친지, 이웃의
권유가 있어서 성당엘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평소에 믿음이 가는 친구, 존경하는 친구가 권유를 했기
때문에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본인의 목적이 있어서 오는 분들입니다. 젊은 남자들이
교리를 받는 경우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 사위가 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목적이 달성되면 세례를 받았어도 성당에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장실 가기전과 화장실 다녀와서의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성당에 온 분들입니다.
커다란 체험은 없었지만, 늘 생각을 하고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도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교리반 출석을 아주
잘합니다. 대부모를 정할 때도 스스로 구역장님께 전화를 해서
대부모님을 정해 달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런 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신앙이 성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들은 나약하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앙인들도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삶의 한가운데에서 유혹과 갈등
앞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 실망하여 냉담하기도 하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고,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하면 점차 신앙이 성숙하고,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굳센 신앙인이 되곤 합니다. 

네 번째는 커다란 체험을 한 경우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갑작스럽게
아픈 경우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잘 되던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본인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도 하고, 꼭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본인 스스로 성당에
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큰 체험이 있었던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봅니다. 이미 그분들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말씀을 통해서 만났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큰 체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분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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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부는 물고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2019년 다해 2월10일 연중 제5주일

<어부는 물고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음: 루카 5,1-11

단국대 의대 서민 교수는 외모가 남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열등감을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외모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했고 그렇게 의대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지금은 글을 써서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글쓰기를 어떻게 잘 하게 되었는지 한 유튜브 채널에
소개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얼굴을 만회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시작하면서 제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아요. 자신과
무언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열등감이 조금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인정을 받은 최초의 일은 ‘글쓰기’를
통해서인 것 같습니다.

제가 2009년에 어떤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뿌듯하고 그랬었는데, 그 인정을 받기까지 글쓰기로
굉장히 많이 실패를 경험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 봤을 때, 저에게
있어 재주가 남들보다 글을 좀 잘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면 제가 반성문 같은 걸 쓰면서 칭찬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내고 여기저기 글을 쓰면서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는데 그것들이
전부다 실패를 하고 책을 낼 때마다 다 망했습니다.

소설 마테우스라는 거의 쓰레기 같은 제 책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정말
한심한 책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책이 별로 안 팔렸고 저랑 어머니랑
다 사서 절판을 시켰습니다. 그 책을 지금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협박전화하고 그래요. 출판사 사장님 같은 경우는 제 책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제 책 두 권 내고 도망가셨어요. 문 닫고. 그런 걸
보면서 미안하고 그랬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뜨겠다.’ 이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끝까지 글쓰기 연습을 했어요. 제가
‘하루에 두 개 세 개씩 글을 쓰겠다, 일 년에 백 권씩 책을 읽자’는
결심을 하고 이 두 개를 거의 지키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십년
이상. 십 몇 년 되니까 글을 잘 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모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됐어요. 칼럼을 쓰다가 처절히
실패했죠. 욕도 되게 많이 먹고 결국 잘렸는데,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 4년 동안 더 열심히 지옥훈련을 하였습니다. 2009년 그때가 글쓰기
시작한지가 14년, 15년 될 때거든요. 그때가 되니까 제게 느낌이
오더라고요. 글을 대충 휙 써도 거의 예술 같은, 남들이 감동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칼럼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에 제
이름을 알렸습니다. 저 자신과 약속을 해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열등감이 극복된 것 같아요.”

[출처: ‘성장문답: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은 당신이 반드시 들어야 할
대답’, 유튜브]

사람은 훌륭한 사람, 훌륭하지 않은 사람으로 정해져 태어나지
않습니다. 훌륭해지려면 누구에게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그 연습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이미 훌륭한 사람을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되는데 거쳐야 하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선택되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이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어부로 살았기에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는 그에게
명령을 내릴 자가 감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베드로는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저어가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정체를 믿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온전한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물고기가 많이 잡히자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잡히고 나서야 그분이 범상치 않으신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의 자존심을 버린
순종이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란
예수님의 응답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젊은 목수의 말을 듣고 창피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밤새 실패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실패하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힘을
우리는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떤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자존감을 낮춥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오랜 실패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자존감이
낮은 선수였다면 수천 번 넘어지고 허리까지 다쳤을 때
“난 여기까지.”라며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거기에서
멈출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감이 그 수많은 실패를 견뎌내게 만든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이 자존감만 있다면 무엇을 해도
결국엔 성공하게 됩니다. 아기가 넘어짐 없이 한 번에 걷는 것을
성공하는 경우는 없는 것처럼, 우리도 수천 번 실패하지 않고서는
무언가의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실패해도 나는 가정에서 사랑받는 자녀라는
믿음이 있다면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와의 관계가 실패하면
끝장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영원히 친구를 사귀지 못합니다. 친구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친구를 부담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도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임을 믿는다면 자존감은 하늘로 치솟습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믿어야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실패하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임을 믿으면 모든 것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가져야하는 자존감입니다.

개신교의 고구마 선교왕 김기동 목사의 강의를 유튜브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길거리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은 미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래도 아무나 그렇게 초대하다보면 일 년에도 수백 명씩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선교의 두려움을 느낄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선교하는 대상을 한 번 찔러보고
아니면 더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고구마처럼 생각하면 상대가
자신에게 주는 상처를 잘 참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마가 익지
않아 내가 찌르는 젓가락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실패를 주저하지 않게 만드는
자존감이 곧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셨습니다. 물고기에게 상처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자존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으면 나는 어부가 되고 내가 구하려는
사람들은 물고기가 됩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은 이들이 갖는
자존감입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다가 기어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어부가 상처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실패를 통해 더 완벽한 어부로
성장합니다. 이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 낚는
어부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요,
하느님의 아들딸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믿음에서 오는 자존감만
있다면 실패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음을 믿는 우리는 이 모든 교육을 견뎌낼
준비가 되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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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르심과 선교사명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10일 연중 제5주일: 다해: 부르심과 선교사명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선교교령 2항에도 “교회는 본성상 선교를
그 사명으로 한다”고 하고 있다. 이 교회의 사명인 선교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사명은 바로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이사 6,1-2.3-8: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1독서에서는 우선 하느님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고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6,1) 즉 체험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먼저 가까이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때 인간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것에 대해 자신이 부당함을
느낀다는 것이다(5절).

그런데 스랍 하나가 뜨거운 돌을 집어 예언자의 입술에 대어
정화시켜주면서 그의 죄가 사해졌다고 한다(6-7절).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에야
구원의 활동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도전적인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가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고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의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또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따른다는 것은 정해진 길을 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에로의
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복종’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부르심은 헛되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복종의 길을 거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D. Bonhöffer, Sequela, Brescia 1971, pp. 41-42).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우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행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2독서: 1고린 15,1-11: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여러분은 믿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일허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1절).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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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2019년 다해 2월10일 연중 제5주일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처럼
겸손해져야 합니다!

낚시가 유난히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기대감이 너무 클 때입니다. 언젠가 명절 전에 낚시를 갔습니다.
큼지막한 대어들을 원없이 잡아, 이집 저집 제삿상 차림에 힘을
보태겠노라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초집중을 했지만, 끝끝내 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형제들에게 싱싱한 활어회를 즉석에서 원없이 먹게
해주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치며 포인트로 갔었습니다. 도마랑 회칼,
초장이랑 야채, 소주까지 몇병 챙겨서 갔습니다. 냄비랑, 버너랑,
양파, 무, 마늘, 풋고추, 고춧가루, 소금 등, 매운탕꺼리도 완벽하게
준비해갔습니다.

형제들은 다들 제 낚시대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끝끝내
꽝이었습니다.아무런 조과도 없이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올 때의
기분은 참혹함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과 다른 동료들도 밤 고기 잡이를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고기 좀 원없이 잡아서 가족들 앞에 얼굴 한번 세워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기대가 컸던지 완전
꽝이었습니다. 얼마나 맥이 빠졌던지 시몬은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복음 5장 5절)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던지는 한 말씀은 특별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나름 프로였던 시몬에게 예수님의 지시는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몬은 어린 시절부터 갈릴래아 호수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고기잡이만큼은 인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부와는 전혀 무관한 직종인 목수
출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니,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온종일 허탕을 쳐서 허탈해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서는 묻습니다.
“많이 잡았어요?” 그러면서 허락도 없이 텅텅 빈 남의 빈 어망을
들쳐봅니다. 그리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씩 웃습니다.

이어서 전문가라도 되는 듯이 미끼를 바꿔 보라는 둥, 저쪽이 더
낫다는 둥,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정말이지 기분이
거시기해지는 순간입니다.

꾼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 방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합니다. 누군가가 훈수를 두면 은근슬쩍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이 분야에는 최고인데, 나처럼
갈릴래아 호수 구석구석,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텐데...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즉시 마음을 바꾸어 순명합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꽤나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단호한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제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했으니, 지금까지 시몬이
고수해왔던 기존의 낡은 인생관이나 가치관, 고리타분한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모두 등 뒤로 던져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새로운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기 위해 말끔히 자신을
비워내라는 당부입니다.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기 위해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처럼 겸손해지라는 부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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